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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날이 Aug 28. 2022

에세이 영화와 인식적 지도 그리기

자본주의의 재현불가능성과 새로운 미학적 탈출구: <자본의 자리>

1. 인식적 지도 그리기의 미학


프레드릭 제임슨은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시대구분을 통해 각각의 시대의 미학을 역사화하는 동시에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각각의 시대의 토대가 되는 경제구조를 이야기한 바 있다. 후에 제임슨은 "Revisiting Postmodernism: An Interview with Fredric Jameson"에서 예술적 스타일이라는 협소한 의미에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은 끝났을지라도 역사적 시기로서의 포스트모더니티는 여전히 진행 중임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를 바탕으로 동시대의 시대적 변화를 감지하고 있는 글이 바로 [단독성의 미학](박진철 역)이다. 그는 [단독성의 미학]에서 미학적 스타일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가 아닌 "하나의 역사적 시기, 즉 경제학에서 정치학까지, 예술에서 테크놀로지까지, 일상행활에서 국제 관계까지 모든 종료의 것들이 영구적으로 변화된 시기"라는 의미에서 모더니티와 포스트모더니티라는 용어를 통해 동시대를 해석해낸다. 이 역사적 시기를 특징지을 수 있는 가장 좋은 표현은 제임슨이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자본주의의 문화논리]]에서 이야기한 "의미사슬의 와해"이다. "의미사슬의 와해"란 자크 라캉이 개념화한 "정신분열증"을 빌려와 기표에서 기표로 이동하는 운동을 통해 만들어지는 의미의 완전한 와해로 이야기될 수 있다.


"의미는 기표에서 기표로 이동하는 운동을 통해 생성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기의라고 부르는 것, 즉 발화의 의미나 개념적인 내용에 해당하는 것은 이제 일종의 의미-효과라고 할 수 있으며, 이는 기표들 간의 관계에 의해 생성되고 투사된 의미화의 객관적 신기루에 불과하다. 기표 간의 관계가 와해된다면, 의미사슬의 고리들이 끊어진다면, 우리는 따로따로 떨어진 채 상호 연관성을 상실한 기표들의 조각의 형식 속에서 정신분열증을 만나게 된다. (...) 따라서 의미 사슬이 와해된다면, 정신분열증 환자는 순수한 물질적 기표만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상호 연관성이 없는 일련의 순수 현재들만을 경험하는 것이다."([[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자본주의의 문화논리]], 82페이지)


이렇듯 순수한 물질로서의 기표들만이 부유하고 있는 역사적 단계가 바로 포스트모더니티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기표들의 부유 속에서 우리는 더 이상 "부정성, 대립, 전복과 같은 슬로건부터 비판과 반성"과 같은 개념들을 이야기할 수 없게 되었다.(같은 책, 118페이지) 그러나 제임슨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포기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는 하나의 실천적 방법론을 제시하는데, 그것이 바로 "인식적 지도 그리기"이다. 제임슨은 케빈 린치의 도시 공간에 대한 분석과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분석을 적절히 갖고와 "인식적 지도 그리기"라는 이론적 실천을 고안해냈다. 제임슨에 따르면, 인식적 지도 그리기는 "전체로서의 사회구조의 총화라고 할 수 있는 광대하고 본질적으로 재현 불가능한 총체성에 대해, 개인 주체가 상황에 따른 재현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같은 책, 124페이지) 다시 말해서, 인식적 지도 그리기는 기표들 사이의 관계가 와해되어 버려 '기표'라는 물질성만 남은 포스트모더니티에서 주체의 구체적 경험과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총체성 사이의 접합을 위한 새로운 시도이다.


리얼리즘은 당대의 이러한 시도 중 가장 효과적인 미학적 실천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리얼리즘의 시대는 이미 막을 내린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제임슨의 작업은 80년대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리얼리즘에 대한 새로운 시도를 탐구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제임슨은 인식적 지도 그리기가 단순히 미메시스와 같은 것이 아님을 확실히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새로운 리얼리즘적 시도를 되찾기 위해 노력해야한다. 제임슨은 이를 위해 제3세계와 SF 문학에서 새로운 시도들을 찾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영화에서 이러한 시도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2. 미학적 탈출구로서의 에세이 영화


