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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아의 일기장 Apr 06. 2022

밥상머리 대화

말하지 않으면 몰라요

아이들의 개학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여느 때 같았으면 설렘이 더 많았을 텐데 답답함이 내 마음을 지배하는 것은 기분 탓일까?

덩그러니 교복을 맞춰 놓고 중학교 입학을 기다리는 아들과 6학년이 되는 연년생 딸아이는 겨울 방학 내내 방과 거실을 서성거리며 하루하루를 빠듯하게 보냈다.


나는 알람 소리에 자을 깨고 눈을 뜨면서 아침을 준비하고, 아이들이 아침을 퉁퉁 부은 눈으로 뜨고 있을라치면 난 까슬한 입맛으로 겨우 커피 한 잔을 내려 마주 앉는다. 그나마 아침마다 나에게 주는 위로의 향기가 바로 그 커피 향이다. 쌉싸래하게 코 끝을 맴도는 그윽한 커피 향은 아이들이 함께할 수 없는 나만의 독식에서 오는 우월감과 특별함을 느끼게 해 주기도 한다.

커피를 홀짝이며 저작운동을 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잠은 잘 잤는지 꿈은 안 꿨는지 오늘 하루는 어떻게 보낼 계획인지 그리고 점심엔 뭘 먹고 싶은지 등 빼곡한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는다. 벌써 아침마다 10년을 넘게 해 온 밥상머리 대화는 우리 가족의 루틴이다. 하루의 시작을 서로의 밤새 안부와 하루의 계획을 나누며 서로에게 조금 더 관심과 애정을 확인하는 것이다. 부모로서 아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알아내고자 함은 아니다. 고로 나도 애들 아빠도 각자의 이야기를 꽤나 많이 아이들과 공유하는 편이다. 가끔은 엄마의 감정와 심리상태가 어떤지 왜 마음이 그런지에 대한 설명도 해준다. 결혼 생활을 하면서 겪는 여자로서의 엄마로서의 고민과 걱정 화나는 부분까지도 나는 애써 설명하려고 한다. 엄마의 감정을 숨기면 아이들은 가끔 엄마에게서 이해할 수 없는 까칠함을 느끼거나 거친 말투를 겪어야하거나 아니면 평소와는 다른 엄마를 경험해야하기 때문에 나는 이러한 감정의 혼돈을 아이들에게 경험시키고 싶지 않은 것이다.


아이들이 처음부터 엄마 감정을 이해하고 받아들이지는 못하지만 한 해 한 해 성장해 나가면서 이해의 폭도 넓고 깊어질 뿐만 아니라 타인의 감정에 따라 행동의 변화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기도 하고, 상대방의 감정에 대한 공감을 배우는 과정이기도 하기 때문에 나는 이런 가족의 대화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설령 아이들이 관심이 없는 이야기라고 할지라도 엄마 아빠의 생각과 일과 그리고 계획 등을 함께 공유하기 위함이다. 혹자는 아이들에게 너무 TMI 아니냐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커가는 아이들을 한 명 한 명의 인격체로 인정한다는 의미를 담뿍 담고 있는 밥상머리 대화는 우리 가족의 끈끈한 연대감을 늘 증명해 보이기고 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자리와 이 시간을 지속적으로 이어갈 것 같다.


