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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족이 되는 시간 Oct 18. 2021

- 누드 1 -

은빛 기억을 벗다  

위탁 엄마가 되는 여정>



아버지를 읽는다. 자욱한 담배 연기 속에서 소주병과 함께 누워있던 모습을 점자처럼 더듬는다. 술, 부재중, 무력함… 나는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유년의 어느 순간에 머물러 있다. 비틀비틀 걷다가 도랑에 빠지기도 하고, 전봇대 옆에서 잠이 들기도 했던 아버지. 아침이 되어서야 귀가하던 아버지를 보다 못해 어머니는 집 근처 공장으로 일을 나가셨다. 


나는 점점 음산하고 눅눅한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말수가 줄어들고, 내향적인 성격을 갖게 된 것도 그즈음이다.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서서히 완벽주의자가 되어갔고, 일부러 야무진 행동을 하면서 안정감과 신뢰를 얻으려고 애썼다. 


왜 시간이 지나서야 깨달았을까. 완벽주의는 스스로를 경직시킨다는 걸. 아버지에 대한 심리적 매듭은 대인관계를 얽어매고, 위장된 수치심으로 정서를 둔하게 만들었다. 나는 괜찮고 싶었다. 아니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오늘에야 중년의 딸은 용기를 낸다. 이제는 훌훌 벗어던지고 자유로워지기로. 어떻게 벗어야 하는지, 얼마나 벗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가슴 한쪽 풀린 듯 말 듯한 기억의 옷고름을 당겨볼 뿐이다. 초야를 치르는 신부의 떨림처럼. 



‘여자가’로 시작되는 아버지의 강한 억양은 어제의 일이 재연된다는 복선이었다. 안방의 재떨이가 날아가고, 액자가 깨지고, 서늘한 고함이 다시 방문을 흔들 거라는 예고였다. 쿵, 어머니의 머리가 단단한 벽에 부딪혔다. 머리칼이 벽을 훑고 맥없이 떨어졌다. 시멘트 벽보다 단단하고 차갑게 굳어진 어머니의 얼굴엔 울음도 항의도 없었다.


아버지의 어깨가 다시 들썩거렸다. 야생동물의 포효가 저것보다 무서울까. 가만히 있자, 조금만 참자, 내 머리채가 잡히지 않게… 숨을 고르며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는데 죄책감이 목젖에서 꺽꺽 새어 나왔다. 눈가가 축축해지고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재빨리 이불을 끌어당겨 입에 쑤셔 넣었다. 소리가 나지 않게 들숨을 쉬었다.  


눈을 떴을 때는 아침이었다. 어머니는 헝클어진 머리를 눌러가며 내 도시락을 싸고 계셨다. 입을 떼면 통증이 눈으로 터져 나올 것 같아서 입술을 깨물었다. 지난밤의 일은 묻지 말아야지, 곁눈질을 하며 흩어진 물건들을 치웠다.


아버지 사업이 부도난 후 나는 한국무용을 포기해야 했다. 의상비며 대회 비용을 더는 감당할 수가 없었다. 자연스럽게 학교에서 받던 두발자유의 특혜도 포기해야 했다. 큰 키에 긴 머리가 상징이었던 무용과 학생들만의 특혜를 더는 누릴 수가 없었다. 나는 머리를 단발로 잘랐다. 귀밑 3㎝. 그때가 고3이었다. 


실패감은 톱니처럼 맞물려 방황으로 이어졌다. 아버지는 여전히 비틀거리는 스텝으로 귀가했고, 안방의 소주병은 뒹굴다 깨졌다. 어머니 몸에는 푸르스름한 자국이 가시지 않았다. 나는 자폐증 환자처럼 서서히 마음을 닫아걸었다. 아버지를 저만치 밀어내고 관계의 빗장을 채웠다.


무책임한 아버지는 소설에나 등장해서 주인공을 미화시켜 주는 단역이 어울린다, 어머니의 남편에게 신경 쓰지 않겠다, 요란하게 물건을 흩어놔도 치우지 않겠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당돌하고 모진 딸은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어머니는 혼을 내지 않으셨다. 대신 갈고리 모양의 오른손 중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혼자 가계를 꾸려나가실 때 공장 프레스기에 잘린, 그 보상으로 내 마지막 의상비를 대주셨던 손가락. 


어머니는 올해로 결혼 45주년을 맞는다. 남편이 쓴 사채 때문에 아파트를 처분하고 막내아들 집으로 이사를 했다. 그런데 얼마 전에는 그 아들이 결혼을 하면서 다시 작은 빌라를 얻어 분가했다. 노인대학에 다니면서 시를 쓰고, 초등학교 앞에서 등․하교 자원봉사를 한다. 


집에 혼자 남은 남편은 국수를 삶고, 고추를 씻어 조촐한 식탁을 차린다. 베란다에 나가 화분에 물을 주고, 빗자루를 든다. 시계를 쳐다보며 아내의 귀가를 기다린다. 고희를 넘긴 노인은 이제 가사에도 익숙해졌다. 


나이가 들수록 남자가 여성화되어가는 것을 남성 속의 여성, 아니마라 한다. 융은 아니마가 미성숙한 상태에 있으면 짜증과 변덕스러운 경향을 나타낸다고 했다. 남을 공격하고 쉽게 주먹을 휘두르는 남자는 남성성이 넘치는 것이 아니라 여성성이 부족한 것이고, 불화가 잦은 부부도 대부분은 미숙한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충돌이라고 했다. 


돌아보니 아버지는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배울 기회가 없었다. 부재중인 할아버지와 생활고에 지친 할머니는 일찌감치 남의 집 일꾼으로 자라게 했다. 아버지도 꿈을 이루고 싶은 젊은 날이 있었을 텐데. 이제야 그 심정이 조금 헤아려진다. 


아버지, 하면 생각나는 것이 은단이다. 트롯을 흥얼거리며 손 박자를 맞추다가도 나를 보면 눈곱만 한 은단을 한 알씩 꺼내 주셨다. 입천장에 붙이고 혀로 살살 뭉개면 박하의 화한 맛과 쌉싸래한 맛이 입 안 가득 침을 고이게 했다. 은단은 소리 없이 녹아내렸다 아버지처럼.      


나는 은단이다      

아버지의 주머니 속       

손때 묻은 동전들과 뭉쳐져 있는     

화한 기억이다     

혀 아래 웅크리고 있다가     

서서히 녹아내린다      

짓이겨지고 문드러진다      


더듬더듬 아버지의 언어가 읽혔다. 과일 한 봉지를 들고 비틀비틀 걸어오던 걸음, 뭉개진 호빵을 감싸 안은 가슴, 잠든 얼굴에 비벼대던 거친 수염은 ‘아버지의 언어’였다. 나무로 만든 투박한 썰매와 크리스마스 날 양말 안에 들어있던 동전들. 아버지는 ‘아버지의 언어’로 또박또박 말씀하고 계셨다. 


아버지! 아버지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한 것은 저예요. 
무지하고, 쌀쌀맞았던 저를 용서해 주세요. 
냉정하고 모질었던 저를 용서해 주세요.
아버지는 저를 한 번도 떠난 적이 없는데.
이제나 저제나 살피고 계셨는데.
그걸 몰랐어요. 그걸 못 봤어요. 
아버지! 그 사랑에 감사해요.
잊지 않을게요. 영원히. 
그리고, 사랑해요.     




 2017년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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