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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아의 일기장 Mar 18. 2022

어느 경단녀의 고백

경단녀인 줄 알았는데... 그런데 나는 고수였다...

나는 경단녀입니다.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나는 고수였습니다.


누가 만들었는지도 모르는 단어 '경단녀'.


이 타이틀이 내게도 사용될 줄은 몰랐다. 나는 항상 일을 하는 사람이었고, 세상에 쓰임 받는 사람이었다. 소위 말하는 최고 학력을 지닌 사람으로서 교수, 기자, 디자이너, 작가, 크리에이터, 박사, 편집장 둥 내 이름 석자 앞에 참 많은 수식어가 붙어 있었고, 분명 난 그 수식어에 걸맞은 일들을 척척 해 나가며 세상에 내 존재감을 뿜뿜하며 살고 있었다. 그런데 쥐도 새도 모르는 사이 내 이름 앞에는 수많은 타이틀 대신 '경단녀'라는 낯설고 듣기만 해도 어깨가 움츠려 드는 위협의 세 글자가 붙어 있었다. 허걱!이라고 당황했을 땐 이미 늦었다는 싸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냥 내 이름 석 자를 겨우 붙들고 있는 경단녀(경력이 단절된 여자)로서 아내, 엄마, 딸, 며느리, 학부모님 등의 새로운 수식어들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여전히 내 앞엔 화려한 수식어들이 붙어 있는데 내 기분은 왜 이리 유쾌하지 않은 것인지....


햇수로 13년 전 한 남자를 만나 버진로드를 신나게 걸어 들어갈 때에는 부모님께 감사의 인사를 하며 잠시 눈물을 삼킨 뒤로는 제대로 독립된 내 인생을 그리고 내 가족을 꾸려 간다는 희망에 살짝 흥분했었던 기억이 난다. '이제 내 마음대로 뭐든지 할 수 있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랑 꽁냥꽁냥 신나게 사는 거야!'라는 생각이 전부였던 것 같다. 결혼하고 채 100일이 지나지 않아 첫째 아이가 찾아왔고, 남들보다 조금 늦게 시작한 신혼에 그저 감사한 마음뿐이었다. 산부인과 의사로부터 롤러코스터를 서너 차례 탑승하고 하차하면서 조마조마 정신없이 열 달을 지나다 보니 신생아 병동 침상에 다리가 길어 삐져나오고 있는 아이가 누워 있었고, 유독 순했던 그 아이는 잠투정도 없어서 나는 정말 편안한 육아를 시작했다. 아이는 원래 이렇게 쉽게 키우는 건가보다 싶어 겁 없이 둘째를 가져야겠다는 용감한 생각을 했고, 어디 맛 좀 보란 듯이 출산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둘째가 찾아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냥 또 한 번의 감사의 마음으로 빨리 열 달을 채우는데 열중했던 것 같다. 적지 않은 나이에 결혼을 한 탓에 조급한 마음이 없었다면 거짓말일 테고, 정말로 감사하게 아기천사를 내려 주시니 더없는 감사함과 더불어 나 자신에 대한 대견함으로 그리고 세상 사람들에게 그동안 내 일하느라 결혼하지 않고 혼자 보냈던 시간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보란 듯이 증명이라도 한 듯한 느낌으로 그렇게 그 기분을 만끽했었다. 신혼의 달콤함은 반복된 임신과 출산으로 그리고 기저귀 가방과 유모차에 치대며 지내게 되었고, 그 수고로움과 힘듦은 세상의 일면식도 없었던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던져주는 "어머~ 아기가 너무 예뻐요', "우와 아들, 딸 다 가지셨네요. 부러워요" 같은 부러움 섞인 칭찬에 잠시 나 자신이 무엇을 하던 사람이었는지 망각하게 되었고, 마냥 보석 같은 두 아이의 엄마로 그리고 사랑받는 아내로 살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이 백 년 전부터 있었던 것처럼 익숙하게 대응했던 것 같다.


이런 익숙함은 나에게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던 것 같다. 둘째 아이의 돌잔치를 치렀을 즈음 후배로부터 안부 전화를 받았고, 후배와의 전화 내용의 요건은 이랬다. 일반적인 안부와 건강 그리고 나의 신혼생활에 대한 궁금증에 대한 별 의미 없는 무난한 질문들이었지만 그녀가 굳이 나에게 전화를 걸어 서두를 길고 길게 끄집어낸 데에는 따로 이유가 있었다. 지방 대학교긴 하지만 이번에 전임교수로 임용이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같이 모교에서 나는 강사로 그 후배는 내가 가르치는 박사과정 학생으로 인연을 맺은 탓에 사제지간의 연이 먼저였던 터라 아이에게 우유병을 물리고 있는 나에게 교원 임원이 되었다는 후배의 전화 내용은 가히 충격에 가까웠다. '맞아! 난 원래 엄마가 아니었어. 매일 이렇게 민낯으로 헐렁한 원피스 실내복을 입고 한 팔과 무릎배게를 기꺼이 두 아이에게 양보하며, 하루 24시간을 총동원해서 뺑뺑이 돌고 있는 이 모습은 너무 낯설잖아!'라는 생각이 들며 뭔가 커다란 둔기로 뒤통수를 가격 당한 듯한 느낌과 가슴이 뻐근해 질만큼 내 안에 꿈틀거림을 느끼게 되었다.