가끔 옛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일일드라마를 보면 가족들의 식사 장면을 종종 마주하게 된다. 일반적인 상차림과는 조금 거리감이 있는 반찬 수가 놓여짐이 어색하긴 하지만 어쨌든 식탁에 둘러 앉아 있는 식구들의 모습은 지금의 우리 가족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가 않다. 그런데 왜 주로 부모님의 대사만 나오고 자녀들은 경청의 모습이 흔하게 연출되는지 모르겠다. 심지어 3대가 함께하는 대가족의 밥상에서 손주들의 입은 음식을 오물거릴 때만 사용되는 것이 대부분의 장면 연출이다. 대화가 오고 간다기 보다는 일방적인 소통의 장이 펼쳐지고 있는 것 같은 어색함과 한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놀이터에 방치되어 있는 시소 같은 느낌이 든다. 나 또한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면 밥상에서는 말없이 후다닥 먹고 일어나는 것이 예의라고 배웠던 적도 있었던 것 같다. 곰살맞은 대화를 나눴던 기억보다는 밥과 반찬 사이를 오가는 쨍그랑 거리는 수저의 쇳소리와 후루룩 쩝쩝소리의 절묘한 조화로움이 감돌았을 뿐 특별이 각자의 하루를 공유하거나 궁금해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건 흡사 드라마에서 나오는 어색한 장면이 아니라 우리집에서도 그랬구나 싶은 생각이 들고나니 왜 감독의 연출이 그러했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는 것 같기도 했다.


나도 남편도 그다지 다르지 않게 자랐던 것 같은데 지금의 우리는 왜 아이들과 밥상머리 대화에 유독 집중하고 있는 것일까? 아이들의 일상과 아이들의 생각과 아이들이 감정 하나 하나를 함께 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이들에 대한 무한 정보를 내 머릿속에 저장해 놓고 빅데이터에 의한 대응을 준비하고 있는 로봇맘의 자세일까? 여러가지의 궁금증이 들었다. 진심 궁금했다. 나는 왜 그리고 아이들 아빠는 왜 유독 밥상머리 대화에 적극적일까에 대해서.


한동안의 생각과 고민의 결과는 이러했다. 우리의 결론은 ‘존재감의 확인’이었다.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존재감에 대한 명확한 확인이 필요했다. 어릴 때 봤던 ‘나홀로 집에’라는 영화에서 공항에 덩그러니 떨궈진 남자 아이를 가족 아무도 인지 하고 있지 못했던 장면이 생생하다. 그 어떤 당황함도 그리고 자신을 잊어버린 가족들에 대한 원망이나 서러움이 하나도 안느껴지는 홀로 남겨진 아이의 반응이 더 신기방기했다. 우린 딸랑 네 식구인데 누군가를 잊는 것도 잊혀지는 것도 그리 달가운 일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조금만 서로에게 집중할 수 있다면 우리는 서로의 존재에 대해 조금은 더 적극적일 수 있을 것이고, 그 적극적임의 첫번째 표현이 대화이고 소통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관심의 표현인 것이다. 함께 하고 있다는 자각과 그에 따른 위로와 의지가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 같다. 둘째는 ‘공감’이었다. 가끔은 혼자 생각하고 있는 일들의 옳고 그름의 판단이 모호해 질 때도 있고, 때로는 확신의 힘을 얻기 위해 타인의 동조가 필요할 때도 있다. 바로 공감에서 오는 안정감과 위로가 우리의 삶의 질을 얼마나 풍요롭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기대가 있을 수 밖에 없고, 이 연의 끈에 대한 감사에 최선을 다하고 싶은 마음이 닿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이 귀한 결속에 대한 노력과 공유가 분명 꽤나 큰 의미가 있는 일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의미 있는 일의 시작이 우리는 ‘밥상머리 대화’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한 공간에서 함께 식구가 되는 그 공간 밥상. 그 안에서의 집중과 노력의 대화의 가치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족의 끈끈함이기 때문이다.


십여년 이어온 우리 가족의 밥상머리 대화.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매일 끝없는 대화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말 할 수 있어서 감사하고 들을 수 있어서 또 한번 감사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가족이 있어서 식구가 있어서 참 다행이다.

오늘 밤 우리 네 명을 또 한번의 밥상머리 대화를 위해 오늘 하루를 잘 보내고 잘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하루 하루 순간 순간이 더 소중할 것이다.

그래서 좋다.

매 순간이 소중하고 감사해서 좋다.

그래서 정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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