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안 Dec 17. 2022

희뿌연 연기 한 모금 가져가고,  사연 하나 주시오

밤하늘 별들에게 비나이다

  10분쯤 지났을까. 나는 ‘제가 좀... 이런 자리가 불편해서’라는 말을 남긴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애초에 나는 낯선 사람과 잘 어울릴 수 있는 인간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따금 들려오는 욕설 말고는, 도무지 알아듣기 어려운 경상도와 제주도 말로 떠들어대는 두 남자와 한 자리에 있기란, 그만한 지옥도 내겐 또 없었다. ‘아직 어려서 그러는데, 이러면 안 된다.’며 말리던 건넌방 아저씨와 비스듬히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미간을 찌푸리던 통신사 직원 김 씨는, 섬에 이사 온 그날 처음 만난 사람들이었다.




  일 년에 한두 번 부산에서 요양하러 온다는 건넌방 아저씨는 내가 짐을 다 풀기도 전에 방문을 두드리더니, 섬을 구경시켜주겠다고 했다. 두 시간이 넘도록 열 곳도 더 돌아다닌 후에야, 밥을 먹자면서 데리고 간 곳은 중앙로의 한 호프집이었다.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은 뒤, 나는 정신없이 떠들어대는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후 테이블 위에 올라온 치킨과 늘어진 맥주병에 순간 정신이 번뜩였고, 덕분에 그들이 주고받는 욕설과 여자를 두고 하는 단어들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치킨과 맥주, 그 둘이 함께 있을 때라면 더욱이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것들이었지만 생각해보라, 지옥에서의 치맥이라니. 과연 제대로 씹고 넘길 수나 있을까?


  그때만 해도 한 귀로 들은 욕설과 음담패설을 다른 귀로 흘려보내는 방법을 몰랐던 터라, 방으로 돌아와 거북하고 불쾌하게 꼬인 심사를 풀어내려 길길이 날뛰던 나는 그만 안경을 벗어던지고 말았다. 남몰래 서른의 나를 내려다볼 때마다 느꼈던 연민이 그때 떠올랐던 것이다. 우도의 요양원에서 일하기로 결정한 건, 나를 옭아매는 관계들에서 벗어나 진짜 나를 찾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첫날부터 나를 지옥으로 끌고 가는 것도 모르고, 어미 쫓는 햇병아리처럼 졸졸 따라다녔다니.

  연민이란 불구에 대해 느끼는 슬픔을 먹어 내 자긍심을 배 불리는 서글픈 감정이라고 했던가. 1리도 날지 못하는 어미닭의 운명이라도 깨달았다면 제 처지도 슬프다 울며 연민이라 변명하겠건만, 깨진 안경을 주워 들고 숨을 고르다 보니 난 단지 섬 생활의 로망에 너무 흥분한 상태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호프집의 두 남자는 또 무슨 잘못인가. 괜히 나 때문에 술자리 분위기만 흐린 것 같아 미안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햇병아리를 두고 인정 없이 지나버린 세월에 서운하기도 했고, 상처만 늘어나는 청춘에 미안해하며 나는 잠을 청했다. 깨진 안경은 잘 닦아 머리맡에 놓아두었다.

출근길에 본 한라산, 꼭대기에 쌓인 눈이 보이시나요.

     

  다음날, 나는 요양원 국장과 함께 어르신들을 뵙고 직원들과 간단한 인사를 나누며 시설을 둘러보며 지냈다. 흐릿한 시야로 낯선 곳을 다니느라 눈은 피곤했고 전날 저녁부터 굶었던 터라 배가 몹시 고파왔다. 기다리던 점심시간, 나는 1층에서 원장과 국장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됐는데, 솔 님을 처음 만난 건 그때였다.

  친해지고 나서도 절대 말을 놓지 않던 그에게 선뜻 형이라는 호칭을 붙이기가 어려워, 나는 ‘소리 선생님’이라 부르다가 나중에는 그의 이름을 줄여 ‘솔 님’이라고 불렀다. 두 살 위인 그는 지역아동센터의 사회복지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마치 잘 깎은 방망이 같은 인상의 그는, 당시만 해도 온몸이 살덩어리로 둥글게 싸매진 게 꼭 새끼 곰처럼 보였던 나와는 너무도 비교되는 외모를 하고 있었다.

