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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 안 Apr 23. 2023

이쁜 죄로 말미암아

네 번째 이어짐

    그들은 못생겼다는 이유만으로 혐오받았다. 아, 단순히 「못생겼다」라는 것은 아마도 적확한 표현은 아니겠지. 아무튼 쥐의 생김새에는 보는 이로 하여금 소름이 끼치게 하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여느 동물에게나 있는 털이고, 꼬리이며, 네 발이니, 아마도 그것의 유무 자체가 문제는 아닐 터. 문제는 그것의 디테일 - 빽빽하게 까칠해 보이는 새까만 털과 지렁이마냥 마디져있고 길고 가늘게 움직이는 꼬리를 달고 있는 쥐가 네 발로 다다다다 경박하게 움직이는 그 생김새 - 그것의 종합적인 무언가, 그 자체인 것이다. 그렇게, 순전히 그 생김새 때문에, 세상은 그들을 골목으로, 지하로, 밤으로 밀어냈다. 그들을 품어준 것은 어둠밖에 없었다. 어둠은 그들에게 구원의 한 줄기 빚과 같았다.


혐오를 정당화하려 그들의 위생상태를 이유로 드는 것은 비겁한 행위였다. 쥐들의 위생이 문제가 된 것은 그 뒤의 일이었으니까. 누구라도 그런 환경에서는, 그런 상태가 될 수밖에 없다. 따지고 보면 쥐들은 그런 곳에 살도록 강요된 피해자들인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죄인 취급을 받았다. 그것도 너무 오랜 시간을 죄인으로 사는 바람에 이제는 밝은 세상에는 당연히 한 발자국도 디뎌서는 안 되는 존재가 되었다. 어둠이라는 감옥 속에 철저히 갇혀있으면서 그 감옥 속에서라도 그나마 자유로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쥐가 만약 인간의 불빛이 나오는 창가 앞에서 알짱거리고 있었다면 그것은 가히 죽음을 무릅쓴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무리 어두운 밤 중이었더라도 말이다. 어느 한 쥐가 죽음을 무릅쓰고 불이 새어 나오는 어느 한 반지하 방의 창문 너머에 놓여있는 한 점의 그림 앞에 앉아 있었다.


    쥐가 <장미>를 처음 본 것은 가을이었다. 여느 때처럼 낮엔 폐가의 깊숙한 구석 어딘가의 그림자 속에서 쪽잠을 자며 날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가, 사람들과 맹수들이 길거리에 뜸해졌다 싶으면 거리의 구석구석을 뒤지러 나왔다. 쥐에게는 상대적으로 그가 마주하는 세상 대부분의 동물들이 맹수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열심히 먹을 것을 찾다가 어떤 골목의, 어떤 반지하 방의 창문 너머로 빼꼼히, 그 그림을 보게 된 것이었다. 그것은 빛나고 있었다. 가난의 악취가 가시질 않고 무기력의 그늘이 무겁게 내려앉은 이 골목에, 그리고 이 모든 것 중에서도 최저점인 「쥐」라는 자신 앞에서, 그 그림은 붉게, 강렬하게, 활짝 빛나고 있었다.


그림의 대부분은 억세면서도 품위 있는 초록색 줄기와 잎이 메웠고, 정가운데에는 장미꽃 한 송이가 활짝 피어있었다. 툭 건드리면 언제든 쿵쾅쿵쾅 뛰기 시작할 준비가 되어있는 심장처럼 생명력이 넘쳐나는 붉디붉은 장미의 꽃송이었다. 그림에서 진한 장미향이 날 것만 같았다. 고혹스럽고, 매혹적이었다. 또한 그림에는 화사하면서도 강렬한 여름이 담겨있었다. 지금이 여름임을 암시하는 매개체 하나 없이, 장미 위를 감싸는 빛의 표현만으로 여름의 기운이 그림에서 뿜어 나오는 것은 온전히 화가의 재능이었다. 그것은 확실히, 장미다운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는 그림이었다.


“너는 누구니?” 쥐는 창문너머의 그림에게 조심스레 창문 가까이 다가가 물어보았다.

