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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zero May 12. 2023

네덜란드의 직장문화 - 회의 편

이렇게 마음껏 의견을 표출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

승진을 하면서 함께 맡게 된 프로젝트가 늘었다. 전에는 단순업무가 주를 이루었다면 이제는 말 그대로 머리를 써서 창의성을 발휘해야 하는 업무도 맡게 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프로젝트라는 타이틀답게 회계, 마케팅, 세일즈 각 분야에서의 팀원들이 모여 본인 분야 관련의 정보를 인풋 하고자 하는 것이 목적으로 결성되어 작년 말부터 협업을 시작하였다.


어떠한 프로젝트인지는 회사 규정상 세세히 말하진 못하지만, 각자의 업무시간을 쪼개서 한 달에 한번 정도 모여 열심히 머리를 맞대어 회사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수 있도록 구상을 하고 있다. 이 그룹의 구성원은 나 (세일즈 및 마케팅), 회계팀 주임 N, 회계 및 재무 과장 H, Business controller (한국어로는 어떻게 말하는지 모르겠다) P, 그리고 인턴 M 총 다섯 명이다.


지난주에 매달 갖는 팔로우업 미팅을 위해 H과장님 사무실로 삼삼오오 모이게 되었다. 유일하게 흡연자인 H과장님은 거의 매일 연속적인 미팅에 시달려 미팅 사이사이 쉬는 시간마다 흡연을 위해 외출을 하시곤 하는데, 이날도 역시나 그의 사무실은 비어있었다. 빠릿빠릿한 한국인답게 나는 이미 5분 먼저 도착했기에 테이블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회의 자료를 정리 중이었는데, 갑자기 왁! 하고 누군가 나를 뒤에서 놀라게 했다.


H과장님인가 싶어서 욕이 나올뻔한 것을 간신히 참고 천천히 돌아보니 평소 친하게 지내는 N주임. 과장님일까 봐 참았던 욕이 나도 모르게 다시 튀어나왔다. 우리는 그래도 좋다고 깔깔 웃으며 자리에 앉아 시시콜콜한 수다를 떨기 시작했고 그러다 보니 한 명 두 명 더 도착한 뒤 드디어 회의가 시작되었다.


회의의 주도자는 회계팀 주임인 N, 고학력의 백그라운드로 똘똘하고 야무지게 일을 잘하는 그 답게 역시 회의도 야무지게 준비해 온다. H과장님은 우리가 열심히 N의 회의 주도에 맞춰 의견을 내는 동안 등받이 의자에 기대앉아 우리를 흐뭇(?)하게 바라보신다.


그러다 회의의 열기가 점점 달아올라 회의라기보다는 토론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너도나도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과 함께 열심히 피력했다. 앞서 언급했듯 회사 규정상 구구절절 설명할 순 없지만 대략 분위기는 이러했다.


P: 하지만 그 방안을 선택했을 시에 감안해야하는 지출도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나: 물론이죠, 그렇지만 단기적인 지출 상승의 이유로 장기로 보이는 긍정적인 효과를 무시할 수도 없죠.

N: 그렇다면 그 지출이 얼마나 지속될 것인지, 또 계속 반복적으로 지출될 것인지도 생각해야 해요. 그럼 장기적인 지출인지, 얼마나 장기가 되는지도 알 수 있겠죠.

M: 경쟁사들은 어떻게 이 방안을 비슷하게 채택했는지 벤치마킹 해보는 건 어떨까요?


회계 재무팀인 P와 N의 논리 정연한 수학적 사고에 맞서 세일즈 마케팅에 특화된 나는 시장에서 얻을 수 있는 경쟁력에 대해 열심히 의견을 냈다. 인턴인 M은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며 본인 나름 대로의 주장을 펼쳤다.그러던 와중 흐뭇하게 웃던 H과장이 갑자기 한마디 얹으신다.


