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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꼼꼼 Nov 18. 2024

변화 | 02
버려야 할 것들, 지켜야 할 것들

‘교회의 건강함’- 버려야 할 것과 지켜야 할 것 첫 번째 이야기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지켜야 할까요? 

먼저 우리가 생각하는 ‘건강한 교회’를 버리는 것은 어떨까요?


과거를 살펴보면. 

건강한 교회 됨에 대한 생각은 ‘민주적 운영’과 ‘투명한 재정의 운영’이라는 것이 중심 되어있고, 그러한 내용이 담긴 ‘교회 정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정관을 제정함으로써 민주적 운영이라는 것에 대한 구조를 확보하여 목사나 교회 리더들의 전횡을 방지하고 평신도들의 참여를 높이는 방안과 재정운영에 대한 공개적 지침들을 명시함으로써 투명한 재정의 운영을 확보하려는 노력입니다. 


과거에 이야기했던 이런 ‘건강한 교회 됨’에 대한 이야기와 방식을 이제 재고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2000년대를 맞이하면서 한국교회는 여러 가지 문제들 가운데에서 표류하고 있었습니다.  몇몇의 교회는 이미 대형화를 넘어 초대형화되었고, 곳곳에서 목사의 비리와 불법세습의 이야기가 터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교회를 등지고 떠나는 일들이 벌어졌으며, 일반 사회에서도 혀를 차며 교회를 걱정하는 시기였습니다.

어떤 이는 이 시기를 2007년으로 생각합니다. 평양대부흥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의 실패, 이랜드 비정규직 사태로 인한 기독교 기업의 이미지 실추, 아프간 피랍 사태로 말미암은 한국 개신교 전반에 대한 회의, 장로 대통령이 당선되었음에도 달라지지 않는 한국의 사회, 그리고 대형교회 목사들의 학력위조 사건에 이르기까지 짧은 한 해동안 터져 나온 굵직한 이슈가 많았습니다. 이런 교회의 이미지 실추는 가뜩이나 정체된 교회의 분위기를 더욱더 얼어붙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제도적 교회로부터 이탈하는 신자들이 급격하게 늘어났습니다. 


한국교회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습니다.  


목사가 가지고 있는 특권적 의식에 대한 비판으로서 ‘성직주의’,  

교회의 무한 성장에만 매달리고 있는  ‘성장주의’,  

영적 우월주의에서 비롯되어 일상와 평범함을 무시하던  ‘승리주의’가 만연했습니다.


이러한 때에 교회개혁과 변화를 일으키려는 운동이 등장했습니다. 

목회자 중심적이던 성직주의에 반대하여 만인제사장의 가르침을 따라 ‘민주적 운영’이라는 것을 시작합니다.  교회는  누구 한 사람의 권한과 책임만을 강조하지 않고 규약에 따른 분권과 상호책임의 모습을 지향하게 됩니다.  또한 교회의 재정이 단지 세력을 키우고 건물을 늘리려 은행에서 빚을 내면서도 부동산에 집착하던 것에서 벗어나고, 바른 상호부조의 의미로서 재정이 운용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재정의 투명성에 대한 마음을 담았습니다. 적절한 때와 장소와 분량으로 재정이 잘 사용되어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용기 있는 결정이었습니다. 당시 교회들과는 다른 길을 걷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이러한 결정은 건강한 교회를 꿈꾸는 많은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모습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정관’이라는 명시된 구조안에 담았습니다. 정관의 제정을 통해 우리의 고민이 일단락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후로도 한참 우리는 ‘민주적 정관’이라는 주제에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났습니다. 오늘날에는 어떨까요? 


민주적 운영이라고 하여 평신도들의 참여를 이루고자 하는 것은 몇몇 교회의 특성화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많은 중대형의 교회들도 이런 방식을 사용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이 정말 민주적 운영인지는 모호할 수도 있지만 강력한 구조 안에서 성도들의 이야기를 취합하고 의사결정의 상부 구조와 결정권자에게로 공유되며,  그 내용을 분석하고 각 사람들에게 회신을 해주고 참여와 공유를 일으키는 교회들이 많아졌습니다.  의견을 수렴하고 긍정적 의견에 따라  방식을  바꾸어가는 것은 강력한 구조를 가진 기존의 교회에서 훨씬 효과적입니다.