  영화 <본 슈프리머시> 시절의 맷 데이먼과도 닮은 그의 모습에, 잘못 보였다간 눈 깜박할 새에 종이처럼 구겨져서 쓰레기통에 처박히겠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 그가 핏줄이 우뚝 선 손을 내밀며 콜센터 여직원의 상냥한 목소리로 인사하는 순간, 나는 운명처럼 그에게 빠져버리고 말았다. ‘반갑습니다, 이소리예요. 저 소리도 아니고 이소리입니다. 하하!’ 세상에나, 저 소리도 아니고 이소리라니. 어찌 보면 다행이었다. 그나마 목 씨가 아닌 게 어딘가?     

  

  섬의 겨울은 놀라울 정도로 추웠다. 태어나 처음으로 내가 입을 내복을 사 입었다. 추위를 잘 타지 않는 내게, 내복은 첫 월급을 탔을 때 부모님께 드리는 선물이었거나 군에서만 입던 것이었다. 탄피 한 알과 초코파이 한 개, 담배 한 개비를 목숨처럼 생각했던 것처럼, 국방색 내복도 몇 개 되지 않는 내 재산 중 하나였던 군대 시절은 10년도 더 지나 이제 상상의 나라에 다녀온 꿈처럼 아득할 뿐이었다. 그러니 다시 내복을 입게 될 거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

  한겨울, 섬으로 닥치는 바닷바람은 살을 에는 추위나 칼날 같은 바람 따위로는 비유할 수 없는 정도였다. 그 시절 내가 습작했던 시에 ‘당신이 남긴 언 바람만이 남아있습니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섬의 겨울바람은 그냥 얼음덩어리가 날아와 아이언맨 슈트처럼 맨몸을 감싸 가둬버리는 것과 같았다. 게다가 그즈음에 나는 이사를 했는데, 지은 지 50년은 넘었다는 집만큼이나 고장 난 지 오래돼 보이는 커다란 보일러가 벽처럼 굳어버려 집과 하나가 돼있었다. 때문에 쉬는 날에도 집안에만 있는 날이 계속됐는데, 어떻게 하면 전기장판과 솜이불 사이에서 가능한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다 잠에 드는 날이 이어졌다.

 

  나는 '작가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이라는 팟캐스트를 듣고 있었다. 그건 책은 읽고 싶은데 이불을 빠져나갈 수는 없어 선택한 방법이었다. 그러니까 눕거나 엎드린 자세로는 이불 밖으로 나온 팔과 얼굴이 얼 것만 같았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핸드폰 불빛으로 보자니 그 처량한 모습을 상상해보니 너무 이상한 것이었다. 차가 여섯 대는 주차할 수 있을 만큼 너른 마당과 기억자 모양의 텃밭이 딸린 방이 두 개인 집이 있는데, 가구 하나 없어 썰렁한 방 한복판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핸드폰 빛으로 책을 본다니. 뭐 야한 이야기가 가득한 소설책을 본다 해도 어차피 주위엔 사람이 살지 않는 빈 집만 하나 있었으니, 그건 비효율적인 걸 넘어서 나로선 그냥 이상하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서 팔은 이불 안에, 얼굴은 파카의 모자 안에 집어넣은 자세로 나는 읽는 대신 듣고 있었다. 그렇게 팟캐스트를 듣고 있는데 새삼 김영하가 더 대단하게 생각됐다. 내가 좋아하는 그의 소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큰 키와 호감형 얼굴에 머리숱도 많고 영어도 잘하는 그가, 다른 작가들의 글을 읽어 내려가는 목소리는 타일 바닥을 두드리는 물소리처럼 또랑또랑 울렸다. 알베르 카뮈든 로맹 가리든 윤대녕이든 성석제든, 원작자가 누구든 간에 김영하가 읽어주는 이야기는 눈밭에 무릎 꿇은 한 남자의 고백처럼 진솔했고 무늬를 맞춰가는 타일공의 손짓처럼 매끈했다. 원래가 거실이었든 공부방이었든, 타일을 깔고 세면대와 거울을 달아놓고 한쪽에 변기까지 세워두면 누가 뭐라 해도 거긴 욕실이었다. 어떤 소설이든 그건 김영하의 이야기였다. 작가란 그럴 수 있어야 하나보다. 어떤 이야기도 자기만의 호흡으로 다시 뱉어내 자신만의 벽을 만들고 그 안에 울림을 담아낼 수 있어야 소설이라는 걸 쓸 수 있나 보다. 내게도 그 명랑하고 똑똑한 목소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김영하의 욕실 안에 한참을 빠져있을 때 솔 님에게서 문자가 왔다.


