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있어서 여행이란?
얼마 전 혼자 오사카에 다녀왔다. 이번 오사카 여행을 다녀온 후로는 인스타그램에 올릴 만한 사진이 없었다. 감성적이고 예쁜 사진은 하나도 없고 추억들 밖에 없었다. 무언가 예쁜 풍경을 봤다기보다는 친구들과 사람들과 나눈 대화가 가장 기억에 남았다.
그래서일까 이게 내가 진짜 좋아하는 여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럼 나에게 있어서의 진짜 여행은 뭘까? 1) 로컬 카페에서 카페인 걱정 없이 커피를 마시는 것, 2) 언어 공부하던 것을 테스트해보는 기회. 이 두 가지라고 생각했다. 근 2년 간은 정체된 영어에 비해 일본어 실력은 눈에 띄게 늘었기 때문에 2의 이유로 일본에 많이 가게 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여행을 가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기 때문에 남들과 똑같은 곳을 가고, 똑같은 것을 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번에는 오사카 여행을 더욱 충만하게 만들어준 사람들과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Y의 재택근무가 끝나고 우메다에서 만나기로 했다. 고베에서 오사카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 오랜만에 만난 Y는 일 때문에 오사카에 와있었다. 그래서일까 오랜만에 만나 같이 걸으면서 우메다 완전 시부야 같지 않냐고, 아니라고 신주쿠 같다면서 농담을 했다.
자기도 오사카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잘 모른다고 했지만 관광객인 나로서는 혼자 찾지도 못했을 것 같은 로컬 분위기가 가득한 오꼬노미야끼집에 데려갔다. 일본에서 일본인 친구들을 만나면 항상 오꼬노미야끼를 먹는데 이렇게까지 로컬인 식당은 처음이어서 너무 좋았다. 왠지 모르게 드라마 <하늘에서 내리는 일억 개의 별>이 생각났다. 완전 2000년대 초반 분위기였다. 그리고 사장님이 한신 타이거즈 팬이셨다.
2년 전 프랑스에서 스포츠랑 운동을 좋아한다고 했던 Y가 실제로 관련 업계에서 일을 시작한 것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 좋아하는 일을 알고 조금이라도 그것과 가까운 일을 하는 건 멋있는 것 같다. 미리 여행을 계획하고 오면 한신이랑 오릭스 야구 티켓은 구해놔 주겠다고도 했다. Y는 항상 다른 친구들이랑 같이 만났기 때문에 둘이 만나는 건 처음이었는데 재밌었다. Y랑은 프랑스에서 만나서 그런지 왠지 영어를 해야 하는 상대라는 이미지가 남아 있어서 영어로 대화하고 간간히 일본어를 썼다. 벌써 3년째 인연이라니!
여행의 둘째 날에는 고시엔 구장에 갔다가 오사카로 넘어왔다. 피곤해서 호텔에서 쉬다가 저녁에 잠깐 파르코에 가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빗줄기가 약했으면 그냥 맞았을 텐데 너무 강한 빗줄기에 눈앞에 보이는 빌딩 밑 주차장에 본능적으로 비를 피하러 들어가 버렸다.
그런데 할아버지 한 분이 계셨다. 왠지 민폐일까봐 죄송했다. 비가 그치자마자 나가려고 했는데 할아버지께서 나한테 말을 거셨고, 웬걸 못 알아들었다... 그래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니까 쉬운 일본어로 "어디까지 가요?"라고 물으셨다. 그래서 백화점이라는 말을 몰라서 "파루코..."라고 말했더니 옆으로 저벅저벅 가셔서 우산을 찾아 나에게 건네셨다.
너무 당황해서 빌려주시는 거예요?라는 말이 생각이 안 났다. 그래서 "카리루(= 빌리다)...?"라고 허접하게 말했더니 "아게루(= 주다)"라고 말하셨다. 그래서 감사하다고 한 세 번 말하고 우산을 쓰고 파르코까지 갔다. 파르코 쇼핑이 마지막 일정이었는데 너무 친절한 분을 만나 하루를 기분 좋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오사카의 따뜻한 마음!
그리고 여행의 셋째 날에는 M을 만났다. 나를 위해 운전을 하고, 신칸센을 타고 다른 현에서 와줬다는 게 감동이었다. 둘이서 만나서 노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멀리서 온 M이 이 시간을 재밌어할까? 생각했는데 M은 나와 함께 있는 시간을 무척이나 좋아해 줬다.
