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10일 목요일
우리는 행선지를 바꿔 부둣가 북쪽에 위치한 레이네Reine 마을로 가기로 했다.
가파르긴 하지만 그만큼 빠르게 정상에 닿을 수 있다는 레이네브링겐Reinebringen을 먼저 오르기로 극적 타협을 본 것이다. 몇년 전 까지만 해도 가파른 릿지와 질척이는 늪지대로 이루어진 이곳은 결코 쉽게 범접할 수 없던 곳이었다. 감사하게도 최근 셰르파들이 놓은 계단이 거의 정상 부근까지 이어져 있어 한시간이면 까마득한 아래를 내려다 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이 산의 꼭대기에서 마치 오로라쇼를 1열에서 보는 것 같은 하룻밤을 보내셨다는 분의 글을 읽고 한 때 캠핑을 꿈 꾸기도 했었지만 우리가 들고 간 3인용 텐트로는 아무리봐도 피칭할 공간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하필 올해 7월부터 이 곳에서의 캠핑이 전면금지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아무래도 밀려오는 여행객들로 인한 몸살을 앓는 모양이었다. 들머리 근처에 내려, 얼른 베이스 캠프를 치고 컨디션을 살짝 회복한 뒤, 오후쯤 가벼운 차림으로 얼른 다녀오면 딱 알찬 하루가 될 것이었다.
시작은 무척 순조로웠다. 버스 시간이 다 되어갈 무렵, 혹시라도 텅 빈 정류장을 그냥 지나칠까 싶어, 조금 일찍 대합실을 나섰다. 그때, 시내 버스라기 보단 관광버스처럼 위로 높이 솟은 버스가 구세주처럼 나타났다. 원래는 물리적인 카드에 돈을 충전하는 식이었다는데 코로나 이후로 오로지 어플을 이용해서만 티켓을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미리 충전해둔 돈으로 이동할 구역을 선택하고는 티켓 구매하기 버튼을 눌렀다. 앞 문이 스르륵 열리자 기사님께 핸드폰을 보여 드리고 올라 타려는데 바로 제지 당했다. 아래 수하물 칸에 짐을 먼저 내려두고 뒷문으로 타란다. 알고보니 비대면 정책 때문에 운전자석과 뒷좌석 부분이 테이프로 막혀 있었다. 이윽고 뒷문 계단을 올라서니 높은 천정까지 닿는 커다란 차창이 눈에 들어왔다. 역시 E10도로를 달리는 로포텐 버스답다 싶었다. 땅끝마을인 ‘오'Å 에서 시작해 길쭉한 제도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며 뻗어있는 E10도로는 그 위에서 보이는 경치가 근사하기로 유명하다. 돌아가는 항공편을 로포텐이 아닌 그보다 더 위쪽에 자리한 트롬쇠Tromsø로 정한 우리는 배를 타고 들어온 남단부에서부터 차차 북쪽으로 선을 그리며 이동해야 했는데, 그 덕분에 중간중간 버스를 탈 일이 많았다. 원래 같았으면 지루했을 이동 시간은 마치 최고급 사파리 체험을 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귀한 시간이 되었다. 어찌나 눈을 사로잡아대는지 아까운 마음에 맘껏 졸지도 못하게 해 나중엔 오히려 괴로울 정도였다.