영화는 루미에르 형제와 조르주 멜리에스 이래로 언제나 현실과 가상 사이의 그 어딘가에서 어떻게 정박해야하는가에 대한 물음에 대한 답을 재정의하는 과정에서 발전해왔다. 현실과 가상이라는 대립항은 많은 비평가들과 이론가들을 통해 한 쪽의 편으로 기울기도 혹은 역사적 단계에 따라 어느 한 쪽이 지배적인 상황을 맞이하기도 했다. 창과 거울이라는 오랜 비유는 이를 상징하는 하나의 예이기도 하다. 토마스 엘세서는 이러한 발전단계를 자신의 책 [[영화 이론: 영화는 육체와 어떤 관계인가]]에서 창과 거울이라는 비유와 육체와의 관계를 통해 재정리하기도 한다. 그는 대표적으로 앙드레 바쟁과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를 중심으로 하는 비평가들은 영화와 현실 사이의 관계를 통해 리얼리즘을 이야기한 반면 영화이론이 구조주의와 정신분석학을 받아들인 이후, 영화는 하나의 가상으로서 이야기되며 이미지로 만들어내는 거울과 같은 기능으로 분석되고는 했음을 밝힌다. 이처럼 영화에서 현실과 가상이라는 두 대립항은 끝없이 발전하며 영화사를 써왔으며, 다니엘 모건이 "The Afterlife of Superimposition"에서 루미에르와 멜리에스의 대립이 낳은 두 전통이 "다큐멘터리와 환상"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다큐멘터리와 픽션이라는 영화의 두 전통으로 발전했다.(p.127)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은 이러한 전통에서 가장 변증법적으로 현실과 가상의 관계를 통해 자본주의를 포착하려 했던 감독이다. 그는 [[<자본>에 대한 노트]]에서 영화가 증권거래소를 보여줄때 단순히 증권거래소를 보여주는 것보다는 다른 방식으로 재현될 필요성이 있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주식거래소는 단지 "주식거래소"로서가 아니라(<마부제 박사> <상트페테부르크의 종말>) 수천 개의 "작은 디테일"을 통해 제시된다."([[<자본>에 대한 노트]], 35페이지) 즉, 에이젠슈테인은 변증법적 몽타주가 수천 개의 디테일을 하나의 이미지로 만들어낼 재현적 수단이며 이것이 자본을 재현하기 위한 가장 적합합 미학적 방법론으로 여겼다.(Sven Lutticken, "Filming Capital", p.239) 데이비드 하비는 [[자본주의와 경제적 이성의 광기]]에서 칼 마르크스의 업적을 "자본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평생 동안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평가한다.(7페이지) 이처럼 마르크스의 [[자본]]은 포착하기 어려운 자본주의에 대한 하나의 지도이다. 에이젠슈테인의 미완성된 마르크스의 [[자본]]에 대한 영화화는 단훈한 다큐멘터리적 이미지도 픽션도 아닌 모종의 새로운 재현 방식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는 단순히 변증법적 몽타주를 통한 새로운 미학적 실천일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의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을 잇는 자본주의를 재현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https://www.theforgottenspace.net/static/directors.html

노엘 버치는 에이젠슈테인의 방법론에 대한 대답으로 "에세이 영화"라는 개념을 정립화했다. 토마스 엘세서는 에세이 영화가 다큐멘터리에 비해 증거적 권위를 약하게, 그리고 사변적으로 만들기 때문에 다큐멘터리보다 더욱 주관적이기도 하다는 점을 주목한다. 또한 에세이 영화는 플롯을 주제로 대체한다는 점에서 서사 영화와도 구별점을 보인다.(“The Essay Film: From Film Festival Favorite to Flexible Commodity Form?”, p.241) 버치는 2010년 <잊혀진 공간>(2010)에 대한 노트에서 "에세이 영화"를 개념화한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전통적인 의미에서 이른바 현실을 객관적으로 제시하는 '다큐멘터리'에 대응해서 에세이 영화를 설정했다. 플레허티, 그리어슨 그리고 GPO가 나의 대상들이었다."(http://www.theforgottenspace.net/static/notes.html) 즉, 버치는 전통적인 다큐멘터리들이 현실을 객관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환상으로부터 벗어나 현실과 가상의 새로운 관계를 통한 재현을 "에세이 영화"로 정의하고자 했다. 버치는 이것이 할리우드 영화들이나 표준적인 다큐멘터리의 선형성과는 다른 "복잡한 형식, 구조화된 애매모호함을 고안하는" 것과 연관된다고 말한다.(http://www.theforgottenspace.net/static/notes.html) 이처럼 버치는 도저히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세계화 자본주의를 보여줄 수 있는 방법으로 "에세이 영화"를 이야기한다. 그렇기에 버치의 "에세이 영화"는 에이젠슈테인의 변증법적 몽타주가 만들어낸 새로운 미학적 탈출구의 전통에 위치한다.


노엘 버치와 앨런 세큘러의 <잊혀진 공간> 컨테이너 박스라는 사물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세계화자본주의를 포착하려 한다. 버치와 세큘러는 -선형적 구조를 통해 바다  노동자들, 고속철도로 인해 삶이 파괴된 마을 사람들부터 도로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까지 수많은 이미지들의 파편을 통해 하나의 지도를 그려낸다. 그러나 대부분의 에세이 영화들은 단순히 서사로부터의 탈출, 재현으로부터의 탈출, 개념으로부터의 탈출만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에세이 영화는 해체주의적 형식을 갖고 있는 것을 넘어서 해체주의  자체를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더구나 자본주의는 이러한 파편성들을 모조리 포섭하여 하나의 자율적으로 보이는 상품을 만들어낸다. 비트코인과 같은 암호화폐의 등장이나 인스타그램, 틱톡과 같은 SNS의 등장은 이를 더욱 가속화하여 이미지는 더 이상 저항적 가치를 지니지 못한 것처럼 보이기 만든다. 그럼에도 우리가 에세이 영화들 속에서 인식적 지도 그리기의 미학을 찾아야 하는 이유는 이러한 파편화는 포스크모더니티의 필연적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포스트모더니티를 단순히 거부할 수도 긍정할 수도 없으며, 자기완결적으로 보이는 포스트모더니티의 논리 속에서 모순을 찾아야 하는 것이 자신의 목표임을 밝힌 바 있다. 이처럼 도무지 해석이 불가능해 보이는 파편들 속에서, 즉 에세이 영화에서 우리는 지도를 찾아야한다.



