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으로 여는 문
대한민국만세! 세종대왕님 만세!
지구촌 구석구석 파고든 대한민국의 위상, 알고는 있었어요. 대한민국이, 한국어가 대세인 줄도요. 그렇지만 이탈리언인 아리엘이 한국 노래를 부를 거라곤 상상도 못 했어요. 발음이 좀 꼬이긴 해도 둠칫둠칫, 상반신을 흔들게 하는 리듬......기가막혀요. "골목길 접어들 때에, 내 가슴은 뛰고 있었지, 커튼이 드리워진 너의 창문을 말없이 바라보았지" 김현식이 부른 "골목길"이에요.
그녀가 신나게 노래를 시작했으니 나도 신나게 밥을 할게요. 먼저 도마를 꺼내 톡톡, 탁탁. 양파, 감자, 당근, 호박, 돼지고기, 청경채, 새우, 오징어.... 재료가 좀 많지요? "두 가지 요리를 동시에 하지 않는다"는 게으름을 좌우명처럼 걸고 살지만 아주 가끔 그 좌우명 내려놓기도 해요. 오늘이 바로 그날이에요. 짬뽕과 짜장면을 두고 타는 시소, 오늘은 안 타려고요. 왜냐고요? 어젯밤 털러 간 곳이 중국요리전문점이었거든요. 사실, 중국요리전문이라는 입간판을 세워 놓았지만 메뉴는 짬뽕과 짜장면밖에 없었어요. 자신있는 요리 두가지만으로 승부하는 그 집, 신선하고 귀한 재료들이 가득했어요. 털어온 좋은 재료들을 썩히자니 아깝고, 짬뽕의 매콤함과, 짜장면의 달콤함, 그 어느 것 하나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 어쩌겠어요. 둘 다 하는 수밖에요.
그집, 맛도 분위기도 좋지만 소문난 식당은 아니에요. 광고를 하지 않거든요. 자랑도 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아는 사람만 가는 진짜 맛집이란 말이죠. 좁고 후미진 골목길에 있어요. 작은 식당이지만 요리사가 두 명이에요. 딸과 엄마, 두 사람이 요리를 해요. 딸은 매콤한 짬뽕 담당이고요. 엄마는 달콤한 짜장면을 담당하죠. 이 집의 특이점은, 짬뽕과 짜장면을 따로 주문받지 않아요. 언제나 짬뽕반 짜장면반으로 반반하게 만들어내죠. 반반하게 만들지만 만만치 않은 여자 둘이 하는 식당이라 말이 좀 많아요. 처음 갔던 날로 기억해요. 주문한 재료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가만히 있는 양파, 호박, 새우들에게 시비를 걸지 뭐예요. 배달박스 안에 덤으로 온 하얀 난초그림이 너무 깨끗하다고 딴지를 걸더군요. 세상에는 입소문을 타고 줄을 서야 먹는 유명 맛집에, 유명하고 잘생긴 요리사는 많고 많아요. 자타공인 맛집도 있고, 스리슬쩍 집어온 레시피로 만들고는 자신이 개발한냥 둔갑시키는 요리는 또 얼마나 많은지요. 자기가 최고라는 생각도, 남의 레시피 베낄 생각도 없어요. 그저 묵묵히 자신들만의 요리법을 고수하는 뭔가 다른 이 식당, '언젠가는 털어보리라'다짐했었죠.
드디어 결행한 어젯밤. 창고문을 따는 갖가지 수고는 하지 않았어요. 그날 훔쳐온 "하얀 난초꽃", 그것이 열쇠였으니까요. 새하얀 꽃으로 문을 여는 손맛! 아실까 모르겠어요. 설레고, 향기로와요. 여러 겹의 문이 있는 것도, 특수장치도 하지 않았어요. 군더더기없이 단순하고 깔끔해요. 각기 두 개의 서랍이 딸린 마흔 두 개의 진열장으로 정리되어 열어보기 편하도록 되어 있어요. 그곳에서 조용히 수다를 떨고 있는 두 여자. 보통, 수다라고 하면 시끄럽고 정신없고, 했던 말 또 하고, 네 말이 맞네 내 말이 맞네 난리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조용해요. 한 사람이 조그조근 말을 하면 다 듣고 난 또 한 사람이 나긋나긋, 자신의 말을 해요.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이 두 사람은 모녀지간인데 말이에요. 창고문을 열기 전, 이 두 여인의 뒤를 파봤어요. 두 사람 다 말로 먹고사는 사람들이더군요. 그러니 할 말도 주장도 많지 않겠어요? 나, 참.... 잘 구운 밤고구마, 열두 개도 더 먹은 기분이었어요. 그렇지만 어쩌겠어요. 신분이 창고털이인지라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고, 어둠 속에 쭈그리고 앉아 그들의 수다를 들어보는 수밖에요.
이제야 말이지만, 하얀 난초는, 너무 깨끗하게 그려진 하얀 난초그림은 저도 좋아하지 않았어요. 2001년에 개봉한 한국영화 "파이란"의 여주인공 '백란(파이란)'을 두고 하는 말이에요. 지나치게 순정적인 캐릭터로 그려져 너무 작위적이라 생각했었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가끔 꺼내보는 영화예요. "파사모"라는 팬클럽까지 만들게 한 송해성감독을 만나게 된 고마운 영화죠. 파이란을 시작으로,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가는지 귀 기울여 들어봤어요. "더 테러 라이브, 집으로, 동주, 인생은 아름다워, 어퓨 굿 맨, 조용한 가족, 로그 원, 남한산성, 굿 나이트 앤 굿럭 등, 사십 두 편의 대화를 엿들었어요. 영화가 중심이 되는 수다라면 빠지고 싶지 않은 1인인지라, 까만 밤을 하얗게 지새우고도 피곤한 줄 몰랐어요. 은근슬쩍 찌르기, 시비, 딴지, 동조, 박수갈채를 거쳐 그녀들 삶의 뿌리로까지 뻗어나가더군요.
