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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예또 Apr 09. 2024

나 오늘 헤어졌어. 아, 위로는 안 해줘도 돼.

[순간예또] 다섯 번째 편지. '믿음'에 대한 이야기.

예하!

요즘 날씨 진짜 좋지 않아? 벌써 봄기운이 완연한 기분이야.

시골엔 봄이 오면 지천에 봄나물들이 자라나.

그러면 냉이를 캐다가 냉이 된장국을 끓여 먹어야지.

그래도 남은 건 된장 넣고 무쳐도 먹고, 부침가루 묻혀 부침개도 만들고.

이런 소소한 채집활동을 좋아하는 나는 생명이 움트는 계절이 오는 게 벌써 너무 설레.     


사실 밝은 척해보려고 노력했지만 오늘은 편지 쓰기가 정말 너무 싫은 날이야.

개인적으로 안 좋은 일이 있었거든.

한국에 돌아와 양양에서 집순이로 3주가량을 지내다가 지난 주말에 지인들과 약속을 몰아서 잡고 서울로 출장약속을 다녀왔어.

오랜만에, 혹은 처음으로 사석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로 인해 얻은 활력과 응원들로 다시 재충전하는 기분 좋은 시간이었어.

마지막날인 오늘만 빼면 말이야.      


아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에겐 반년 넘게 만난 남자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는 서울에서 살고 있어서 우린 어찌 됐건 장거리인 연애였어.

약 반년 정도 되는 기간 동안 세 달은 내가 해외였으니, 국제 장거리이기도 했고.

나야 남자를 적게 만나본 게 아니니 이제 연애에 대한 환상도 없고 누군가에게 의지를 잘하는 성격도 아닌지라 연애로부터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사람인데,

그 친구는 나보다 나이도 훨씬 어리고 연애 경험도 적었으니 아무래도 장거리 연애를 하는 게 꽤나 힘든 일이었을 거라고 생각해.

물론 우리가 그 문제로 오늘 이 사달이 난 건 아니었지만.      



나는 내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데,

가끔은 어디까지 솔직하게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기분이 들어.

타인으로부터의 평가와 판단에 아주 자유로울만큼 내가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넘치는 사람인지 생각이 그때그때 자꾸 바뀌거든.

내가 발가벗은 온전한 나로서의 모습을 보여줬을 때 따뜻하게 보듬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과연 나는 대다수의 사람들로부터 지지와 응원을 얻을 만큼 올바르고 선한 사람인가.

그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게 쉽지가 않아서 솔직해진다는 게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인 거겠지.      


그래서 내가 그와 다툰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사실 내 마음은 이미 정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말해도 좋을지,

우리가 무엇 때문에 아무 일 없어 보였던 관계에 균열이 생기게 된 건지,

사실 그전부터 나는 우리 관계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지.

마음 같아선 허심탄회하게 다 훌훌 털어놓고 싶은데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다 보니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어쨌든 나는 그가 자고 있는 동안 그의 핸드폰을 보는 떳떳하지 못한 행동을 했고,

결국 그의 떳떳하지 못했던 행동에 대한 흔적을 발견해 버렸던 거야.

겉으로 티 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표정을 숨길 수 없었던 터라 그의 추궁에 난 그 사실을 밝힐 수밖에 없었고,

오해라면서 내가 이해할 수 있게끔 차분히 설명하는 게 아닌 방귀 뀐 놈이 성내듯이 목소리를 키우며 흥분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나는 마음의 결정이 더 단호해질 수밖에 없었어.

여태껏 믿었던 사람의 모습이 한순간 뒤집히고 나니 지난 기억 속 그의 고유한 특징들이 이젠 다 단서처럼 보이더라.

양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나는 끊임없이 허탈하고 또 허탈했어.      


그래서 오늘 안에 편지를 마무리 지어서 보내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글쓰기에 빠르게 착수할 수가 없었어.

이미 그와는 어느 정도 미온적인 관계라 크게 내 기분에 영향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닥치고 보니 믿었던 사람에 대한 배신감 같은 게 생각보다 크게 느껴졌던 것 같아.

내가 여태껏 알고 지내왔던 사람은 도대체 누구였을까.