내가 할아버지에게 우산을 받은 이야기를 하면서 카사(= 일본어로 우산)라고 말했어야 했는데 하사미(= 일본어로 가위)라고 말했다. 호텔에서 일할 때 고객님들이 우산과 가위 두 개를 자주 빌려서 헷갈렸는데 이걸로 내가 틀렸다면서 신나게 웃기도 하고, 카페에서는 오사카가 왜 오사카인지 아냐며 내가 아재 개그를 치기도 했다. M은 이 개그를 듣더니 오사카 사람은 개그 욕심이 있다고 나 보고 오사카 사람이냐고 물었다. 그리고 일본인임에도 관광객처럼 나랑 글리코상 앞에서 사진을 찍어주었다.
친구랑 만나면 한 끼만 먹고 커피 마시고 헤어지는 편인데 카페도 두 개나 가고 점심, 저녁 다 같이 먹으면서 하루 종일 같이 놀았다.
또 M과 함께 글리치 커피에 갔는데 커피 전문점이어서 커피 향을 맡고 점원 분과 대화하며 고르는 카페였다. 향을 하나씩 맡아보라고 하시면서 하이츄 포도맛 같은 거라고 설명해주시기도 하고, 게이샤 원두 아냐고 물어보셔서 안다고 했더니 M이 뻥치지 말라 해서 이름만 들어봤다고 해명하기도 했다. 원두를 고른 후에는 에스프레소랑 핸드드립 중에 고르라길래 추천해 달라 했더니 역시 핸드드립이라 해서 핸드드립을 골랐다.
주문을 다 하고 결제를 하면서 점원 분께서 어떻게 일본어를 할 줄 아냐고, 독학이냐고 여쭤보셨다. 그래서 그냥 애니메이션으로 공부했다고 했다. 어떤 애니냐고도 여쭤보셨는데 '다이아몬드 에이스'라고 했더니 히로아카가 나올 줄 알았다고 하셨다. 아무래도 외국인들한테 인기 있는 애니니까 그런 것 같다. 메이저는 안 봤냐고 여쭤보셔서 다이에이랑 하이큐만 봤다고 했다. 그래서 이번 오사카 여행도 고시엔 때문에 온 거라고 했더니 다들 놀라셨다. 그냥 그 상황이 너무 재밌고 웃겼다. (그런데 사실 저는 일본어를 드라마로 배웠어요 ^__^ 다이에이x고시엔 콜라보 굿즈 사고 오는 길이라 다이에이가 튀어나왔다.)
마지막에는 간사이 공항에서 혼자 수속 열리길 기다리는데 공항 설문조사 하시는 분이 다가오셨다. 도쿄에서도 공항에서 잠시 혼자 있을 때 당해본지라 경계하진 않았다. 일본어 가능하냐고 물어보셔서 조금 가능하다고 했더니 한국인들은 모두 일본어를 할 줄 안다고 하셔서, 아니라고 한국 호텔에서 일할 때도 일본인들 중에 한국어 잘하는 분 많다고 말씀드렸다.
일본에서 여행을 어떻게 했는지 묻는 설문이어서 설문을 하면서 스몰톡을 했다. 여행의 주목적은 고시엔 100년 때문이라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일본 야구를 좋아하냐고 여쭤보셔서 한국 야구를 좋아하지만 일본 야구 역사가 길고 관심이 있어서 온 점, 서울 시리즈에서 오타니를 본 경험 등을 이야기 나누었다. 오타니 상이 진짜 키가 크냐고 여쭤보시기도 했다. 마지막엔 엽서도 주셨다.
나는 일상을 벗어나 도착한 곳에서 누군가와 새롭게 대화할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언어 공부를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점에서 너무 뿌듯했다. 친구들을 만나서 안부를 묻고, 마주치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상호작용할 수 있다는 점도 좋다. 더불어 모자는 전부 가격이 동일한지, 이 제품은 지금 따로 없는지, 스타디움 투어를 하며 스태프 분께 사진을 찍어주실 수 있는지 물어볼 때 관광객으로서 어렵거나 헷갈리는 순간에도 바로바로 도움을 구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나에게 여행은 평소에 못 마시던 커피를 두 잔 마시는 것, 평소에 쓰지 않는 언어로 대화하는 것이다. 앞으로도 내가 좋아하는 방식의 여행을 하며 평생을 살아갈 추억을 차곡차곡 쌓고 싶다고 다짐한다. 다음 여행을 가기 전까진 오사카 여행의 추억으로 버텨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