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괜찮아요
만 13세부터 만 15세, 그러니까 중학교 1학년부터 3학년까지 나는 학교-학원-독서실-집을 오가는 생활을 하며 특목고 (특수목적고등학교) 준비에 몰두했다. 선생님들 말씀에 따르면 특목고야말로 좋은 대학교에 입학하는 고속도로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특목고는 각 중학교에서 1명씩, 많아야 최대 3~5명이 갈 수 있는 정말 말 그대로 특수한 고등학교였다. 안타깝게도 수학은 내 특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언어적인 능력을 살릴 수 있는 외국어 고등학교 진학을 목표로 삼았다.
중학교 시절 내내 1등급을 따며 학원에선 장학금까지 받으며 중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나는 외국어 특수 목적 고등학교, 즉 외고에 입학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첫 입학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이 시험은 새로운 입학생들의 실력을 확인하기 위한 시험이었는데, 아직도 나는 이 충격이 생생히 기억난다. 초중학교시절 1등만 도맡아 했는데, 외고 첫 시험에서 내게 주어진 시험지를 나는 단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1등이었긴 했지만 못 사는 동네, 즉 학군이 좋지 못한 동네의 1등이었다. 날고 기어봤자 흔히 말해 잘 사는 동네, 그래서 상향평준화가 된 학군의 아이들의 발 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실력이었던 거다. 수학시험은 말할 것도 없이 망쳤으며 그나마 자신 있었던 영어도 읽을 수는 있지만 독해는 할 수 없는 지경에 놓여 답안지를 채 작성할 시간도 없이 시험을 마쳤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외고에 입학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나의 운이 좋아서였다. 이 당시 정부에선 학군평준화를 이루기 위해 모든 지역에서의 아이들을 내신'만' 보고 뽑았다. 비교군 실력의 상하와 관계없이 상대평가인 내신만 좋으면 입학할 수 있었던 거다.
그렇게 입학시험을 망치고 어찌어찌 입학을 하긴 했는데 배정된 교실에 들어가 보니 더 충격적이다. 너도 나도 입고 있는 고가 브랜드의 외투와 신발. 입시 학원에서 먼저 만나 안면을 이미 트고 서로 알고 있던 학생들은 영국, 미국, 호주, 뉴질랜드 등 유학 1년은 기본으로 하여 영어 회화는 기본이었다. 모두 고등학교 입학이라는 기대에 벅차 다양한 색으로 빛나는 와중 나만 회색으로 남겨진듯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 딸 외고입학한다며 자랑스러운 마음에 우리 아빠가 사준 나이키 신발은 가장 저렴한 모델이었기에 나는 그것이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우물쭈물 다가가서 말을 걸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내가 살던 지역 아주 반대편 출신인 아이들이 너는 어디 중학교 출신이냐고 묻는다.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하니 처음 들어보는 곳이라는 반응을 한다. 처음 학벌주의라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그 뒤로 본인의 아빤 검사인데, 너희 부모님은 뭘 하시냔 물음에 나는 차마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예상이 가다시피 나는 3년 동안 처절히 다른 학생들과 나 자신을 끊임없이 비교하고, 자책하고, 절망하고, 좌절하고, 수치스러움을 느끼고, 무얼 해도 쫓아갈 수 없는 보이지 않는 빈부의 격차를 계속해서 좇기만 했다. 더 이상 동기부여를 느끼지 못해 공부는 일찌감치 손을 놓아버렸다. 나는 읽지도 못하는 영어 본문을 눈길 한 번만에 직독직해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도저히 함께 경쟁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나는 지쳐버렸다.
소동 아닌 소동 끝에 학교의 권유로 나는 정신과 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아빠는 한순간 모범생 딸을 가진 사람에서 정신과 다니는 특별케어가 필요한 학생을 딸로 둔 사람이 되었다. 언니는 이미 오래전 대학 진학을 포기하여 알바를 전전하던 시기였다. 아빠의 미소를 본지가 언제였더라.
이 때문에 내 인생에서 가장 어두웠던 시기는 고등학교 3학년때였다. 너도 나도 입시 스트레스가 최대치인 상태였고 나도 덩달아 조급해졌다. 어찌어찌해서 졸업을 하고 성적에 맞춰 지방 전문대에 입학하게 되었다. 아빠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어렵게 연락이 닿은 엄마는 네가 행복하면 괜찮다고 하셨다. 문제는 내가 행복하지 않았단 거였다.
