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콤플렉스
나는 못 사는 집, 그리고 교육받지 못한 집 출신이다. 부모님은 두 분 다 고졸이시고 친언니도 고졸이다.
우리 아빠는 본인 나이 2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5살에 어머니마저 돌아가셨다. 나는 한 번도 친조부모님을 뵌 적이 없다. 아빠도 너무 오래돼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고 하신다. 아빠는 위로 큰형 둘, 밑으로는 막내 여동생이 있는데 가장 큰형은 부모님이 돌아가시자마자 가장역할을 떠안고 고군분주 자기 동생들을 먹여 살리느라 고생하셨다고 한다. 당연하게도 둘째 작은형 그리고 이어서 우리 아빠도 비슷한 길을 걷게 되었다. 그래서 아빠는 상고를 졸업하자마자 상경하여 취업전선에 뛰어드셨다. 막내고모는 오빠들의 사랑과 보살핌으로 신 씨 가문에서 처음으로 대학에 입학하는 영광을 누리지만 졸업은 하시지 못하셨다.
우리 엄마는 2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난 정통 K장녀 그대로이다. 엄마와 이모는 두 남동생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여자가 무슨 대학교냐며 고등학교도 감사히 졸업하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엄마와 이모는 서울로 상경해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 돈은 그대로 두 남동생의 고등학교 시절 과외비, 그리고 대학교 등록금 및 생활비, 더 나아가서 둘이 장가갈 때 밑천으로 쓰였다. 두 삼촌들이 대학교 졸업하던 날들이 외할머니가 가장 행복한 날이었다고 한다. 학사모와 꽃다발을 든 삼촌들 사진 옆면 구석엔 엄마와 이모가 희미한 미소를 띤 채로 있다. 우리 엄마는 나중에서야 말하지만 본인도 대학교를 가고 싶었다고 했다.
그런 두 젊은이가 서울에 만나서 교제를 하기 시작했고 속도위반으로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가진 건 없었지만 단란했었기에 아이를 낳았다. 없는 살림에도 열심히 살아보자며 둘째도 낳았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IMF가 터졌다. 공장에서 일하던 아빠는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고 백화점에서 판매직으로 일하던 엄마는 순식간에 주 5일에서 주 3일로 일거리가 줄어들었다. 월세방 보증금을 빼서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자는 결심을 했다. 시가 쪽 부모님은 이미 돌아가셨기 때문에 친가 쪽 부모님이 사는 지역과 가까운 곳으로 가자는 결정을 내렸다.
젊은 나이었지만 성실히 일해왔던 탓에 조금 모아둔 돈이 있었고, 은행의 도움을 받아 작은 구멍가게를 열었다. 이름은 삼룡슈퍼. 난 아직까지도 유치원에서 돌아오곤 하면 계산대에서 일하던 엄마 뒤에 언니와 앉아 놀던 기억이 있다. 아빠는 엄마가 계산대에서 있는 동안 열심히 재고를 정리하고 매대를 정리하시던 것도 기억이 난다. 입구 왼쪽에 있던 아이스크림 냉동고, 중간 열에 채워져 있던 과자들이 생각난다. 뒷방에 딸린 작은 방, 찬바람이 들어오던 시멘트로 벽과 바닥이 마감처리된 화장실 겸 욕실, 그리고 위층에 달려 '안방'이라고 불리던 방, 작은 뒷마당엔 집과 가게를 지키는 2마리의 진돗개들도 있었다. 적은 매출에도 소풍날이면 먹고 싶은 과자를 다 가져가라며 환히 웃던 우리 아빠.
그런데 이상했다. 전래동화 같은 이야기 속에선 성실하고 우둔이 일만 열심히 하면 행복하게 잘 사는데, 우리 부모님은 아무리 하루에 12시간 14시간씩 일을 해도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고되어지기만 했다. 엄마는 계산대 뒤쪽에서 책을 읽던 언니와 내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너흰 엄마처럼 살지 말아라.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교 가야 해. 번듯한 직장 얻어서 살아. 일찍 결혼하지도 말고 아이도 일찍 낳지 마. 대학교는 무조건 가야 해. 가방끈은 길수록 좋아.