온몸에 전율이 오면서 '나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아. 뭔가 더 늦기 전에 나 자신을 다시 찾아야겠어!'라는 묵직한 끌림에 간신히 재워 놓은 두 아이를 뒤로 하고 교수 채용 공고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고, 나도 모르게 앞뒤 분간 없이 덜컥 응시원서를 제출하는 클릭을 하고 말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서류 전형에 합격됐다는 통보와 함께 테스트 강의와 면접일이 일사천리로 잡혔고, 앞으로 내게 펼쳐질 또 다른 고난의 길은 눈치챌 틈도 없이 난 앞만 보고 달렸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에 나는 서울에 있는 모대학에 전임교수로 최종 합격이 되었고, 정식 출근은 새해 아침 떡국을 먹고 바로 나오라는 것이었다. 허걱! 하며 내가 내 머리를 내리쳤을 때에는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고, 내 아이들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준비는 무지에 가까운 상태였다. 머릿속이 하얘지고 숨이 멎을 것 같은 당황이 밀려왔지만, 놓치고 싶지 않았고 놓쳐서도 안 되는 내 인생의 기회라고 생각했기에 나는 가까운 가족들부터 육아 동냥을 구걸하기 시작했다. 이튿날이 밝자마자 동네 어린이집을 알아보았고, 시댁과 친정에 번갈아가며 교수 임용 합격 소식을 전해 기쁨을 나누기도 전에 육아 동냥을 했고, 기꺼이 도움을 주겠다는 가족도 그리고 힘들어도 해보자는 가족들의 도움을 어깨에 얹고 난 내가 그렇게도 가고 싶었던 교수가 되었다.


내 이름 석자 뒤에 교수라는 타이틀이 붙은 명패가 떡하니 붙어 있는 책상을 마주하니 벅차오름이란 이루 말로 할 수 없었고, 하루하루 학생들과 꾸려가는 일상들이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아침 일곱 시면 남편과 한 차로 자는 두 아이와 가족 보호자에게 미안한 마음을 굽신거리며 전하고 출근길에 올랐고, 다시 저녁 일곱 시가 되면 남편과 한 차오 동승해 퇴근길에 올랐다. 매번 퇴근길에 차 속에서 남편과 나눴던 대화의 대부분은 육아 동냥에 대한 고마움보다는 미안함에서 오는 무거움에 대한 얘기들이었던 것 같다. 그래도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 현관을 들어서면 기가 막히게 달려와서 세상 제일 예쁘고 행복한 얼굴과 두 팔을 벌려 대대적인 환영과 사랑이 온기를 나눠 준 두 아이가 있어서 그 미안함은 잠시 뒷전에 내려놓고, 아이들의 하루에 대한 브리핑을 듣는 것을 시작으로 대강의 저녁식사와 설거지 그리고 다음 날을 위한 준비를 했었다. 미안함과 고마움 그리도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한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고, 오래가지도 못했다. 최선을 다해 도와주고 있던 가족들도 한계치에 다다르기 시작했고, 그런 모습을 보고 있는 내 마음의 돌덩이는 점점 커져 갔다.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딱히 괜찮은 생각은 나지 않았고, 행여 생각을 했다 해도 금세 아니라는 대답만 나 자신에게 메아리처럼 돌아오고 있었다. 난 결국 한 해 졸업생을 겨우 배출해 내고 난 후에 나 자신의 한 부분을 가차 없이 떼어내야 했다. 사직서를 하얀 봉투에 잘 넣어 구겨지지 않게 가방에 미리 넣어 놓고, 마지막 출근을 하러 가던 그날의 기억을 난 잊을 수가 없다. 출근길에 나를 떨궈 주던 남편과 서로를 응원하며 헤어지던 학교 근처 골목길에 비상등을 켜고 잠시 주차를 했고, 말없는 침묵이 잠시 흐른 뒤 운전석에 앉아 있던 남편은 나를 꼭 안아 주었다. 사실 말이 필요 없는 순간이었다. 우린 약속이라도 한 듯이 목 놓아 울었다. 남편은 사표를 내게 해서 미안해서 울었고, 난 사표를 내는 게 억울해서 울었고, 그래도 나의 슬픔에 미안해해 주는 사람이 있어서 고마워서 울었다. 아마 나 못지않게 남편에게도 잊힐 수 없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한동안은 내 얼굴에서 환한 미소나 밝은 에너지가 뿜어 나오지 못했고, 다시 일상으로의 복귀는 어쩔 수 없는 움직임이 있었을 뿐 그 어떤 흥이나 그 어떤 삶의 기쁨이 차오르지 못하고 있음을 시도 때도 없이 감지하며, 행여라도 아이들에게 이런 나의 어두움이 전이될까에 대한 걱정까지 가슴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이런 동굴 속에서 헤어 나올 수 있을까 수십 번 수 백번을 생각하고 고민했고, 난 두 아이의 숨소리와 웃음소리 그리고 체온을 오롯이 온몸으로 느끼며 '그래! 이 보석 같은 아이들이 내가 있어 이렇게 행복하다고 아우성치는데 더 이상 뭐가 필요해? 난 어쩌면 세상에 둘도 없는 행복을 지니고 사는 사람일지도 몰라! 즐기자! 즐기면 돼. 그러면 되는 거야!'라고 양 팔로 나 자신을 꼭 안아주며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한 순간에 매직처럼 펑~소리와 함께 행복한 사람이 되진 못했지만 차츰차츰 나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 꽤 행복한 사람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하루에도 열두 번 전화와 메시지로 나의 안부와 힘듦을 나눠 준 남편의 정성과 순하디 순한 아이들은 내게 분명 최고의 선물 같은 존재들이었다.