3. 재커리 폼왈트의 <자본의 자리>


재커리 폼왈트는 주로 한 시간이 안되는 러닝타임의 영상작업들을 만드는 2010년대 이후로 주목받고 있는 영상제작자이다. 폼왈트는 히토 슈타이얼과 함께 가장 자본주의에 관심을 보이는 작가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폼왈트가 이미지의 파편들을 통해 만들어내는 성좌는 단순히 자본주의를 이야기하고 있거나 자본을 재현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폼왈트를 주목해야할 이유는 폼왈트는 인식적 지도 그리기의 핵심을 꿰뚫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자본의 자리>에서 폼왈트는 자신이 받은 e메일을 읽어가며 영화를 시작한다. 메일을 보낸 C.J는 폼왈트에게 재커리가 만드려는 다큐멘터리는 차트, 그래프, 그리고 화폐의 움직임을 보여줄 수 있는 다양한 컴퓨터 그래픽들이 필요할 것이라고 조언한다. 확실히 이러한 방법들은 대표적으로 자본주의의 작동방식을 설명하는데 가장 효율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마이클 무어는 <자본주의: 러브 스토리>가 사용하는 그래프들은 대표적으로 다큐멘터리에서 화폐의 흐름을 보여주는 방식이다. 애덤 맥케이의 <빅쇼트>에서 사용되는 수많은 컴퓨터 그래픽들 역시도 대표적으로 영화가 자본주의를 보여주는 방식이다. 


그러나 폼왈트는 정확히 그와 반대로 자본주의를 재현한다. 폼왈트의 작품들은 폼왈트의 내레이션을 중심으로 진행되면서, 이미지 자체의 불완전함을 꼬집는다. <자본의 자리>에서 영국 왕립 증권거래소를 촬영한 초기 사진에 대한 분석은 초기사진술의 움직임을 포착하는데에서 나오는 어려움으로 인해 얼룩으로만 남아 있는 움직이는 행인들과 인간이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자본의 운동 사이의 상동성으로 이어진다. 초기사진술과는 다르게 디지털 이미지는 움직이는 행인들의 작은 움직임뿐만 아니라 멀리 떨어져 있는 영국 왕립 증권거래소의 세세한 무늬까지 포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의 이미지의 선명성과는 달리 디지털 시대의 자본주의는 파생상품의 등장과 암호화폐의 출현으로 인해 마르크스가 주장했던 추상의 지배가 더욱 강화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디지털 이미지는 선명도에 집착하며 선명도를 발전시키는 방면으로 기술발전을 해오고 있다. 동시에 자본주의는 이러한 이미지의 실패로만 재현가능하다. 폼왈트는 마르크스가 "결핍된 것이 자본 관계의 표현이라고 봤다"는 점을 주목한다.(11:27~11:29) 


폼왈트는 자본의 운동을 포착하는 것이 이미지로는 실패할 수 밖에 없음을 정확히 알고 있음에도 꾸준히 그것을 시도할 필요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시도는 리얼리즘을 향한 충동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런 그의 충동은 마치 에세이를 읽는 듯한 그의 내레이션과 다큐멘터리 같은 이미지 사이의 불협화음을 통해 또 다른 미학적 시도로서 발현된다. 에세이 영화가 바로 그것이다. 주관적이며 임의적이며, 비선형적인 그의 내레이션과 함께 가장 영화적인cinematic 다큐멘터리 이미지들은 인식적 지도를 위한 새로운 형식의 미학적 탈출구가 되어준다. 이는 그의 다음 작품들인 <언서포티드 트랜짓>(2011)이나 <아크에 비추어>(2013)와 같은 작품들에서도 같은 형식으로 진행된다. 이미지 자체의 모순, 이미지는 어떤 것도 완전하게 대표할 수 없는 동시에 대표하고 있다는 것은 재커리가 자본주의의 형식을 그려내기 위해 끝까지 발 딛고 있는 토대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폼왈트의 작업을 단순히 파편적이라는 차원에서 거부하거나 비판할 수 없다. 적어도 그는 그 파편화에 침식당하지 않고, 자신만의 성좌를 만들어낸다. 이슬기는 Towards a Political Aesthetics of Cinema: The Outside of Film에서 제임슨의 시도가 언제나 실패를 전제하고 있음을 이야기한 바 있다. 폼왈트의 작업들은 실패이다, 그러나 그의 실패는 여전히 가치있고, "신실하다."(부산현대미술관에서 재커리 폼왈트와 잭슨 홍의 전시의 이름이 <신실한 실패: 재현 불가능한 재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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