그림은 약간은 귀찮다는 어투로 대답했다. “내 이름은 <장미>야.”

“<장미>” 쥐는 혼잣말로 되새기며 말했다. “너는 장미라는 꽃이야?”

“아니 아니, 나는 꽃이 아니고 사람이 그린 그림이야. 장미라는 꽃이 그려진, <장미>라는 이름을 가진 유화 그림이지. 대충 92 센티에 73센티 크기의 캔버스에 말이야.”

“센티? 캔버스?”

장미는 쥐를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았지만, 그래도 누군가가 마침내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준다는 것이 속으로는 매우 기뻤기 때문에 마지못한 듯 성실히 대답해 주었다. “그래, 그건 내가 그려져 있는 본래는 공백이었던 이 천의 크기를 뜻하는 거야.”

“<장미>야, 넌 정말 아름답다. 그리고 정말 똑똑하구나. 나는 공백이라던가 그런 것은 잘 몰라. 하지만 너를 그린 사람이 정말 대단하다는 것은 알겠어! 나는 네가 진짜 꽃인 줄로만 알았어. 그리고 난 여태 너같이 이쁜 꽃은 본 적이 없었지. 이곳을 보라고, 이 가난한 골목엔 온통 쓰레기밖에 없어. 제대로 된 건강한 풀 한 포기도 자라기가 쉽지 않지. 하지만 <장미>, 넌 아마 진짜 장미보다도 더 아름다울 거야. 난 장미를 본 적은 없지만 말이야.” 쥐는 황홀한 눈빛으로 <장미>를 바라보며 그에게 말했다. 그것엔 일말의 망설임도, 부끄러움도, 거짓도 없었다.

느닷없는 대찬 칭찬에 <장미>는 살짝 당황하였지만, 그는 짐짓 태연한 척을 하려 오히려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런 건 다 소용없어.”


"그래, 나를 그린 사람은 확실히 대단한 실력을 가진 화가인 것은 맞아. 그림을 정말 잘 그리지. 하지만 요즘 세상엔 「그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한 거야. 단순히 그림을 사실적으로 잘 그린다는 것 외에 말이야."

<장미>는 어느 어린 화가가 여름에 갓 그린 그림이었다. 가을이 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았으니, 사실 <장미>는 나이에 비해 굉장히 조숙하고 현실적인 편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봤자 난 그림이니까. 이제 그림이란 것은 얼마나 잘 그렸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요즘 세상이 그렇게 됐어. 가치의 기준이 바뀌어 버린 거야. 그런데 나를 그린 화가라는 사람은 그런 것도 모르고 줄곧 나 같은 진짜 같은 그림만 주구장창 그리고 있어. 그러니 복창 터질 일이지. 그래, 물론 그에게 그림을 그리는 재능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어. 하지만 그걸로는 안돼. 그걸로는 유명해질 수 없다고.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그래, 말하자면 꽃을 피우는 것과 같은 거야. 봐주는 이가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지. 그러니까 어떻게든 유명해져야 해. 그러려면 스토리가 있어야 하고, 철학이 있어야 하고, 특별해야 해.”

생각보다 많은 말을 한꺼번에 쏟아내는 <장미>에게 조금 놀랐지만 쥐는 잠자코 들어주었다.

“설사 철학이 없다거나 특별하지 않더라도, 그런 건 얼마든지 「그런 척」 할 수 있어. 누구든 그런 식으로 출세하고 있어. 그러면 그가 그린 그림들은 점을 찍거나 선 몇 개만으로도 값비싼 값에 팔려서 멋진 공간에 걸린 채 평생을 살 수 있을 텐데. 왜 나를 그린 사람은 그걸 모르는 걸까. 난 애초에, 그가 그림을 시작했어도 안 됐었다고 생각해. 가난한 주제에 말이야. 왜 굳이 화가가 되어서 나까지 도대체 언제까지 가난하려고 이렇게 고집을 피우는 걸까. 이러다가 난 어디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 벽에나 걸리게 생겼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지.”