버스는 그 몇시간 보냈다고 벌써 눈에 익은 선착장을 빠르게 빠져나갔다. 드디어 본격적인 로포텐을 볼 생각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버스로 레이네 마을까지 가는데 걸리는 시간은 겨우 5분 남짓. 그러나 그 짧은 시간 동안 보고 느낀 것은 내 기억 속에 오래오래 남을 영원과도 같은 순간이었다. 코너를 돌아 도로에 진입하자마자 왼편엔 이제 막 가을빛으로 옷을 갈아입으려는 바위산이, 오른편엔 내리쬐는 아침 햇빛이 반사 되어 눈이 부시게 반짝거리는 바다가 눈 앞에 펼쳐졌다. 마침 해가 만물을 주황빛으로 물들이는 시간대였던 터라 더욱 모든 것들을 한층 더 아름답게 꾸며주었다. 뾰족한 산 봉우리 뒤로는 너무나도 비현실적이어서 가짜같아 보이는 파란 하늘이 하얀 뭉게구름과 함께 배경이 되어 주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풍광을 놓칠새라 허겁지겁 눈에 담고 있는데, 남편은 어느새 반대편 좌석으로까지 순간이동을 해 챠르륵 챠르륵 셔터를 눌러대고 있었다. 왼편 오른편이 각기 다른 매력을 뽐내고 있었기에 핑퐁 경기를 보는 관중이라도 된 듯 고개를 좌우로 움직이며 바쁘게 시선을 옮겨댔다. 그런데 창문에 얼굴을 바짝 붙이고는,
와… 미쳤다.....
소근거리듯 내뱉은 우리의 감탄사가 유일한 소음이었을 정도로 버스 안은 너무도 조용했다. 나머지 승객들은 그저 매일보는 출근길 풍경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뿐이라는 듯 조금의 동요도 없는 것이 흥분한 우리의 모습과 대비를 이루어 슬쩍 웃음이 났다. 이런 축복받으신 분들 같으니라구. 비록 집을 떠난지 채 24시간을 채우기도 전이었지만, 그간의 고생과 내내 떨칠 수 없었던 불안감이 사르륵 녹아내리며 충분히 보상을 받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자 별안간 그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 마치 슬로우라도 걸린 듯 느리게 흘러가는 듯 했다. 나지막히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번 여행.. 지인짜 고생 할 것 같긴한데, 분명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들을 얻고 가겠구나!' 영문모를 눈물이 울컥 맺혔다.
이윽고 버스는 속도를 줄여 방향을 꺾었다. 마을 입구로 접어드는 길이었다. 방향이 틀어지면서 촬영중이던 핸드폰 화면도 자연스럽게 돌아가 다음 풍경을 비추었는데, 그 때 나는 1초 동안은 진짜로 믿었다. 내가 동화 속 한가운데 들어와 있는게 분명하다고. 제목도 기억 나지않는 어렸을 적 읽었던 책이 떠올랐다. 호수 아래에 또 다른 왕국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연히 발견한 주인공이 수면 아래로 떨어져 그 속에서 긴 꿈같은 일들을 겪는 이야기였는데, 만약 이 책을 영화화 한다면 바로 이곳에서 찍어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했다. 흘러가는 것을 멈춘 듯 고요한 바닷물은 먼지 한 톨 내려 앉지 않은 매끄러운 거울처럼 푸르른 하늘과 웅장한 산 봉우리를 그리고 그 아래 옹기종기 모여있는 집들을 그대로 반사시켰다. 그 모습이 어찌나 깨끗하던지 실재와 반사면 중 어디가 진짜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완벽한 데칼코마니를 이루고 있었다. 마법같은 장면이었다.
이 글을 적으면서 슬슬 걱정이 되었다. 여행은 이제 막 시작되었는데 벌써부터 이렇게 온갖 미사여구를 쏟아내 버리면 이후에 본 또 다른 입 벌어지는 풍경들을 묘사할 단어가 남아있기는 할까. 직접 눈으로 보고 느낀 그 감정을 고스란히 표현해낼 수 있을 글 실력을 지녔다면 얼마나 좋을까.