"나는 이렇게 열변을 토하는 식의 회의가 너무 좋아. 이렇게 하다 보면 자신의 의견을 뒷받침할 주장과 배경을 다시 한번 검열하게 되고 그러면서 점점 더 비판적인 사고를 하게 되는 거지. 비판적인 사고로부터 위험요소와 그 위험요소를 어떻게 다루면 될지도 저절로 다 창의적으로 해결이 되니까. 그렇지?"


해맑지만 옅은 미소가 띠어진 그의 얼굴을 보니 머리가 띵 해지며 깨달음을 얻었다.


나, 창의적 그리고 비판적 사고를 이렇게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


나는 나 스스로가 줄곧 창의력이라고는 1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전형적인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의 한국의 주입식 교육을 받고 자라며 학창시절 '토론'시간에도 너무 고집이 세다며 질책을 받았고 웅변대회에 참가했을 때도 웅변 학원 선생님이 써줬던 대본을 열심히 외웠던 기억이 있으니 왜 내가 스스로를 그렇게 여기곤 했는지에 대한 이유는 설명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 외에 미술시간이나 음악시간에도 무언가 정해져 있는 대상을 그리거나 따라 부르는 것에 그쳤고 그마저도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이러한 예체능 시간들은 자습이라는 이름으로 대체되었으니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을 제외하고는 정말 창의성 혹은 비판적 사고를 기를만한 환경에 노출된 적이 없던 것 같다. 적다 보니 의문이 든다. 창의적 사고가 비판적 사고와 관련이 있다는 H과장님의 말, 정말일?




김영정이 서술한 한국 인지과학회 논문지 제13권 제4호에 따르면 창의성에는 전통적으로 세 가지의 정의가 있다고 한다 (2002).


1. 발산적 의미의 창의성: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창의성과 가장 관련이 높다고 보면 된다. 다양하고 독특할수록 창의적이라고 보인다. 엄청나게 신선한 스타일을 활용한 그림을 그린다던가 작곡이 그 예시이다. 

2. 광의의 창의성: 새롭고 유용한 어떤 것을 생산해 내는 정신과정으로 그냥 새로운것에 더해져서 유용성까지 갖는것이 특징이다.

3. 과정으로서의 창의성: 기존의 정보들을 특정한 요구조건에 맞도록 새롭게 변형하거나 조합하는 과정.


저자는 과학의 맥락에서 창의성의 핵심은 비판적 사고 능력에 있으며, 발산적 의미의 창의성이 아닌 광의나 과정으로서의 창의성은 모두 비판적 개념 속에 포섭된다고 한다. 그러니 내가 느낀 창의력에서 비롯되는 기존의 정보들을 취합하고 (우리 프로젝트 팀에서 본인의 분야 관련하여 의견을 내는 것) 변형하여 (다른 사람의 분야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 새로운 해결책등을 도출해 내는 과정이 곧 비판적 사고의 일환인 것이다.


이에 더해져 브런치에는 번역하여 쓰느라 존대어로 썼지만 존대어가 없는 영어 특성상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자유로운 분위기, 그리고 그 상하관계의 부재 덕에 쌓을 수 있던 허물없는 관계가 어우러져 나는 이제는 이 회의시간이 기다려지기까지 한다. 이러한 깨달음은 내게 개인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가져와 회의 준비를 나도 알차게 해가기도 하고 다른 팀원들의 의견에도 귀 기울여 들을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도록 해주었다. 


이 날도 회의를 끝마치고 집으로 운전하여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내가 이렇게 날개를 펼칠수 있다는 것에 문득 감사함이 느껴졌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반복적인 업무만을 하는 것에 권태를 느끼던 그 감정들이 모두 다 이해가 되는 듯하기도 했다. 치열하게 의견을 내는 것이 고집이 세다고 여겨지지 않고, 목소리를 내어도 괄괄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곳에서 느낄 수 있는 안전함과 편안함이 내게 필요한 것임을, 그리고 나도 창의적인 사람임을 알게 되는 경험에 감사했다.


네덜란드 삶이 지치고 힘들어도 종종 이렇게 힘이 되는 사건들을 겪으며 더 성장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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