쥐는 자주 이런 생각을 했다. ‘나도 「이렇게까지」 못생기지 않았다면 어두운 곳에서 살고 하수구를 전전하면서 쓰레기를 먹고 질병 따위를 옮긴다거나 하지 않았을 텐데. 적어도 「비둘기 정도」만 됐다면… 그냥 내가 알아서 사람들을 비껴가며 살 정도만 됐다면 좋았을 텐데.’ 이제는 돌이킬 수도 없게 됐다. 어차피 쥐들은 빛 속에서 사는 법은 이미 잊어버린 지 오래도 한참 오래다.


그러니 쥐는 쉽사리 이해하지 못할 <장미>의 마음이었다. 이렇게나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서도 그렇게나 불행한 마음을 품고서 살아갈 수 있다니. 하기사, 아름다움으로 따지자면 확실히 <장미>는 자기와 같이 이런 가난한 골목에 있을 아이가 아니었다. 그러니 <장미>가 저렇게 자신의 환경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의 화가에 원망스러운 마음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 걸까. 하필이면 이런 곳에 굳이 이렇게나 아름답게 그려져서, 어쩔 수 없이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욕망을 갖게 되는 것도 저주라면 저주인 걸까. 이쁜 죄로 말미암아 평생을 고통 받겠구나. 쥐는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것이 자신의 잘못은 아니었음에도. 동시에 영원히 지지 않을 꽃이 그에게 생겼음이 너무나 기뻤다.


    쥐는 한평생 <장미>만큼 좋은 것은 보지 못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적어도 <장미>를 처음 보았을 때 그가 느꼈던 정도의 충격은 두 번 다시없을 것이다. 그날 이후 쥐는 매일 밤 <장미>를 찾아갔다. 그리고 둘은 매일 밤 많은 대화를 축적해 나갔다. 쥐는 대화를 통해 <장미>가 자신이 그저 그림이라는 것에 대해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은 언제까지나 가짜라는 것이다. <장미>는 곧잘 화가가 자신을 그릴 때 피사체로 삼았던 「진짜」 장미에 대해서, 그것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이야기하곤 했다. 그것이 얼마나 붉었는지, 얼마나 고혹스럽고 매혹적이었는지, 그것이 얼마나 장미다웠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쥐는 <장미>에게 너 또한 그렇다고 말해주었지만 그는 들으려 하지 않았다. <장미>는 그저 진짜 장미를 다시 보는 게 소원이라고 말했다.


“내 화가가 유명해지면 전시회를 열게 될 거야. 그러면 장미를 볼 수 있게 될 텐데… 사람들은 축하의 의미로 장미를 선물하니까.”

“<장미>, 그게 네가 기어이 유명해지려는 이유였던 거야?”

쥐는 <장미>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단순히 네가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장미>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달리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은 쥐에게 긍정의 침묵으로 들렸다. 쥐는 <장미>가 더 좋아졌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찾아왔다. 겨울의 추위는 가난한 골목일수록 더 유난한 법이다. <장미>는 벌써부터 앞으로 자신이 평생 마주하게 될 이 청승맞은 골목의 겨울에 몸서리쳤다. 이제 고작 첫 번째 겨울임에도. <장미>의 짜증이 늘어날수록 쥐는 안절부절못했다. 그리고 점점 야위어만 갔다. 다른 쥐들은 그런 쥐를 보며 혀를 끌끌 찼다. 겨울은 안일한 쥐들에게 절대로 자비롭지 않을 것이다. 저렇게 유리창 너머의 한 장의 그림 따위에게 정신이 팔려있을 때가 아니란 말이다.


하지만 <장미>는 쥐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감을 주었고, 쥐는 그것을 계속 느끼기 위해서라면 아까운 것은 전혀 없었다. 쥐의 행복은 <장미>에게 달려있었고 오히려 그것은 쥐에게는 자신의 행복의 조건이 간단해지는 일이었다. 그래서 쥐는 결심이 섰다. <장미>에게 그가 그렇게 그리던 장미꽃을 가져다 주리다.