내가 사표를 내고 온지도 어언 십 년이 다 되어 간다. 젖 병을 물고 있던 아이들은 중학생과 초등학생이 되어 있다. 세상에 둘도 없이 귀한 내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그때 나의 그 선택이 얼마나 옳았는지를 되새김질해 준다. 가끔 나에게 일과 육아 사이에 갈등을 토로하는 후배들에게 나는 기꺼이 말해 준다. 육아를 선택한 것을 난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라고. 내 자리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살면서 한 번씩 내 자리에 대란 연민으로 우울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아이들의 포옹과 남편의 위로로 또 한 번 나를 일으킨다. 그러면 되는 거다.


지금부터는 작은 고백을 털어놓으려 한다. 가끔은 아주 가끔은 경력이 단절되어 있다는 사실 그리고 다시 내 일 터로 복귀할 수 있는 가능성이 1%로 남아 있지 않은 것 같다는 좌절의 생각이 들 때엔 정말 괴롭다. 우울하다. 슬프다. 그 어떤 감정 미사여구로도 표현되지 못할 만큼 최악이 된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일 년에 서너 번은 족히 난 이 최악의 감정의 쳇바퀴를 돌려야 한다. 뭔지 모르는 나를 찾고자 하는 꿈틑거림이 마치 휴화산의 용암이 조용히 꿀럭거리고 있듯이 내 안에 분명 아직도 존재하고 있음을 난 느낀다. 그 안에서 문득 열감이 느껴지고 우울감이 찾아오면 폭발을 코 앞에 두고 있는 화산처럼 분화구에 불 꽃이 튀기 시작하기도 한다. 그럴 때가 오면 난 늘 이런 생각을 한다. '이 불씨가 튀어 정말 불이 나면 어쩌지? 그러면 안 될 텐데... 내가 꺼버릴 수 있는 불이라면 내가 물을 부어야겠다. 바람이 불어 이 불씨를 날려 보내지 못하도록...'.


정신을 차리고 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축지법이라도 쓴 사람처럼 주방에 서 있다. 그러고는 숭덩숭덩 무를 썰기도 하고 보글보글 찌개를 끓이기도 하고, 달달 고기를 볶기고 하며 나만의 오케스트라를 연주한다. 화음을 잘 맞추고 나서 식탁 위에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잘 정렬해 세워 놓고 남편과 아이들이 빠짐없이 VIP 객석에 자리를 하고 두 눈과 귀 그리고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온 신경을 집중해 주는 긴장 상태를 함께 해 준다. 내가 연주의 시작을 알리면 나의 사랑하는 가족들은 식탁 위의 오케스트라에 감사와 칭찬의 박수와 격려를 기꺼이 내어 준다. 나는 매일 서너 번의 연주를 하고 있다. 지금 난 현역으로 활동하는 밥상 위 오케스트라 총지휘자가 되어있다. 여태 10년이 지나도록 나의 공연은 단 하루도 쉬어 간 날이 없다. 기네스북에 등재될 만큼의 횟수와 출석률을 자랑할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게다가 늘 만석이다. 단 한 번의 공연도 실패해 본 적이 없다.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난 이런 사람이다. 후훗.


난 이제 더 이상 '경단녀'가 아니다.

나는 세상에서 제일 당당한 '경단녀'이다.

난 '최고의 밥상' 오케스트라 단장이다.

난 그런 나 자신이 좋다.


난 세상에 둘도 없는 고. 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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