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문학 | 칼럼
매일같이 수많은 혐오 댓글이 쏟아지고 있다. 그 뒷배에는 혐오를 선동하는 정치인들과 황색언론, 사이버 렉카가 있다. 혐오는 모든 영역에서 차별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작금의 혐오는 신자유주의가 불러일으킨 불평등과 반지성주의가 원인이다. 혐오집단은 혐오 표현을 통해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것일까? 그리고 왜 타인의 존재를 지우려고 하는 것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 글은 혐오의 발현됨을 이해하고자 쓰였다.
타인을 좋아하는 데는 크게 세 가지 경우가 있다. 첫째, 그 대상에게서 자기 모습을 보거나 둘째, 자신의 부족한 점을 메꿔줄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셋째, 상대방이 활용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 그렇다. 혐오집단 안에서도 다를 게 없다. 혐오가 감정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대중은 선동가에게서 자신의 이면을 본다. 여타 선동가가 공적 영역에서 혐오 표현을 하면 비윤리적이라고 해도 얼마만큼 신경 쓰지 않으며,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구나, 저렇게까지 해도 되는구나!’ 생각한다. 혐오집단에 혐오선동가는 돈을 잘 벌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별 판단 없이 습득할 수 있는 정보를 주는 유익한 사람이다. 혐오선동가는 수익 창출 말고도 자신이 대중에게 그릇된 방법이라 할지라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에 관해 인정욕구까지 충족하고 있다. 성공의 요건인 명분과 실리를 거머쥐었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그렇기도 하다. 그러므로 혐오에 습관화된 이들은 혐오선동가를 믿는다.
혐오는 자존감이 낮을 때 일어난다. 혐오에 익숙한 이들은 자신의 고통을 사회 원인과 결부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갖가지 사회 문제의 여파는 자기가 감내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자기기만과 자기파괴에만 익숙하다. 문제는 그에 따른 '선택적' 분노다. 혐오는 분노로 발현된다. 화가 나면 뭣도 안 보이고 외곬으로 빠지게 된다. 스스로 정의롭다고 느끼고 불의와 맞서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혐오하는 내내 분노를 통해 즐거워한다. 불확실하고 불안한 삶 속에서 분노만큼 자명하다고 생각하게끔 해주는 것도 없다. 이때만큼은 내가 우위에 있는 것 같고 그것이 정당한 것처럼 느껴진다. 자아존중감이 고양되는 것이다. 하지만 분노는 단지 생각을 마비시킬 뿐이다. 신세한탄 또는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해 희생양을 찾는다. ‘강약약강’이다. 애먼 사람들에 대고 분노하며 끊임없이 책임을 전가하려고 한다. 그들의 분노는 소수자의 존립을 위협한다. 국적, 난민, 장애, 성별, 성적지향, 성 정체성 등 자신의 언어가 미비하고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이들을 집중적으로 공격한다.
혐오집단에 표현의 자유는 자기합리화의 수단이 될 수 없다. 표현의 자유는 소수자들의 의견을 들을 때 유효하다. 그들은 사회에서 자신의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기에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다. 소수자에게 표현의 자유는 그 자체로 증언이다. 하지만 혐오 세력은 소수자의 목소리를 들을 생각조차 없다. 역차별의 보편적 유형을 보라. “왜 그들을 이해해야 해? 안 힘든 사람이 어디 있어? 다들 묵묵히 일하고 있는데 모난 행동 하면 안 되지. 뭐를 바라는 것 자체가 특권인 걸 모르나 봐. 다수에게 피해를 주지 마”라고 말하며 차별에 관한 정당성을 가지려고 한다. 혐오집단을 선동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설득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외려 자신이 피해자 정체성을 가지며, 이로 하여금 비도덕적 행태를 감춘다. 분노를 전유하는 자들이다. 진실은 중요치 않다. 쉽게 휘발되는 화를 보충하고 사는 것만이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혐오집단을 특정할 수 있는 것일까?