    마을의 서쪽으로 가는 것은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사람들이 많은 곳엔 먹을 것이 많은 만큼 수많은 위협이 도사리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쥐는 똥도 쥐똥만큼 싸고 꼬리도 쥐꼬리만 하니 그렇게까지 위험을 감수해 가면서 먹이를 구하러 다닐 필요가 여태껏 없었다. 더구나 하수구는 쥐에게도 달갑지 않은 곳이었다. 아무리 쥐라 해도 더러운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쥐라 해도 비참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장미의 아름다움을 알고 있는 쥐라면 특히나 더 그럴 것이다.


장미가 있다는 어느 공원의 돌담 외벽에 최대한 가까운 하수구 입구를 수소문해 도착하니 마침 딱 해가 지는 중이었다. 딱 해가 진 오후에 출발하였으니 꼬박 하루가 걸렸다. 어쩌면 더 걸릴 수도 있었던 것을 길을 많이 헤매지 않은 덕분에 빨리 올 수 있었다. 거의 쉬지 않고 달린 탓에 쥐는 기진맥진한 상태였지만 본인의 상태를 알아채지도 못할 정도로 흥분한 상태였다. 장미는 과연 얼마나 이쁜 꽃일까. <장미>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더없이 고혹하고 매혹적이며 도도한 꽃일까. 정말로 그렇게나 독보적인 것일까. ‘장미는 정말로 <장미>보다 더 대단한 꽃일까?’ 물론 어떻다 해도 쥐는 그 장미를 어떻게든 <장미> 앞에 가져다 놓을 생각이었지만.


하지만 쥐는 장미를 본 순간 자신이 「어떻게든」 해볼 수 있는 범주를 한참 벗어났다는 것을 바로 깨달았다. 장미는, 단순히 장미의 꽃송이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나 당연한 것을 왜 단 한 번도 고민해보지 않았을까. 깊숙이 박힌 뿌리부터 저 위로 하늘까지 뻗어있는 줄기와 날카로운 가시들, 그리고 여기저기 애처롭게 달려있는 잎들 까지도, 이 모든 것을 쥐 혼자서 옮긴다는 것은 애초부터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장미는 이미 시들어 있었다. 그것은 분명 쥐가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아름다운 장미를 기대하고 있을 <장미>에게 죽어있는 장미를 가져다 바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누구보다 장미다웠던 당당한 장미의 삶이었기에, 져버린 채로 바싹 말라버린 모습조차 아름다워 보였지만 <장미>가 과연 그걸 이해해 줄 수 있을지 쥐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이걸 어쩐다…’ 눈앞이 캄캄해져서 멍하니 장미를 보고 있자니 장미에 웬 열매 같은 것들이 매달려 있는 게 쥐의 눈에 띄었다.


    ”장미꽃이 지고 나면 꽃받침이 점점 커져서 열매가 맺히지. “ 갑자기 웬 이름 모를 새가 쥐도 새도 모르게 날아와 쥐 옆에 앉으며 말했다.

쥐는 하늘에서 나타난 느닷없는 맹수의 출현에 너무나 놀란 나머지 뒤로 자빠져버렸다.

“어이쿠, 이거 미안하게 됐네.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네만-” 이름 모를 새가 쥐에게 말했다. “다만 장미에 대해서 궁금해하는 것 같아서. 아, 걱정은 마시게- 나는 고기는 질겨서 잡아먹지 않으니까 말이야.”

쥐는 경계를 하며 묘하게 생긴 이름 모를 새의 눈빛을 들여다보았지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하긴, 자신을 잡아먹고자 했다면 진작에 잡아먹었을 것을, 굳이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겠지. 쥐는 용기를 내어 새에게 물었다.

“저것이 장미의 열매라면, 그 안에 장미의 씨앗도 있는 건가요?”

“물론이지. “ 이름 모를 새는 마치 퀴즈쇼의 진행자가 정답을 외치듯 대답했다.

왠지 장미에게 열매가 열린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긴 했지만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것이다. 열매가 없다면 달리 어찌 씨앗을 퍼뜨리겠는가.