‘잠깐, 이야기 좀 합시다.’

  

맷 데이먼을 닮은 솔 님. 저 자세로 서서 '잠깐, 이야기 좀 합시다'하면, 절로 두 손을 모으게 된다.


  나는 왠지 모를 설렘에 가득해 종종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드문드문 켜진 가로등 아래로 하교하는 여학생 하나가 보였는데, 문득 내게 어디 가느냐고 물어봐주길 바랐다. 아쉽게도 여학생은 제 갈 길이 바빴다. 내게 물었다면 '맷 데이먼을 만나러 간단다!’라며 우쭐댔을 텐데. 언 바람에 온몸을 웅크린 채 나는 비양동 언덕을 올랐다. 솔 님은 먼저 도착해서 언덕 너머의 농협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종종거리며 내려오는 나를 보고는 새끼 곰 한 마리가 데굴데굴 굴러오는 줄 알았다며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하하하! 생각해보니 살을 빼기로 결심한 게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우리는 따뜻한 커피 캔 하나씩을 사들고 폐교의 벤치에 앉아 사연 하나에 담배 한 개비를 태우며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본래 나는 말을 재미있게 할 수도, 할 이야기가 많은 사람도 아니었다. 그런데 불을 붙이며 달빛 한 번, 연기를 뿜으며 별빛 한 번 바라보고 나면 신기하게도 내 머릿속에 타일을 울리던 김영하의 목소리처럼 선명한 이야기가 가득 차는 것이 아닌가.

  겨울은 이제 시작이었고 밤은 아직 길어질 날이 많았으므로 우리는 몇 번의 폐교 앞 벤치 다방을 청산하고 서로의 집에서 만나기 시작했는데, 주로 만나는 곳은 솔 님 집이 됐다. 이유는 분명했다. 솔 님 방에는 전기 패널이 깔려있었던 것이다! 도시의 중앙집중식 난방만큼은 아니었지만, 두 사내가 이불도 덮지 않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대화를 나누는 데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리는 이따금 할 이야기가 떨어지면 마당으로 나가 신선한 공기를 쐬었는데,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에다가 연기를 피워 올리며 주문을 외우곤 했다.

'희뿌연 연기 한 모금 가져가고, 사연 하나 주시오.'

당시 솔 님이 살았던 집과 그의 '자가용'


  그렇게 겨울밤의 별님과 달님에게 빚을 지고 얻은 사연으로 각자의 추억을 나누는 동안, 겨울은 빠르게 지나갔다. 어느새 개구리의 울음소리가 밤마다 가득하더니, 그때부터 섬 안은 매일 새로운 것들로 가득했다. 계절마다 나는 바닷속 먹거리들에 대해 배웠고, 껍데기에 난 구멍 개수로 전복과 오분자기를 구분하는 법이나, 비양동 사람들이 부자인 것이 비양동 앞바다의 해산물이 질이 좋기 때문이라는 운명적 이유 때문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나는 봄볕이 누운 폐교 운동장의 노란 유채꽃밭을 사랑했는데, 농사를 질 여유가 없는 주민들은 밭에 유채꽃만 키워도 돈이 나온다는 사실을 듣고 난 후로는 자꾸만 오만 원짜리 돈 잎으로 보이는 것이 슬퍼서 얼마간은 일부러 길을 돌아 출근하기도 했다. 요양원에서 빌어준 빈집마다, 한 달만 지나면 주인이 찾아와 월세를 따로 요구하거나 리모델링 얘기를 꺼내는 바람에 나는 세 번의 이사를 더해야 했다. 나는 1년 만에 요양원에서 세 번째로 오래 일한 직원이 됐고, 13킬로그램의 살을 뺐으며, 태어나서 처음으로 천만 원이 넘게 찍힌 내 통장을 갖게 됐다. 그리고 겨울이 오기 전, 솔 님은 학자금과 유학비용으로 썼던 대출 빚을 다 갚았으니 고향으로 올라가겠다고 말했다.