예를 들어볼게요. "파이란"을 본 엄마가 "끝까지 기대와 희망을 버리지 않을 유일한 구원의 주체는 오직 한분밖에 없는 것"이라고 해요. 그러면서 "서로에게 구원이 될 수 없을지언정 상대방이 기댈 수 있도록 내주는 따뜻한 어깨가 되기를 애씀이 우리 각자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어깨를 내어주더군요. 엄마가 말을 마치자 듣고 있던 딸이 말해요. "둘의 사랑이 비극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들에게 죽음이라는 '단절'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불완전'한 인간의 사랑은 '불완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사랑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가치임을 의심하지는 않지만 부족함 투성이인 사람끼리 서로를 사랑하는 것은 그 누구에게도 구원이 되지 못한다"라고 하더군요. "완전한 존재에게서 받는 완벽한 사랑에 대해 새삼스레 감격을 느낀다"며 "죽음을 넘어 우리와의 '단절'을 허물어 내신 예수님의 완벽한 사랑에 감격하며 말을 마쳐요.
작은 일을 정성껏 하고 약자들에게 어깨를 내어주는 엄마는 선교사예요. 사랑을 기본으로 불의와 맞서고 정의를 강조하는 딸은 변호사예요. 변호사인 딸이 "어퓨 굿맨"에서는 자신의 특기를 꺼내더군요. 찌르기요.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만 유능한 변호인 군단을 선임할 수 있는 실질적 불평등 외에도 증거를 채택하는 방식, 증인의 신뢰성을 평가하는 기준, 인간관계를 수립하고'법적 책임과 죄를 묻기 위해 충족시켜야 하는 요건, 등등 오늘날의 법에 내재하는 한계와 부당성을 오히려 변호사가 된 이후 더욱 뼈저리게 깨닫는다"며 현 사회의 법제도에는 일침을 가하고, 자신의 척추는 곧추 세우죠. 같은 듯 살짝 다른 곳을 바라보던 엄마도 이번엔 찌르기로 맞장구를 쳐요. 법정에서 계속되던 캐피중위의 심문에 화가 치솟은 제셉대령이 "너는 그 진실을 감당할 수 없고, 또 진실을 알고 싶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상대방을 "내가 제공하는 자유라는 담요 속에서 잠들고 깨어나는 사람"으로 규정하는 모습에서 그의 독선과 아집을 명확히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도 예외 없이 현재의 자기가 있기까지 보이는 곳,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도움을 베푼 타인들의 희생과 사랑에 감사해야 한다"면서 말이에요. 그러고는 긴긴 수다 끝에, 어쩌면 처음부터 하고팠던 말을 드디어 꺼내놓아요."한국해병대가 표방하는 "누구나 해병이 될 수 있었다면 나는 해병대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문구를 좋아하는데 이 문장에서'해병'이라는 자리에 '기독교인/크리스천'이라는 말을 넣고 마음속으로 선포를 해 보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요. 자신도, 우리도 "A few good man"중의 하나임을 모든 기독교인들이 잊지 않기를 바란다" 며 긴 긴 수다끝에 묵직한 방점을 찍어요. 그녀들의 특기가 발휘되는 순간이죠. '침묵'이라는 쉬운 길 대신 '소리'내어 다리를 만들어요. 소통의 다리, 구원의 다리를요. 말로 먹고사는 이들의 말 되는 수다.... 정말이지 맛깔나요.
아는 사람만 가는 맛집. 깊고, 진하고, 매콤하고 달콤해요. '말씀'과 '말'로, 말 못 하는 자들의 숨통을 트이게 하고, 양심에 칼을 들이대는 시원하고 용감한 수다는 계속 되어야 해요. 그래서 커다란 그릇으로 준비했어요. 매일 하는 요리라 질릴 수 있지만, 누군가 차려주는 밥상이라면 매일 먹던 김치하나만 있어도 기쁜 우리(밥 하는) 아니겠어요? 눈치 채셨겠지만, 짬뽕과 짜장면 반반 담은 짬짜면이에요. 그렇지만 아무리 차려주는 밥상이 좋아도 늘 먹던 그대로 대접할순 없어요. 땅속의 다이아몬드라 불리는 송로버섯이라도 한줌 토핑 해야 해요.
흙속에 묻혀있으면 아무도 모르는 귀한 송로버섯, 묻혀있는 보석 같은 두분, Joanne변호사님과 김희진 선교사님께 안성맞춤 식재료거든요. 함께 마실 와인도 꼭 맞는 걸로 준비했어요. 짬짜면과도 어울리고 우아하고 품위있는 여인들과도 어울리는 와인 "판티니, 까살레 베끼오 몬테풀치아노 다브루쪼(Fantini, Casale Vecchio Montepulciano d’Abruzzo)" 로요. 밸런싱 좋고 농밀한 맛의 이탈리아산 레드와인이에요. 두분 작가님은 천천히 드시고 기쁜날 되세요. 저는 꽃으로 연 창고에서 "내 잔이 넘치나이다"며 소리쳐 들어올린 잔, 다시들어 건배사를 할게요. 귀하신 두분, 수다의 품격에 치얼스! 하늘에 있는것이나 땅에있는것이나 모두 그분안에 하나될 지구촌을 꿈꾸며 다시한번, 치얼스!
가끔 여는 '골목안 식당', 꼭 한번 가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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