넋을 놓고있다 제때 내리지 못할까봐 다음 정류장을 안내하는 전광판을 주시하고 있던 내가 너무 서두른 나머지 그만 한 정거장 앞에서 덜렁 내려버렸다. 앞으로 몇일 간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 레이네 마을의 중심지였다. 마을 안쪽으로 아늑하게 들어찬 바닷가 연안엔 사진으로만 봤던 빨간색 로르브어들과 보트 몇 대가 늘어서 있었고 그 모습을 덩치 큰 라이네브링겐 산줄기가 내려다 보고 있었다. 바닷가 근처 특유의 비릿한 향이 정겹게 풍겼다. 여전히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근처에 보이는 마트나 캠핑 및 낚시도구를 파는 상점, 음식점에선 아직 인기척이 없었다. 우리를 반겨주는 건 열심히 푸드덕 거리며 돌아다니는 통통한 갈매기들 뿐이었다. 예상치 않게 내렸지만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보트를 세워둔 부둣가 옆으로 잡초가 무성한 길이 길게 이어진 곳이 보였다. 그 위로 나무 기둥을 얼기설기 엮어 만든 덕장이 있었다. 여행 내내 곳곳에서 이런 건조대는 쉽게 찾아 볼 수 있었는데 우리가 있던 시기에는 뼈다귀처럼 텅 빈 채였다. 아마도 날이 좀 더 추워지면 이곳에 빼곡하게 대구 대가리가 걸려 있을 것이었다.
알고보니 이 작은 광장은 만남의 장소 같은 곳이었다. 아까 봤던 보트가 바로 레이네 마을에서 아름답기로 유명한 관광지인 부네스Bunes 해변과 홀사이드Horseid 해변으로 건너갈 때 타는 배였던 것이다. 선착장이 아니더라도 이 근방의 유일한 주유소 겸 마트인 서클케이circle K가 비교적 큰(?) 규모로 들어서 있어 이 지역을 여행하는 이들에겐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안락한 휴식처와도 같은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앞 뜰에 누구든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테이블과 나무 벤치가 놓여있었다. 이곳에서 먼저 허기진 배를 달래기로 했다. 어제까진 비가 내렸었는지 땅 군데군데 커다란 물웅덩이가 고여 있었고 의자도 짙은 색으로 푹 젖어있었다. 이번에도 역시 단열매트를 꺼내 그 위에 앉고 라면 끓일 준비를 했다. 반씩 자른 매트는 베개로도, 깔개로도 참 유용했다. 마무리로 커피까지 야무지게 타 먹었을 무렵 햇살이 점점 길어지더니 우리가 앉은 곳까지 쨍하게 내리쬐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때때로 바람은 불었고, 잠깐이라도 해가 구름에 가리기라도 하면 곧장 쌀쌀해졌기 때문에 자켓 지퍼를 목 끝까지 올려 채웠다.
캠핑을 가면 자연스럽게 우리는 분업을 한다. 남편이 텐트를 치는 동안 나는 짐을 전실에 들여놓은 뒤 이소매트와 침낭을 펴 잠자리를 보고, 남편이 음식을 만들면 나는 설거지를 한다. 당연한 수순처럼 라면을 담아 먹었던 그릇들을 들고 아까부터 봐 두었던 공중화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문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니 옆에 네모난 카드결제 시스템이 불을 빛내고 있었다. 유료 화장실이었다니. 신용카드가 따로 없는 우리는 종종 한국 은행에서 만들어 두었던 체크카드로 겨우 서비스를 이용하곤 했는데, 환율수수료가 정확히 얼마가 나올지 알 수 없어 최대한 사용을 자제하던 참이었다. 더러운 그릇을 다시 포개 놓으려니 조금 찝찝했지만 휴지에 물을 적셔 어느정도 닦아내는 것으로 일단 정리를 마쳤다. 정말 사소한 일이었지만 생각과 다르게 진행되는 상황에 마음에 슬쩍 그늘이 졌다. 그래서인지 남편은 조금 더 머물며 그림도 그리고 한껏 여유를 부리길 원했으나 나의 육감은 우선 어디에라도 빨리 텐트를 쳐야한다고 재촉했다.
한참을 구경하고, 먹고, 쉰 것 같았는데 여전히 이른 아침이었다. 어젯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하루가 무척이나 길게 느껴진 탓인 것 같았다. 한 숨 자고 레이네브링겐을 오르리라는 계획은 아직 유효하다. 짐을 풀었다 다시 질 때마다 항상 왠지 모를 비장함이 깃들었다. 이젠 정말 우리 두 다리만 믿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