내용에 따라 다를지 모르지만 그렇게 평신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평신도가 참여하는  건강한 교회라는 것은 특별한 교회 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시대와 주어진 상황에 따라 유연한 모습이 오히려 강력한 구조를 가진 교회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틀’을 바꾸면 그 틀에 순화적인 평신도로 인해 오히려 더욱 빠르게 개선이 되고 있습니다. 


재정의 투명성에 대한 문제도 그러합니다. 

많은 중대형의 교회들이 회계감사보고서를 인터넷에 게재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외부회계감사’를 받는 교회도 있습니다. 평신도가 예전과는 달리 이런 부분에 민감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기존 교회가 발 빠르게 움직여 왔습니다. 당회와 재정부를 분리한 교회도 있습니다. 수천 명 모이는 교회의 목사이지만 재정부에서 책정한 월급을 받는 모양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교회는 재정이 투명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거기에 외부회계감사도 받는다고 하니 어느 교회가 재정이 더 투명한가에 대한 객관적 기준에 대한 특별함이 사라졌습니다. 


정관의 제정이라는 것도 그러합니다. 

교회의 관계적 결합을 명시적이고 법적인 절차로 만드는 것에 한계를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구조화된 제자화를 비판하는 가운데 우리는 구조화된 민주화를 추구하는 모습이 된 것입니다. 정관이 오히려 우리의 발목을 틀어쥐고는 유기적으로 자라 가는 관계적 공동체의 숨 쉼을 저해하는 일들이 발생되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이런 구조와 정관의 제정이 곧 건강성의 확보라는 생각은 교회의 살아있는 건강성을 구조와 정관 뒤에 숨겨버리는 답답함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답답함은 새로운 세대에게는 잘 맞지 않는 옷과 같아 보입니다.  


건강한 교회는 건강하고 성숙한 성도들의 경건이 이루어 내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의 장성한 분량으로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는 성도들이 이루는 건강성을 기초하는 것이었지 율법의 조문과 유사한 법칙으로 대체될 수 없던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던 ‘건강한 교회’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이것을 버리면 과거의 열정과 노력이 사라지는 것과 같은 아픔이 있을지라도 버릴 것은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과거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건강한 교회’를 지켜야 합니다.  


한국교회를 다시 조망하고 우리의 현재를 분석하여 지금 이 시대 속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건강한 교회’를 지켜야 합니다. 여전히 교회는 아프고, 병들어 신음하고 있는 가운데 있습니다.  


기존의 교회에서는 단지 ‘순종’ 잘하고 교회 참여도가 높으면 건강하다고 이야기하고,  사회적 영성을 강조하는 교회는 사회적 거리감을 줄이는 것이 건강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은사주의자들은 은사의 나타남에 건강함의 기준을 두고, 교회개혁을 하는 교회들에서는 얼마나 많이 비판하고 개혁했는가가 건강함의 기준이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런 내용들이 교회의 건강함에 대한 성경적 기준이 되는 것인지 조목조목 살펴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건강한 교회에 대한 담론을 구체적으로 다시 고민해야 합니다. 


이와 함께 초고령화시대를 앞두고 있는 사회 속에서  건강한 교회는 무엇인지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단순하게 어르신들 모아놓고 노래 가르치며,  레크리에이션 하고 점심제공하는 것으로 할 도리를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오늘의 교회에 일침을 가해야 합니다.  사회학적으로 청소년, 어린이들이 줄었습니다. 결혼과 자녀를 포기한 젊은이들이 늘었습니다. 이들에게 우리는 어떻게 믿음의 유산을 남겨 주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합니다.  미래가  암담한 청년들을 어떻게 교회가 수용할 수 있는지, 어린 자녀를 출산하여 변변한 ‘자모실’도 없는 가운데 버티고 있는 젊은 부부들을 어떻게 가르치고 믿음의 성숙을 일으켜 낼지 고민해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주어진 ‘건강한 교회’에 대한 꿈을 재발견하려는 노력이 교회 전반을 살피면서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과거의 ‘위험한 기억’을 버려야 합니다. 여전히 우리가 건강할 것이라는 ‘허위의식’을 벗고 지금  교회의 문제들을 마주할 용기가 필요할 때입니다.  구조 뒤에 ‘숨어서’ 안주하고 있다면 오래전 우리가 꿈꾸던 교회의 건강성에 대한 내일은 암담할 수밖에 없습니다. 