어린 내게 엄마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공부를 잘하는 것이었다. 뒷방에 틀어박혀 게임을 하거나 텔레비전을 보는 대신 보란 듯이 계산대 뒤에 앉아 책을 읽으면 엄마는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받아쓰기 백점을 받아오면 누굴 닮아 내 뱃속에서 이렇게 똑똑한 애가 나왔지,라는 말을 들었다. 삼촌들 졸업사진 한구석에 있던 희미한 미소가 아닌 함박 미소를 엄마 얼굴에서 보는 게 좋았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나는 이곳저곳 경시대회에서 상을 타오기 시작했다. 웅변대회, 영어말하기 대회, 그림대회.. 내가 좋아하는 분야인지 아닌지는 상관이 없었다. 노란 종이에 인쇄되어 궁서체로 내 이름 세 글자와 함께 교장선생님의 도장이 크게 박혀있던 상장은 장수가 너무 많아져 나중엔 감당이 안되어 A4용지들을 모아둘 수 있던 파일철에 학기별로 보관이 되었다. 아빠는 친구들 사이에서 '똑똑하고 야무진 딸들을 둘이나 가진' 친구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주말이면 놀러 오시던 아빠 친구들 상머리에 앉으면 "네가 그렇게 공부 잘한다며?"라는 말을 들었고 아빠는 세상에서 가장 큰 미소를 띠곤 하셨다.
지금은 그 많던 상장들이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겠을뿐더러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상장을 훈육 수단으로 이용하던 그 2000년대 초반 당시 상장받는 일이 그다지 특별한 일도 아니었었는데, 우리 부모님은 그때마다 너무 기특해하셨다.
그렇게 나는 초등학교 6년 내내 경시를 휩쓸며 영재반에 등록까지 되었다. 내가 영재인가? 싶을 새도 없이 엄마는 '영재'라는 말을 듣자마자 학원 여러 개를 등록시켜 줬다. 나도 학원 다니는 게 그다지 싫지 않았다. 공부 잘하는 학생은 어딜 가나 예쁨을 받았기 때문이다. 선생님들도 간식이라도 하나를 더 쥐어주시며 기특해하셨다. 나는 그렇게 점점 나의 가치란 곧 좋은 성적이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기 직전 당시 고등학생이던 언니는 입시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우울증에 걸렸다. 그때에 걸쳐져 일어난 부모님의 이혼도 큰 사건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내내 부모님은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나는 막연히 더 열심히 공부해서 더 많은 상장을 받아오면 부모님은 행복해질 거고 두 분이 이혼할 일은 없을 거라 믿었는데, 내 소망은 산산조각이 났다.
그렇게 엄마가 집을 도망치듯 나가버리고 아빠의 뒷모습은 더 쓸쓸해져만 갔다. 몇 년 전 술자리에서 보여준 아빠의 큰 미소를 볼 수 있는 방법은 그때처럼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자퇴를 하네 마네 하던 언니와 절대 안 된다는 아빠 사이, 그리고 엄마의 부재 속에서 나는 그냥 학원과 독서실만 전전하며 문제집을 풀어냈다. 내 나이 만 13살이었다.
이 시기 내게 가장 수치스러웠던 기억은 매달 늦어진 학원비 납입에 불려 가던 상담실, 비싼 수학여행비에 아빠에게 가져다주기가 망설여지던 가정통신문, 해진 운동화, 구멍 난 양말, 시장표 점퍼, 다림질이 되어있지 않았던 교복 블라우스와 지나치게 컸던 교복 마이였다. 엄마의 목소리가 다시 들리는듯했다. 너흰 절대 나처럼 살지 마.
이혼 가정 출신, 못살고 교육 못 받은 집 출신, 이 모든 것은 다 공부로 해결이 될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