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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끼적대는 끼서 Jan 17. 2023

봄소풍

네덜란드 교환학생 D+53

2017년 3월 12일 일요일


오늘은 마스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화창한 날씨였다.

그래서일까, 평소에 지은이가 아침에 부시럭거리면서 학교 갈 준비를 하거나 말거나 깬 적이 없던 내가 웬일인지 일찍 눈을 떴다. 지은이는 오늘 아침 일찍 파리로 떠나는데, 지은이에게 잘 다녀오라고 인사를 하고 나니 정신이 조금 말똥말똥해졌다. 어쩌면 오늘의 소풍이 기대돼서 일찍 깬 걸지도 모르겠다.


조금 밍기적거리다가 9시에 일어나서 큐켄호프(네덜란드의 튤립축제)를 위해 야심차게 사온 꽃무늬 블라우스를 개시했다. 강남역을 지나다닐 때 며칠간 자꾸만 내 시선을 붙잡았던 블라우스인데, 처음 입어보는 스타일의 카라라서 내가 입으면 어떨지 고민하느라 계속 망설였었다. 그런데 어느 날 평소와 같이 역 내부를 지나가는데, 그 블라우스가 늘 걸려있던 자리에 없었다. 황급히 가게에 들어가보니 거짓말처럼 마지막 한 장이 딱 남아있어서 냉큼 사왔다. 이런 게 바로 운명적인 소비라고 생각한다. 이건 나에게 와야만 하는 물건이었던 거지!


영아언니와 약속한 대로 11시에 만나서 BELT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어제 양상추를 사둔 덕분에 딱 네가지 재료가 다 준비되었다. 샌드위치랑 언니의 크루아상과 잼, 사과 한라봉 딸기 포도 등의 과일들을 잘 포장해서 담으니 나름 그럴듯한 소풍 느낌이 났다. 거기에 윤진이가 사온 아임리얼st 주스와 과자들까지!


영아언니랑 나름 빨간색-와인색으로 뜻하지 않은 트윈룩이 되었다!


우리가 봄소풍 장소로 선택한 곳은 마스트리히트의 오래된 성벽*이다. 무려 14세기에 지어진 곳이라는데, 엄청난 세월의 흔적이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꽤 보존이 잘 되어있다. 마스트리히트 대학 도서관 근처에 있어서 지나다니면서 슬쩍 구경해 보니 날이 좋으면 사람들이 성벽 위에 쪼로록 앉아서 햇빛을 즐기는 것 같았다. 마침 옆에 강(인지 시냇물인지 아무튼)도 있고 공원도 있어서 뷰가 좋다.

*구글맵에 찾아보니 명칭이 Stadsmuur Nieuwenhofstraat라고 한다! 위치는 (https://goo.gl/maps/r1P9XyDPzxPqpGYq8) 여기!


성벽 위로 올라가니 역시 오늘도 사람들이 꽤나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그래도 우리가 갔을 때에는 좋은 자리가 아직 다 차지 않아서, 우리는 따뜻한 햇볓을 받는 위치에 나란히 앉아서 도시락을 폈다. 날씨가 좋아서 그런가, 사진을 찍으니 마치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옆에 보이는 흰 운동화는 과감하게 성벽 끝에 걸터앉아서 다리를 대롱거리는 윤진이의 발이다. 나는 쫄보여서 안쪽에 얌전히 앉아있었다. 우리는 버스커버스커의 봄 노래들을 틀어놓고 한껏 봄 분위기를 즐겼다.


사실 우리나라라면 생각도 못할 일인 것 같긴 한데, 이 성벽에는 어떠한 안전 장치도 없다. 잘못하면 바로 아래로 떨어져 낙사할 수도 있는 성벽 위에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이다. 아래 사진에서 발 아래 초록색은 우리 발을 받쳐주는 성벽 바닥이 아니라, 성벽 아래에 있는 수풀들이다. 즉, 우리 발은 허공에 떠 있다는 것!

로퍼가 혹시 떨어질까 봐 옆에 벗어둬서 나만 양말바람이다ㅋㅋㅋㅋ


햇빛을 받으며 비타민 D를 잔뜩 만드니 행복해졌다. 후식으로 과일이랑 윤진이가 가져온 꿀꽈배기+하리보 젤리까지 알뜰하게 다 먹고 나서, 먹통이 된 내 보다폰을 고치러 마켓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항상 공사중인 샛길을 지나가면서 보는 당나귀. 또 이걸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기어이 앉아서 사진을 찍고 말았다. 근데 내가 앉아있으니까 어린애들이 자기들도 앉고 싶었는지 몰려오는 바람에 민망하게 내려왔다ㅋㅋㅋㅋ역시 다들 이 당나귀 보면서 한번쯤 앉고 싶어할 줄 알았다~

지금 보니 치마가 너무 짧은 것 같아서 길이를 늘려주었다ㅋㅋㅋㅋㅋㅋㅋㅋ


마켓에서는 날씨도 좋고 입도 심심하고 해서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 먹었다. 원래는 마켓 바로 앞의 핑키(젤라또 체인점)에 가려다가 줄이 너무 길어서 골목 핑키로 도망쳐오니 소프트콘만 팔고 있더라. 사실 여기 오고 나서 이 혼합 소프트콘이 너무 그리웠기 때문에 맛있게 먹었다. 근데 이게 두번째 사이즈 콘인데도 양이 은근 많다. 2.5유로의 행복이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마스 강가로 걸어가니 이렇게 예쁜 마스강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사실 가까이 가서 보면 뿌연 구정물인데 멀리서 보면 참 예쁘다. 사진을 자세히 보면 마스 다리 위에도 사람들이 앉아서 광합성을 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집으로 돌아와 저녁 먹기 전까지 잠깐 쉬는데, 창문 밖 풍경이 너무 예뻐서 창가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 하염없이 구경만 했는데도 질리지 않았다.


마스는 해가 정말 금방 진다. 이 세 장의 사진이 불과 한시간 내에 찍은 사진들이라는 사실!


저녁으로는 셋이서 치즈김치참치불고기볶음밥과 육개장, 스팸과 김을 먹었다. 한국에서 자취해도 이것보다 잘 먹지는 못할 것 같다ㅋㅋㅋㅋㅋㅋ 후식은 윤진이가 가져온 키위와(사진을 못찍은걸 지금 깨달았다) 어제 동방행에서 사온 말차 라떼!!! 저기에는 물에 타라고 되어있지만 역시 이런건 우유에 타야 더 고소하고 맛있다.


마스트리히트는 평화로운 시골 도시지만, 막상 이렇게 소소하고 평화로운 하루를 보내기는 의외로 힘들다. 물론 그건 나와 지은이가 파티나 행사에 빠지지 않고 놀러다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ㅋㅋㅋㅋ아무튼 이렇게 수업 없음과 날씨 좋음, 두 가지가 다 갖춰져서 행복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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