작음’ - 버려야 할 것과 지켜야 할 두 번째 이야기 


또 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추구했던 ‘작음’의 가치를 버려야 합니다. 


왜 우리는 ‘작음’을 추구하고 있었을까요? 

교회의 건강함이야 앞서 이야기한 ‘민주적 운영’과 ‘재정의 투명성’이라고 하는 큰 주제로 요약되어 있습니다만 ‘작음’에 대하여는 합의된 내용이나 ‘작음’의 가치가 이렇게 중요하니 우리는 이것을 추구하겠다고 선언한 내용이 담론으로 그치고 교회 현장에는 제대로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지난날의 글을 살펴보면  많은 교회들이 개교회의 유지와 성장에 몰두하면서 단순한 종교집단이나 교회답지 않은 교회로 전락하여 그리스도의 사명을 수행하기는커녕 사회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는 안타까운 현실에 있다고 지적하면서 영향력 있는 대형교회가 이런 한국교회의 현실에 앞장서고 있지 않음을 비판합니다.  

그러면 이제 교회개혁을 꿈꾸는 교회들이라도 앞장서서 교회의 건강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불행히도 교회건강을 염원하는 형제교회들은 대부분 규모가 영세하며 따라서 단독으로 개교회의 경계를 넘는 영향력을 발휘하기에는 역부족인 것이 현실”을 바라보며. 

“개 교회의 대형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나타나기 쉬운 병폐를 피하면서도 대형교회가 갖는 이상의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교회의 연합’이 필요하다고 많은 이들이 말했습니다.  

한국 교회의 건강성 회복이라는 주제는 뚜렷이 등장하지만 ‘작음’을 추구한다는 내용에 대한 설득이 부족해 보입니다. 오히려 대형교회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피해야 할 것들이 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이것은 교회의 숫자적 성장에 대하여 완벽히 부정하고 있지는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가 추구하는 ‘작음’은 도대체 어디에서 등장한 것이며, 그 ‘작음’에 대한 이해는 무엇입니까? 


이 질문을 던져 놓고 나는 다음 무엇을 써야 할지 막막합니다. 

한동안 교회의 작음이 ‘몇 명’ 까지냐의 논의도 상당했습니다. 왜 작아야 하는지도 서로 다른데 그것을 명시적으로 만들어 ‘몇 명이다’로 말하기는 더욱더 난감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성도의 수를 제한한다는 것이 이론적으로 가능했을지라도 정서적인 괴리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작음을 추구한다고 하여 ‘분립’의 가치가 등장했습니다. 


‘작음’에 대하여도 서로 간의 이해와 합의가 부족하고 정서적으로 동의도 안 되는 가운데 ‘분립’은 더더욱 힘든 이야기가 됩니다.  


이유도 모른 채 받아들여야 하는 ‘작음’과 ‘분립’은 교회의 안정성을 해치는 또 다른 복병이 되고 말았습니다. 

복잡한 과정의 ‘분립’을 피하려면 그냥 지금 이대로 있어야 합니다. 

굳이 교회로 사람을 이끌어 들이면 안 되고, 오더라도 적당히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이해관계는 꼬인 실타래처럼 점점 복잡해지는 가운데 지난 기간 동안 ‘작음’에 대한 공론장 한번 제대로 열린 적이 없는 것은 더욱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인가요? 어느 사이에 작음이 곧  건강하다는 이상한 논리가 많은 곳에 퍼져 있습니다. 자기 교회를 소개할 때 ‘저희는 작고 건강한 교회입니다.’라는 소개가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뒤로는 작음이 가져다주는 불편함에 대해서는 극복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합니다. ‘작음’을 의도적으로 추구했는지 아니면 크지 못해 작은지는 모르겠지만 작음이 가져다주는 어려움에는 익숙하지 않은가 봅니다.

사실 작음에 익숙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이러는 가운데 ‘교회를 분립하는 건강한 교회’의 가치는 대형 교회가 가져갔습니다. 


자신의 교회는 몇 개의 교회를 분립하고 지원은 어떻게 하는지 자랑스럽게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한국교회의 건강성을 위해 노력한다고 주변에 알리고 있습니다. 