'돈 밭'이 아닌 유채꽃밭

  

  그가 짐을 싸던 날, 우리는 꿈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의 친구들 중 대부분이 국가고시에 패스하거나 가정을 꾸렸다. 나로서는 도저히 그런 걸 어떻게 알 수 있는지 모르지만, 내 고등학교 동창인 한 친구는 경기도의 곧 떠오를 지역을 골라 지하철역 가까운 곳에 오피스텔을 분양받기까지 했다. 그래도 우리는 담배연기와 하나의 사연을 두고 별과 거래를 하는 것과, 집을 계약하는 것 사이에서 뭐가 더 대단한 것인지는 애써 고민하지 않았다.     

  “저는 소설가가 되고 싶어요.”


  “난 말이요, 많이 벌 것이오.”     

  처음 만났을 때의 인사처럼, 솔 님의 말은 돌아가는 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건넌방 아저씨처럼 뭘 이러면 안 되는지도 모르면서, 체면 차리느라 어쭙잖은 훈계를 내뱉지도 않았다. 센터에 사직의사를 밝힌 그는 ‘어려서부터 가난했는데, 어머니는 자장면을 싫어하셨고...’가 아니라 ‘난 돈이 없으니, 많이 벌고 싶소.’하는, 저 소리도 아닌 이 소리만 남긴 채 우도를 떠났다.    


  또 한 번의 겨울이 지나갈 때쯤, 나는 무릎 사이의 연골이 다 닳아 염증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병원의 진단을 받고 요양원을 그만뒀다. 내가 우도를 떠나는 날, 서울에 올라가 있는 솔 님 대신 섬의 봄볕이 나를 배웅했다. 항으로 가는 길에 봄볕은 내 걸음을 따라 키를 훌쩍 넘어버린 유채 꽃잎에 잠깐 머물렀고, 50년이 넘은 흙집들의 지붕과 돌담에 눕기도 하고, 폐교 앞 벤치 다방의 새로 칠해진 흙색 페인트에 반사돼 한참을 반짝거리기도 했다.


  나는 잊히는 것도 그렇게 아쉬운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잊힌 것들은 변하지 않고 고스란히 내 안에 남아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한 편의 시와 (살아온 순서대로) 다섯 곡의 노래 이야기,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세월이 흘렀지만 그 겨울밤 솔 님과 함께 보았던 하늘은 잊을 수가 없다. 희뿌연 연기 가득했던 우리의 날숨과 맞바꾼 밤하늘의 선물은 연민으로 가득 찼던 내 안을 많은 추억과 희망들로 채워주었고, 김영하의 또랑또랑한 목소리와는 다른, 내 앞의 흰 종이를 채울 나만의 숨결을 갖게 됐다. 어미 쫓던 햇병아리는 자라도 어미 닭밖에 될 수 없다 해도, 그래서 멀리 날지 못하는 운명에 슬퍼한다 해도 괜찮다. 새벽을 울리는 ‘꼬끼오’든 알을 낳는 ‘꼬꼬댁’이든, 이젠 분명히 내 이야기를 외칠 수 있게 됐으니까. 내 이름은 이소리가 아니라서 ‘저 소리가 아니라’로 시작하는 매력적인 자기소개법은 영영 갖지 못하겠지만, '맷 데이먼을 닮은 상냥한 사내를 알고 있습니다.'라는 말로 자기소개서를 시작할 수 있게 됐다.


우도를 나와서 얻은 집의 마당, 혼자 살고 있지만 언젠간 옆 의자에 그가 나란히 앉아있을 것만 같다.


  지금 나는 시간을 조금만 내어 걸으면, 우도가 보이는 제주의 한 읍내에서 살고 있다. 달라진 건 많지 않다. 흙 대신 자갈이 깔린 마당이 있고, 솔 님과 함께가 아닌 혼자서 커피를 마시는 벤치가 있다는 것 정도. 제주의 밤하늘은 그대로다.

  밤바람이 마당의 마른 나뭇가지들을 흔들어대는 소리가 들리면, 가끔 종종걸음으로 집을 나선다.

  김연수 작가님의 말대로, 잊힌 것들은 변하지 않고 고스란히 내 안에 남아 있어, 잊히는 게 아쉬운 일만은 아닌 게 분명하다는 걸 깨닫는 요즘. 어쩌면 아직도 제주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겐 아직 솔 님과 함께 연기를 피워 올리던 그 밤의 별과 달에게 빌어야 할 게 많이 남아있으니깐.

매거진의 이전글 정류장의 숨비소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