”장미 열매라는 건 아마 생소할 거야. 그도 그럴 것이, 장미들은 「이쁜 죄」로 보통 열매가 맺히기 전에 싹이 잘려버리니까 말이야. 아니면 대부분은 장미의 꽃에만 너무 열중한 나머지 보통 꽃이 지고 난 뒤의 이야기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단 말이지. “ 이름 모를 새가 마치 쥐의 생각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이쁜 죄」로 죽는다니, 「못생긴 죄」로 평생을 어둠 속에서 쥐 죽은 듯이 살아온 쥐로서는 상상도 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하필이면 <장미>가 불행한 이유보다도 훨신 더 극단적이지 않은가!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름 모를 새가 오른쪽 눈썹을 치켜뜨며 의아한 듯 말했다. “이 장미는 열매가 너무 빨리 맺혔어. 꽃이 지자마자 바로 이렇게 열매가 맺히는 건 나도 처음 봐.”


    조그마한 쥐가 챙길 수 있는 열매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하나였다. 처음 길을 나서며 <장미>에게 꼭 장미 하나를 가져오겠다던 자신이 얼마나 무모했는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열매를 입 안에 지그시 물고 <장미>가 기다리고 있는 골목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쥐의 가슴은 벅차올랐다. ‘이걸로 드디어 <장미> 네가 진짜 장미를 다시 볼 수 있을 거야. 너의 화가가 유명해지지 않아도 너는 이제 행복할 수 있는 거야. 장미는 이미 다 져버려서 내가 가지고 올 방법이 없었어. 하지만 이것이 장미의 열매고 이 안에는 장미의 씨앗이 있대. 이걸 심으면 내년 봄에 싹을 틔우고 여름이 시작될 즈음엔 장미꽃이 피어나는 것을 직접 볼 수 있을 거야. 어때, 멋지지 않아?‘ 쥐는 장미의 기뻐하는 얼굴이 얼른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쥐가 장미를 가지러 간 날 밤, 어린 화가는 술냄새를 풍기며 그의 반지하 방으로 들어와 프레임이 없는 매트리스에 벌러덩 대자로 쓰러졌다. 두 눈은 크게 떠있었다. 방안의 여기저기에 있는 <장미>를 포함한 수십 점의 그가 그린 그림들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웬일로 그에게서 비싼 술냄새가 난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던 화가는 결심이 선 듯 갑자기 상체를 일으켜 세우고 매트리스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우선 커피를 내리는 일부터 시작했다. 밤 11시였다. 커피가 내려오는 동안 그는 방 안을 돌면서 바닥에 널브러져 있거나 벽에 기대어 있는, 혹은 선반이나 서랍장 위에 올려져 있는 그가 이제껏 그렸던 모든 그림들을 하나하나 모으기 시작했다. 창문 앞에 놓아두었던 <장미> 역시 빠뜨리지 않았다.


화가는 이젤 앞에 놓인 스툴 위에 앉아 방금 내린 뜨거운 커피를 호호 불어 한 모금 마셨다. 그림들을 이렇게 모아보니 그래도 그동안 자신이 꽤나 열심히 그려오긴 했구나 하는 생각이 화가는 들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다시 내쉬었다. 방 안이 얼마나 추웠던지 입김이 하얗게 나올 정도였다.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그리고 허리를 곧게 펴고 이젤을 바로 마주해 앉았다. 하필 집어든 그림이 <장미>였다. <장미>를 이젤 위에 놓고 그 위에 자신이 칠했던 결 그대로 덧칠을 하기 시작했다. 화가가 풀어놓은 물감은 오로지 검정뿐이었다.


화가는 밤이 새도록 그림에 몰두했고, 반지하의 창문으로 아침 햇빛이 들어올 때쯤에야 작업은 끝이 났다. 차갑게 식어버린 커피를 들이키며 바라본 <장미>의 캔버스 안에 더 이상 여름은 없었다. 대신 어둠이 가득했다. 화가가 기존에 자신이 그렸던 그림의 결을 그대로 살려 세심하게 덧칠을 했기 때문에 <장미>의 꽃송이와 줄기 등의 윤곽은 어렴풋이 확인할 수 있었지만, 모든 것은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그리고 화가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그림의 이름을 <밤 장미>로 고쳐 썼다.