논리는 문화 자본이기도 하다. 이 주장에 근거해서 보면 한편으로, 혐오를 전유하는 자들 즉, 저소득 계층이 분노에 기대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시간에 쫒기고 대출 상환하기도 빠듯한데 언제 사회문제를 깊이 보고 소수자의 처지와 현실에 공감하겠는가? 혐오선동가들의 감언이설에 속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자극적인 콘텐츠는 소위 땔감을 제공한다. 그래서 분노가 유약한 삶을 유지하는 활력소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혐오는 계급 문제로만 한정 할 수 없다. 두 번째, 문제의식 측면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이는 사회에 관한 부채감 또는 그릇된 체제에 관한 부정본능이기도 하다. 문제의식에 있어서 지적게으름은 용인 될 수 없다. 혐오한다는 것은 민주시민으로서 직무유기이다. 하지만 이렇듯 이성적 사고만 하고 산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사회구성원의 계급이나 문제의식 유무와 상관없이 누구든 혐오를 할 수 있다. 요컨대 문제는 교육이다. 건강한 교육의 부재가 문제다. 교양과 철학이 배제되었다는 뜻이다. 사회구성원들의 생각 없음의 만연은 학벌주의의 결과이다.
입시의 주요 목적은 변별력이다. 학생이 스스로 생각하게끔 만드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경쟁시킨다. 그래서 우리는 학교에서 그리고 시험에 앞서 자신만의 생각을 가져 본 적이 없다. 식민지 이후부터 공교육은 파행의 연속이었다. 줄곧 국민은 주체가 아니라 계도할 대상이었다. 생각 없음의 만연은 대물림되었고, 공연히 돈이 실력인 세상이라고 말하며 살아가는 지경에 이르렀다. 학벌주의는 급격한 자산 격차로 인한 좌절을 동반하기도 한다. 가혹한 경쟁에 따른 정서적 불안을 해소하는 것조차 벅찬데 높은 등록금과 만성적 구직난도 해결해야 한다. 구조적 문제에 관한 산발적인 불만은 영원히 도태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운 마음에 가로막혀 행동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공정만 부르짖는다. 공정성 담론은 불평등에 저항하지 않을 테니 시험 결과에 따라 차등 대우해달라는 말과 다름없다. 연대는커녕 능력이라는 미명 하에 헐뜯고 자리싸움할 줄밖에 모른다.
요즘 초등학생의 장래 희망 상위권에는 엔터테이너, 크리에이터가 있다. 의사, 교사도 있지만 소위 대박을 터트릴 수 있는 직업을 갖고 싶어 한다. 건물주가 최고의 꿈인 것도 변함이 없다. 열심히 살아야 잘 사는 시대가 아니고 잘 살아야 잘 사는 시대이다. 단기간 고수익을 추종하는 사회 분위기를 보라. 자산 격차가 심화하니까 불로소득만이 해결방안처럼 보인다. 투기, 지대추구가 일상에서 매일 회자되고 있다. 각자도생, 대관절 돈만 추종하는 시대는 낙오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과 자책에 떠밀고 있다. 자기효능감은 계속 낮아질 수밖에 없고 청소년뿐만 아니라 전체 연령대에서 자살 충동집단은 해마다 늘고 있다. 사회로 향할 분노는 고스란히 소수자에게 전가되고 있다. 타인의 처지를 헤아리는 것도 공부인데, 학교에서 가정에서 사회구성원으로서 이를 배우지 못했다. 반성적 성찰은 요원해 보인다.
혐오한다고 인정치 않는다고 해서 자신의 내밀한 부분까지 속일 수는 없다. 왜 스스로 가혹하고도 고달픈 굴레에 빠져 사는 것일까. 이들의 자기합리화와 방어기제를 어떻게 녹일 수 있을까. 자신에게 비롯된 문제를 직시할 필요가 있다. 스마트폰을 놓고 스스로 생각하는 시간들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정치를 계산의 영역이라고 생각지 말고 소수자와 연대해야 한다. 이것이 각 개인에게 요구되는 사회적 책임이다. 앞서 말했듯이 혐오집단은 설득이 어렵기도 하다. 인간의 편견과 혐오는 차별행위를 넘어서 증오범죄와 집단학살까지 일으킨다. 혐오집단은 혐오할 자유를 타협할 거리라고 생각하고 자신들의 주장을 존중해달라고 말하지만, 혐오할 자유는 없다. 곳곳에서 이루어지는 혐오 표현을 무턱대고 막을 수는 없지만 말이다. 파시즘의 전조는 매사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뉘른베르크 전당대회 같은 파시스트들의 메스게임이 한국에서 벌어지지 않을 이유가 없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법으로써 강제해야 한다. 차별금지법은 수년간 국회에 계류 중이다. 건강한 사회를 꾸리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법안이다. 조속히 통과되어야 한다. 우리 모두가 힘을 합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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