지방 전문대에 진학하니 외고에선 낮은 수준이었던 나의 영어 실력이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3년 동안 손을 놓긴 했어도 계속 듣고 보고 한 것이 영어 실력 향상에 조금은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특히 외고 특성상 계속 배워왔던 회화가 많이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나는 그 전문대의 장학 프로그램에 선정되어 호주로 교환학생을 떠나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호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성적이란 게 참 웃기단 생각을 했다. 그토록 3년 동안 나를 괴롭히다가도 이렇게 내게 기회를 주다니. 내가 상대평가라는 시스템 안에서 놀아나는구나, 싶었다. 대한민국은 왜이리도 남들과 자신을 '비교'하는것을 좋아할까.
그렇게 호주로 떠난 것을 계기로 나는 여러 나라들을 거치고 거쳐 지금 네덜란드에 정착하게 되었다. 내가 서양권 중에서도 미국이나 영국이 아닌 네덜란드에 정착하게 된 이유들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바로 이 학벌주의를 대하는 태도에서 차이점을 느꼈기 때문이다.
당연히 네덜란드도 좋은 학교, 혹은 명문 학교가 있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그로 인한 전형적인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운이 좋았을 수도 있지만 그 누구도 내게 어느 대학교 출신이냐고 묻지 않았고, 면접에서도 학교나 성적 대신 그 직무에 걸맞은 적성, 그리고 인성이나 경험을 묻는다. 실제로 현재까지 약 3년을 근무하며 새로 사람을 채용할 때 그 누구도 어느 학교인지를 먼저 묻거나 하는 일이 없었다. 실무에서 만나는 이들도 내가 어디 학교 출신인지 전혀 관심을 가지지 조차 않는다. 나 또한 내 동료들이 어느 학교 출신인지 전혀 관심이 없다. 일만 잘하면 된다.
내가 네덜란드로 온 것이 2018년이다. 그리고 한국에선 2019년부터 블라인드 채용제를 실시하며 채용법을 개정했다. 직원 수가 30명 이상인 기업들은 직무 수행과 관계가 없는 개인 신상정보 (성별, 종교 등)를 물을 수 없게 되었다. 하나 학력사항란은 여전히 존재한다. 취업 관련 커뮤니티에는 젊은이들이 어느 어느 회사 학력 많이 보냐는 질문을 올린다. 기업들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도 XX대학교 출신 반려자가 어떠냐는 질문을 하는 게시글들이 다양한 소셜 미디어에서 보인다. 그때마다 나는 아직도 속이 시큰함을 느낀다.
안타깝게도 여전히 학벌이 곧 탄탄한 중산층, 그리고 그러한 가정환경에서 키워낼 수 있는 온화한 인성, 그리고 안정적인 직업의 보장성을 모두 포함시킨다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학벌이 곧 능력이고 취업 전과 후의 삶까지 모두 지배한다는 프레임이라니, 나같이 개천에서 나서 용이 되지 못한 이들은 가능성조차 없는 것일까?
물론 개인이 처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노력하여 좋은 대학에 입학하여 말 그대로 개천에서 난 용이 될 수도 있고, 그러한 경우엔 자신의 불우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사회적 사다리를 오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이러한 케이스는 극히 드물어서 심지어 뉴스 기사화 될 정도이니 얼마나 그 비율이 낮은지 알 수 있다. 당연히 부유한 가정의 아이들은 더 많은 기회를 갖게 된다, 요새 흔히 말하는 '수저론'에 비할 수 있겠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전반적으로 학업적인 성취에 그다지 큰 비중을 두지 않는다. 그 어떠한 부모도 우리 아이가 어느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닌다며 자랑하지 않는다. 네덜란드 청소년들이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순위 1위로 꼽힌 것도 이 때문이다. 학업에 뛰어나다면 학업 순위가 좋은 학교에 입학하면 되고, 원한다면 연구의 길을 걸으면 된다. 영업직을 하기 위해 굳이 석사 학위까지 얻을 필요는 없다, 영업직에 관심을 보인다면 일찍이서부터 레스토랑 같은 서비스직에 종사하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하여 경험을 쌓는다.
우리 아빤 이제 미소를 되찾았다. 방황하던 작은 딸이 해외에서 취직하여 정착했다고 하니 처음엔 믿지 않으시는 눈치였지만 작년 출장차 한국에 방문하며 가져간 명함을 내미니 그제야 이제 다 큰 게 실감이 난다는 말씀을 하시며 함박웃음을 지으셨다. 난 이제 길고 긴 가방끈이 없이도 다시 자랑스러운 아빠 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