이것을 시작으로, 그의 나머지 그림들도 같은 수정 과정을 거치게 될 것이다. <방>은 <불 꺼진 방>이 될 것이고, <바다>는 <밤바다>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앞으로 모든 그림을 이렇게 그리면 된다. 어차피 검은색으로 덮을 그림을 처음에 굳이 정성 들여서 제대로 그리는 것이다. 그것이 포인트다. 그렇게 「스토리」를 만들면 어떻겠느냐는, 그의 재능을 알아본 어떤 한 부호에게 받은 제안이었다. 「어둠을 그리는 화가」. 그는 그런 「예술」을 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홍보될 것이다. 그의 그림은 이 가난한 골목을 벗어나 <장미>의 소원대로 어딘가 좋은 동네의 좋은 갤러리에 걸리게 될 것이다. 며칠만 생각해 보겠다고 했지만, 사실 그것을 뿌리칠 힘이 화가에게는 없었다. 화가는 더 이상 자신의 재능만으로는 자신의 꿈을 좇을 힘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구원받았다고 덩실덩실 춤이라도 춰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어떤 화가들은 아예 처음부터 그림보다 「이런 것」이 목표인 경우도 있으니까.


결심이 서자 지체할 것도 없었다. 좁디좁은 반지하 방에 구겨 넣은 이젤과 매트리스만 빼면 짐도 거의 없어 방을 비우는 데에는 몇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그림들을 보자기에 싸서 트럭 위에 싣고 자신의 새로운 작업실로 향했다. 화가는 앞으로 그곳에서 어둠을 팔아 자신의 인생을 밝히며 살 것이다.


    <장미>는 그렇게나 간절했던 것이 누군가의 개입으로 이렇게나 간단하게 풀린다는 것에 실소가 나왔다. 자신의 새로운 모습은 - 처음엔 충격이었으나 - 이 어두운 골목만 벗어날 수 있다면 어찌 되든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자신은 밝은 조명 아래에 걸릴 것이다. 겨울에도 춥지 않을 것이며, 언제나 적당한 습도와 알맞은 온도가 유지될 것이다. 마치 온실 속의 장미처럼 귀한 대접을 받게 되겠지. 그리고 그곳에서는 줄기를 적당한 길이로 자르고 가시를 손질하여 이쁜 다발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장미꽃들을 사람들이 주고받는 멋진 광경을 자주 볼 수 있을 것이다.


    쥐가 장미 열매를 입 한가득 품고 자신의 골목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은 밤이었다. 이틀을 아무것도 먹지 않고 쉬지 않고 달린 쥐는 탈진상태였다. 그럼에도 그는 그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장미>에게로 곧장 달려갔다.


웬일인지 이 시간대면 항상 켜져 있던 반지하의 불이 꺼져있었다. 그리고 창문 앞에까지 가보아도 <장미>는 온데간데없었다. 쥐는 방 안을 들여다보았지만 불 꺼진 방 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바람이 쌩 불었다. 그제야 쥐는 자신이 얼마나 추운지 깨달았다. 쥐는 일단 창이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기다려보기로 했다. 흙에 몸을 최대한 파묻고 어떻게든 추위를 견뎌보려 했다.


쥐는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그 화가의 방에 불이 켜지기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쥐의 생에는 어둠만이 한 줄기 빛이었거늘, 진짜 빛을 기다리게 된 지금의 그는 예전과 얼만큼이나 다른 목적의 삶을 살게 된걸까. 어두운 골목의 겨울은 약해진 상태의 그에겐 너무나 추웠다. 땅 속으로 아무리 파고 들어가 보아도 크게는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내 미뤄왔던 졸음이 쏟아지며 정신이 혼미해졌다.


    겨울은 쥐를 새하얀 눈으로 덮어주었다. 봄은 눈을 녹여주었다. 그리고 어느 한 여름날, 쥐가 있었던 자리에서 어린 장미가 불쑥 싹을 틔웠다. 작지만 억세고 고고한 자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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