내 앞에서 보였던 그런 모습들은 어디까지가 진심이었을까.

아니면,

내가 많이 유난인 걸까.      


사랑하며 살아가는 이 세상의 사람들은 서로를 얼마나 믿고 있을까?

이런 배신과 허탈의 역사로 이루어진 나의 지난날들을 극복하고 나는 다시 사람을 믿을 수 있게 될까?

다시 아무런 의심 없이 누군가와 새로운 역사를 기꺼이 쓰겠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나는 누군가에게 믿을만한 사람이었을까?      



가끔은 사랑이란 감정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위대하게 느껴지곤 해.

어떻게 이기적으로 태어난 각 개체가 서로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희생하고 감내하며 애를 쓸 수 있을까.

그런 게 진정한 사랑의 감정이라면,

어쩌면 나는 단 한 번도 진정한 사랑을 해본 적이 없는 게 아닐까.

사실 나도 누군가에게 진정한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이 부족한 사람이지 않을까.      


누군가는 말했지.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유죄’라고.

맞아. 사랑 없인 세상이 돌아갈 수 없고 인류가 존재할 수 없고 삶의 모든 게 의미가 없을 테니까.

사랑이란 중요하고 고귀한 개념임이 분명한데,

그런데 왜 사랑이란 감정이 요동치고 나면 배신이라는 무시무시한 녀석만 남아버리는 걸까.

마치 사랑에 마음을 쏟은 자를 벌주려는 듯이.      


내가 지금 마음이 아픈 이유는 그를 한 치 의심 없이 너무 순진하게 믿은 내가 애석해서 그렇겠지.

그의 변한 태도를 이해하면서 좋게 넘어가려고 노력했던 내가 안쓰러워서 그렇겠지.

그의 우는 모습에 마음 약해져서 그를 떠나지 못하고 남았던 게 결국 아무 소용없는 일이었다는 걸 깨달아서 그렇겠지.

또는,

내가 누군가의 순수한 사랑을 받을 만큼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기 때문이겠지.      


애초에 내가 바랐던 건 누구든지 나를 절대적으로 좋아해 줄 사람이었을지도.

사실 그게 누가 됐든 내겐 큰 상관이 없었던 걸지도.

그 또한 그가 했던 사랑의 대상이 내가 아닌 ‘누군가에게 열렬한 구애를 하는 그의 모습'인 나르시시스트였던 걸지도.

어쩌면,

모든 게 내 착각 속에서 시작된 것일지도.      



아픈 날도 지나고 나면 추억이 되겠지.

힘든 시간도 돌이켜보면 좋은 교훈이 되는 것처럼.

반복되는 바보 같은 선택 속에 나는 계속 고통받을 수도 있겠지.

어쨌든,

이 시간도 지나고 나면 괜찮아지겠지.      



나는 낼모레 수요일에 태국으로 출국해.

다합에서 만났던 언니, 오빠들이랑 같이 만나기로 했거든.

그땐 다시 웃을 날이 많아질 거야.

그때 많이 웃으려고 지금 입꼬리 내려가는 일들이 생기나 봐.

그냥 그렇게 생각하려고.      

무언가를 쓰고 싶지 않은 기분에 쓴 글이라 읽기도 거북했겠다. 미안해.


점점 더 읽는 사람이 줄어드는,

목적지가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이 편지를 쓰는 게 의미가 있을까 싶긴 한데.

뭐라도 되려면 뭐라도 계속해야 할 거 같아서.

재미없고 지루해도 나는 계속 이 편지를 써야 할 것 같아.

아무도 강요하지 않은 사명감을 홀로 떠안은 채 말이야.     

다음 편지는 태국에서 밝아진 모습으로 좋은 소식과 함께 돌아올 수 있게 노력해 볼게.

잘 지내고 또 만나. 안녕.                                         





순간예또; 매월 9일, 19일, 29일 세 통의 편지를 메일로 보내드립니다. 
아주 솔직한 근황 이야기와 더불어 꿈과 커리어, 연애와 사랑, 그리고 대인관계에 대한 이야기들을 적어요. 
글로 먹고사는 미래를 꿈꾸며 새롭게 시작하는 야심찬 프로젝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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