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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zero May 22. 2023

네덜란드의 직장문화 - 직속상사와의 관계 편

이렇게 편해도 되는 건가...?

네덜란드에서 유학할 때에는 잘 느끼지 못했던, 어쩌면 진국처럼 느껴지는 네덜란드의 또 다른 면들을 최근에 점점 더 많이 느끼고 있다. 다른 나라에서도 해외 살이를 해보긴 했지만 이렇게 본격적으로 꽤나 큰 중견기업에 정규직으로 근무하며 승진까지 하게 된 것은 처음이라 나름 해외 살이 베테랑이라고 자부하며 살았음에도 매일매일 배움을 느낀다. 사실 개인적으로 이러한 배움을 통해 성장하는 것에 거의 짜릿함(?)에 가까운 행복함을 느끼기 때문에 아주 만족스럽긴 하다.


내가 근무하는 팀은 크게는 세일즈(영업)와 마케팅, 그것을 더 세분화하면 내가 담당하는 부서는 수출팀이다. 수출팀이다 보니 나를 포함해서 다른 중국인 세명의 동료가 있고 나머지는 다 네덜란드인들이지만 전의 포스팅에도 몇 번 언급했듯이 네덜란드 동료들은 모두 영어가 유창하다. 문제는 중국인 동료 중 한 명인데, 일은 잘하지만 영어 말하기가 유창하지 않아 종종 난감하고 곤란할 때가 있다. 그녀는 열심히 설명을 하는데 발음 탓에 상당히 집중해서 들어야 하고 그것마저도 실패하면 그냥 이메일로 보내달라고 부탁한다. 차라리 서면으로 쓰여 있으면 더 이해가 쉽기 때문이다. 그녀의 서툰 영어발음탓에 생긴 해프닝같은 일화는 다음에 포스팅해보려고 한다. 너무 일화가 많아서..


아무튼 우리 부서는 우리 팀 과장님이자 나의 직속 상사인 P의 주도 하에 격주회의를 진행한다. 말만 회의지 사실은 현재 영업의 흐름과 어떻게 서로 도울 수 있는지, 서류나 문서작업의 현황 보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부분인 현재 각각 개인이 겪고 있는 업무적 어려움을 공유하며 함께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이 목적인 팀빌딩 시간이다. 한데 이 회의는 종종 삼천포로 수다타임으로 빠져 30분으로 예정되어 있던 것이 한 시간 혹은 한 시간 반까지 지속되기도 한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매주 40시간 매일같이 얼굴을 보는 사이이니 동료들 사이에서도 막역한 관계가 되기에 업무적 어려움뿐만 아니라 사적인 얘기도 나누기도 하거나 - 거창한 건 아니고, 그냥 지난번에 어디에서 저녁식사 했는데 괜찮더라, 정도 - 서로 농담을 주고받고 장난치고 하다 보니 시간이 금세 흐른다. 


아무튼 이번주도 이 회의를 하기 위해 모인 우리 팀은 여느 날과 같이 우당탕탕 복작복작 수다를 떨며 회의를 진행했다. P는 팀의 우두머리이긴 하지만 외근이 잦은 탓 회의 준비가 어려워 바로 밑의 직함인 Q가 회의의 체어맨을 맡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장난기 가득한 P가 발동을 건다.


P: 휴가 계획 냈던데~ 지난주에 포르투갈 다녀오지 않았나? 이렇게 설렁설렁 다녀도 되는 거야?

나: 아휴 당연하죠. 휴가 다 짜내서 여름시즌 다가오기 전에 쓰려고 작정했죠. 사무실 출근날을 어떻게든 최소화해 보려고요. P부장님이 그러셨잖아요, 일은 사무실에서 하는 게 아니라고.

P: 하하하 맞아 내가 좀 그렇지. 근데 나랑 휴가 일수가 차이 나는 것 아냐? 다시 계약서 좀 봐야겠어

나: 무슨 말씀이세요~ 다 P부장님께 배운 거죠. 언제나 바빠 보이게끔 만 하면 된다고 하셨잖아요, 그렇죠?


마치 만담 듀오처럼 서로 아무렇지 않게 농담을 주고받는 우리의 대화에 회의실 분위기가 좋아졌다. 사실 부장이긴 하지만 아직 30대 후반의 젊은 나이의 P와 나는 꽤 막역한 사이이다. 처음 인턴십을 할 때에도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나의 사수가 되어주었고 졸업 후에도 내게 일자리를 제공한 사람이다. 그 이후 작년에는 함께 한국으로 출장을 다녀오며 일주일 내내 붙어 다니다 보니 부쩍 친해졌다. 한국 출장 당시 마음속에 담아뒀던 이야기도 나누기도 하고 고민상담도 하고.. 그때부터 나는 그를 나의 멘토로 여기기 시작한 것 같다. 그 이후로도 몇 달 전 두바이로 출장을 다녀오며 우리의 관계는 더 돈독해졌다. 둘만 아는 농담이나 장난 (inside jokes)도 생기기도 했다.