우리도 몰랐던 작음과 단순함의 가치를 오히려 대형 교회에서 각 교구나 구역에 접목하여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만들어가는 노력이 한창입니다.


우리 스스로도 왜 작아져야 하는지 규정하지 못한 ‘작음’을 버려야 합니다. 

작으면 된다는 단순한 생각도 버려야 합니다. 무조건 작으면 건강하다는 생각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작음’을 지켜야 합니다. 


건강한 교회는 건강한 성도들이 이루어갑니다. 함께 참여하고 서로의 짐을 져주는 것입니다. 가진 것을 실제로 나누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유기적인 관계의 깊음이 건강한 교회를 떠 받치고 있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런 관계의 깊음을 위해서라면 우리는 두 가지의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먼저는 ‘공감’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표현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의 마음을 공감해 준다는 것은 몇 마디의 위로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마음이 상대의 마음에 닿아야 합니다. 서로의 일상을 이해하고, 용납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감’을 일으켜 내야 합니다. 


다음은 ‘소통’입니다. 공감대를 형성하여 정서적 친밀함이 필요합니다.  앞서 이야기한 ‘관계의 통증’을 해결하기 위하여 우리는 각기 다른 세대의 마음을 공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소통의 기술’을 키워내는 것입니다. 소통은 기술적인 요인이 강합니다. 말 한마디, 태도 하나하나를 점검하고 예의 있고 격식 있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그런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경청’의 기술도 필요합니다. 말하기와 듣기는 소통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공감과 소통의 풍성함을 통해 관계의 깊음을 형성해 갑니다. 이것은 단시간에 형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를 탐색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신뢰가 쌓이는 관계가 몇 번의 만남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과 서로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런 관계가 촘촘히 연결되기 위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교회의 사이즈에 대하여 논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작음’의 가치를 새롭게 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작음’에 대한 풍성한 논의는 이제 시작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단순한 작음이 아니라 이 시대 속에서 교회다움을 이루어내는 풍성한 가치가 우리로 하여금 자유롭게 ‘작음’을 결정하도록 해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노력과 이룸은 충분에 있지 않으며, 출발에 있다는 사실을 깊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 - 버려야 할 것과 지켜야 할 세 번째 이야기 


‘우리’라고 하는 단일성을 버려야 합니다.  


2004년 9월 2일에 대한무역진흥공사가 세계 70개국의 만 20세 이상 성인 남녀 9,939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것이 있습니다. 

오래된 자료이긴 하지만 외국인이 우리나라를 바라보는 객관적인 시각에 대해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외국인들에게 ‘한국,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부정적인 이미지’에 대해서 질문했습니다. 


이들은 한국의 ‘패거리 문화’에 대하여 가장 높은 점수를 주었습니다.  

한국사람의 정서에는 ‘배타적 민족주의’가 자리 잡고 있으며, 이것은 내부적 결속을 강하게 하고, 외부의 문화나 공동체에 대하여 적대적이거나 배타적 행동과 정서로 드러난다고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사회의 강력한 독점적인 관계망은 그 관계 안에 속한 사람들의 공동체의식을 높이는 것과 동시에 외부와의 관계에서 차별이 존재하는 관계망을 쉽게 형성하는 것입니다. 


이탈리아 범죄조직을 의미하던 ‘마피아’라는 단어를 특정 관계 안에서 사용되어 정부관료 출신의 ‘관피아’, 철도 관련 사람들의 ‘철피아’ 같은 단어가 생겨나고, 언론에서도 공공연하게 사용되는 대구, 경북 출신의 TK,  부산, 경남 출신의 PK,라는 단어들도 아주 쉽게 접하게 됩니다. 여기에 ‘호남향우회’, ‘해병전우회’, ‘고대교우회’ 같은 모임은 이들의 강력한 내부 결속력이 무엇인지 알게 해 줍니다. 


이것은 한국사회를 특징짓는 독특한 공동체 의식입니다. 그리고 이런 독특한 공동체 의식 가운데에서 ‘우리’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우리’ 의식은 어느 순간 ‘나’라는 단어를 대체하고, 당연하게 개인보다는 공동체나 ‘우리’라는 집단의식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우리’ 의식의 강화로 인한 공동체 주의는 기존의 공동체를 유지하던 제도나 가치등을 변화시키려는 모든 시도를 ‘거부’하고 ‘억압’ 해 왔습니다. 개인의 의견은 공동체의 특정한 규범이나 의식 아래의 것으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강한 ‘우리’ 의식은 각자의 권리보다는 공동체적인 ‘목표’가 더 중요한 가치를 이루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개인의 의견과 권리는 보장되기 어렵습니다. 

