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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로운백년 Oct 12. 2023

더는 내 것이 아닌 우울을 어떻게 위로할까

9와 숫자들 - 착한 거짓말들

더는 내 것이 아닌 우울을 어떻게 위로할까

9와 숫자들 - 착한 거짓말들



나는 말이야, 내 우울이 네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길 바랐어. 내가 아는 넌 절대 흔들리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어. 나는 네가 썩지도 갈라지지도 않고, 어떤 바람이나 벼락에도 절대 부러지지 않을 거라 믿었어. 반면에 내 뿌리는 너무도 약하고 얕아서, 잔바람에도 휘어질 듯 휘청였어. 그럼에도 부서지는 법이 없었던 데는, 깊은 뿌리로 받치고 선 네가 있기 때문이었어. 그 모습이 언제까지고 여전하길 바랐어. 네가 없었다면 나는 진작 무너지고 말았을 거야. 포기해 버렸겠지. 네게 많이 고마웠어. 그리고 계속 그러고 싶었어.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네게 기대고, 의지하고 싶었어.


나는 네 안에서 얼마나 많은 것들이 병들어 가는지 몰랐어. 아니, 알고 있었던 걸까. 가끔 넌 우울을 토로했지. 나만큼 자주 드러내진 않았지만, 가끔 네 어두운 면을 뒤집어 보이곤 했어. 그런데 나는 애써 묻지 않았어. 위로하지도 않았지. 오히려 외면해 버렸어. 그건 내 몫이라고 생각했거든. 연극엔 각자 정해진 역할이 있는 것처럼, 나약한 건 언제나 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렇게 내가 더 이상 헤집지 않으면, 네 우울은 금세 사그라들었어. 넌 언제 그랬냐는 듯 또다시 웃는 얼굴로 내게 왔어. 다시 긍정적인 말들로 나를 채우고, 무너지려는 나를 매번 붙잡았어. 그래서 난 네 우울이 일시적인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어. 나처럼 마음의 밑바탕에 숱하게 깔려 있는 우울과는 다른 결의 그것이라고 생각했어. 너는 언제든 마음먹으면 우울을 잘 밀어내곤 했잖아. 난 그런 네가 대단하다고 생각했고, 한편으론 부러웠고, 또 고마웠어. 덕분에 나는 마음껏 우울을 펼쳐낼 수 있었잖아.


그런데 언젠가부터 네 우울이 조금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어. 더 이상 내가 위로할 수 없는 근원적인 우울이 네게도 자라난 듯했어. 나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어. 내게도 그런 것들이 전부터 있었으니까. 누구보다 잘 알지. 그런 류의 우울은. 너는 자주 슬퍼했고, 내가 아무리 위로하고 좋은 말을 건네도 그대로 튕겨내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 내 말이 네게 결코 닫지 않는 기분을 알게 되면서, 나는 무력해졌어. 아마 너도 그랬을까. 네가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나는 항상 우울을 끊어내려 하지 않았어. 오히려 나는 내가 존재하기 위해선 우울을 붙잡고 있어야만 할 것 같았어. 그럴 때마다 너도 이렇게 무력했을까. 기운이 빠져 버렸을까.


그러다 결국에는 네 우울이 내게서 비롯된 건 아닐까 생각하게 됐어. 우울은 쉽게 전염되는 감정이잖아. 맥 빠지는 소리만 하다 보면, 쉽게 같이 힘이 빠지고 말지. 처음 널 만났을 때 넌 우울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이렇게 돼버린 데는 내 잘못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 무심코 네 앞에서 내뱉은 한숨을 후회했어. 수시로 꺼냈던 부정적인 단어들을, 과장되게 부풀렸던 슬픔을 후회했어. 어느 순간 네가 슬픔을 알아 버린 건, 우리가 나이가 들어서일까 아니면 끝없는 내 우울이 비롯한 결과인 걸까. 나는 왜 자꾸 후자인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가 없지?


네 안에는 내가 모르는, 내가 묻지 않은 얼마나 수많은 슬픔이 자리하고 있을까? 그것들이 널 안에서 어떻게 갉아먹고 있을까. 내가 어떻게 해야 네게 닥친 우울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을까. 너도 날 위해 이런 고민들을 했을까. 이렇게 속으로 하는 고민들이 어떤 소용이 있기는 한 걸까. 나도 잘 모르겠어. 네가 우울할 때 어떻게 해줘야 할지. 그저 존재하는 걸로 위로가 되기엔 네 우울이 조금 더 깊은 것 같은데. 넌 내가 우울할 때 어떻게 해줬더라. 넌 그저 존재만으로 힘이 된 것 같은데. 나는 내게 그럴 만한 힘이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어.


강해지면 될까? 널 위로할 수 있다면 당연히 그러고 싶어. 다른 이유의 두 슬픔이 서로 연대하며 나아갈 수 있다면, 나는 그러고 싶어. 나는 네 우울을 위로하고 싶어. 어떤 말도 행위도 그러지 못하는 것 같아 슬프지만, 무슨 수를 써서든 네 우울을 덜어내고 싶어. 네 발목을 붙잡고 밑바닥으로 끌어내리는 존재가 내가 되지 않았으면 해. 요즘은 이런 기분으로 살아. 이런 말들이 또다시 네게 부담을 주게 될까. 나는 잘 모르겠어. 여전히 이기적인 우울이 내겐 자리하고 있나봐. 그래도 우리의 슬픔이 서로 잘 연대하면 좋겠어. 서로를 끌어안고 무사히 하루하루를 나아갈 아주 작은 힘이라도 될 수 있다면 좋겠어.



https://youtu.be/AW9K1hpRb-4?si=xi4YgOuNUloNxM8x​​



9와 숫자들 - 착한 거짓말들

정다운 나의 부모님과

맛있는 밥을 먹었고

다정한 내 친구들을 만나서

귀한 차를 마셨지만

안락한 내 방 안에서

유쾌한 영화를 봤고

번잡한 지하철 속에서

멋진 노래를 들었지만

어쩐지 나는 하나도

즐겁지가 않은 걸

어쩌지 내 손톱에 낀 때는

아직 그대로인데

벚꽃이 넘실대던 봄날에

함께 먹었던 김밥과

별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같이 마셔주었던 커피

난 정말 몰랐어

니가 직접 말을 안 해주어서

영원과도 같았을

너의 기다림과

참 착한 거짓말들

난 정말 몰랐어

나는 그렇게 아파보질 못해서

영원과도 같았을

너의 밤들과

참 슬픈 거짓말들

영원과도 같았을

너의 기다림과

참 착한 거짓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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