어찌어찌 회의가 마무리되며 대화 주제는 곧 있을 회사의 행사에 대한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번졌다. 이 행사는 회사에서 매년 주최하는 가족행사로 보통 한여름 때 하루를 정해 유원지의 공간을 빌려 모든 회사 직원들이 자신의 가족들, 아이들 혹은 반려인들이나 친구들을 초청하여 함께 바비큐도 해 먹고 여러 수상 스포츠를 즐기는 행사이다. 


S 사원: Hazero씨도 참석할 거죠?

나: 어... 그게 7월 중순이었나요?

Q: 아마 7월 첫째 주였을걸요.

나: 정말요? 어쩌죠 7월 중순인 줄 착각했나 봐요. 7월 첫째 주에는 제가 짧게 영국 여행을 가기로 해서...

P: 이것 봐, Hazero 씨는 매달 휴가를 가는 것 같다니까?

나: 하하 이렇게 말하고 보니 그렇네요. 근데 자주 자리를 비우는 것 같아도 조금씩 연차를 써서 긴 주말을 보내는 게 저 같은 미혼들의 특권 아니겠습니까.

S사원: 아쉽네요, Hazero 씨 수상스포츠도 좋아한다고 하셨는데.


아쉽긴 하다만 아무리 허물없고 격식 차리지 않는 회사문화래도 굳이 동료들 앞에서 수영복 입은 모습을 보이기 싫었을뿐더러 나는 가정적인 성향이 아니어서 주변에 어린아이들이 많으면 기가 쫙 빨리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D사원: 아~ 아쉽겠다. P과장님 스피도 (딱 붙는 남성용 삼각 수영복) 입은 모습 놓치시겠어요.

나: 어...


순간 이 농담을 어떻게 적절하게 받아치지, 당황스러웠다. 나도 나름 언변이 좋고 재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자칫하다가는 성희롱이 될 수도 있기에 머뭇거리며 답했다.


저는.. 굳이 그걸(that) 보지 않아도 돼요..


순식간에 회의실이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아이고, 이렇게 대답하려던 게 아닌데. 아차 싶어서 부랴부랴 해명하려는데 모두들의 웃음소리에 그 누구도 내 얘기를 들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내 안의 유교사상이 다시 깨어나 상사에게 말실수, 그것도 농담 따먹기 하다가 선을 넘었다는 생각에 P의 얼굴을 쳐다볼 수도 없었다. 그런데 옆을 쳐다보니 그도 껄껄 웃으며 맞받아친다.


P: 아이 참 새삼스럽게 왜 이래. Hazero 씨 벌써 나 수영복 입은 모습 봤잖아. 나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별로 인상 깊지 않았나 보네 하하하


사실 그의 말이 맞았다. 두바이 출장 당시 몹시 더운 날씨 탓에 우리는 두어 번 호텔의 수영장에서 만나 짧게 업무 관련 대화를 하고 수영을 하며 맥주를 함께 마시기도 했다. 물론 단둘은 아니고 다른 동료들도 함께였고 P부장도 스피도가 아닌 그냥 트렁크를 입었었다. 


그렇게 나의 말실수 아닌 말실수는 다행히도 잘 넘어갔다. 회의실을 나서면서 P부장님께 조심스레 혹시 내 대답이 지나친 건 아니었는지 그랬다면 죄송하다는 말을 하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며 재미있었다고 하신다. 화룡점정으로, 이래서 널 영업팀으로 승진시킨 거야,라는 말로 오히려 독려해 주셨다. 아. 나 정말 인복이 있긴 있나 보다.




물론 나와 나의 직속상사와의 관계가 전형적이거나 대표적인 유럽에서의 직장문화라고 단언할 수는 절대 없다. 좋은 예로 우리 회사의 다른 부서에서 일하는 친한 동료는 완전히 다른 스타일의 상사와 일을 한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얼마나 그 대화가 딱딱하고 형식적인지 휴가 결재를 올릴 때도 불편해 죽겠단다.


그래서 나도 나 스스로가 운이 좋았다는 것을 잘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 관계 또한 나의 노력에서부터 발달해 왔음을 알고 있기도 하다. 한국에서부터 학습되어 왔던 장유유서 같은 유교사상에 그대로 얽매여서 여전히 P를 어렵게 대했다면 그도 나를 편하게 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나는 모든 관계는 일반통행이 아닌 양방통행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나와 나의 상사 P의 관계도 서로에 대한 이해로 점점 더 두터워졌다고 생각한다.


그를 알게 된 지 이제 벌써 2년이 다 되어간다. 나는 적어도 업무적인 고민뿐만 아니라 커리어에 관련된 고민들도 그에게 아무런 거리낌 없이 편하게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그를 이제 당당히 나의 멘토라고 칭한다. P도 언제나 나를 위해 시간을 내주고, 진지하게 내 이야기를 경청해 주며 물심양면으로 서포트해 준다. 이렇게 보고 기대고 배울 수 있는 선임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이런 관계를 잘 발달시킬 수 있는 환경에 있다는 것, 마지막으로 내가 이러한 감사함을 깨달을 수 있는 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정말 참 행운임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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