처음에는 각 개인이 모여 공동의 ‘우리’ 의식을 만들었겠지만 시간이 지나 그 의식이 고착화되면 ‘우리’ 의식이 각 개인을 통제하는 일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 의식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거나 이탈하는 경우에는 그를 이탈자라 규정하고 더 새롭고 강력한 ‘우리’ 의식을 만들어내며, 그로써 이탈자들이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과정을 되풀이합니다. 권용혁 교수는 한국사회는 개인적 자유나 권리의 과잉으로 신음하는 사회라기보다는 공동체적 유대감과 가치들의 과잉으로 건전한 시민이 죽어가는 그러한 사회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우리’ 의식의 표현은 한국 사회의 ‘패거리’ 문화일 것입니다. 

비슷한 분류의 패거리들도 다른 패거리와 만나면 무조건 자기들 패거리가 옳다고 주장하고, 합리적인 공론장보다는 무조건 자기 패거리가 맞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떤 때에는 자기 패거리가 틀린 말을 해도 그 패거리 안에서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자기 패거리의 ‘편’을 들어야만 하는 문화가 생긴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강한 결속력과 ‘우리’ 의식이 무조건 나쁜 것일까? 

사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런 강한 우리 의식은 새로운 사회를 이루어가는 때에 필요한 의식입니다. 변화와 성숙을 일으키는 강한 ‘우리’ 의식을 기반으로 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분명합니다.  


버려야 할  우리 의식은 긍정 요소로서의 의식이 아닙니다. 우리 의식이 가진 한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변화와 성숙을 위해서는  필요한 우리 의식이지만 이런 의식은 안정화된 시기를 거치면서 ‘고착화’ 되고 다음 세대로 변화와 성숙이 필요한 때에는 

도리어 우리의 발목을 잡는 원인이 됩니다


 ‘우리’ 의식이 위기임을 직감하면 더욱 내부 결속을 다지며 ‘우리끼리’라고 하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러한 방어기제는 동시대적인  생각을 방해합니다. 강한 내부 결속은 시간이 지나면서 더더욱 시대와 멀어져 고립되게 되고, 그 후에는 스스로가 ‘패배자’가 되었음을 인정하지 못하고 열등감에 시달리는 패배주의적 ‘우리’ 의식으로 발전합니다. 

결국엔 과거의 ‘위험한 기억’ 속에 있는 몇 개의 기득권을 지키고자 애쓰다가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합니다. 기후 변화에 약해서 멸종하는 공룡을 떠올려 보십시오. 한국교회도 외부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존재의 위협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릅니다. 


강한 ‘우리’ 의식은 사회전반에 흐르는 개방과 소통, 공유의 시대를 거스르면서 오히려 고립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강한 ‘우리’ 의식을 버려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의식을 지켜야 합니다. 


‘편’을 나누어 형성된 ‘우리’가 아니라 서로의 곁을 지켜주고 격려하는 ‘우리’의 의식이 가득해야 합니다. 우리는 한국교회가 갱신하고 개혁하는 데에 마음을 쏟지 않고 있는 현실에 대해 아파합니다. 작은 교회들일지라도 함께 연합하여 함께 꿈을 꾼다면 한국교회를 건강하게 세워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세상으로부터 지탄이 된 교회의 현실을 아파하고 함께 슬퍼하는 사람들이 모여 서로를 격려하는 연합과 우리를 회복해야 합니다. 


부족해도 되고, 작아도 되고, 연약해도 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땅에 교회다운 교회, 성도다운 성도를 꿈꾸며 함께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한 마음으로 서서 하나의 뜻을 가지고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서로 격려하고 협력하고자 하는 것이 우리 마음이었습니다. 

우리 안에 새로운 우리 의식이 필요합니다. 진정 우리가 꿈꾸던 ‘우리의 모습’이 무엇이었는지 깊은 고민의 때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정체성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이 앞으로 우리가 오래도록 한국교회의 건강성과 복음전함의 의미 있는 일들을 함께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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