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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ily 케일리 Dec 06. 2022

밑 빠진 독도 물을 담을 수 있다.

영화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리뷰

서동요 기법을 인정하게 된 건, 정확히 이 영화를 제값 주고 결제한 뒤였다. 집요한 SNS 마케팅 덕에 기다란 제목을 토씨 하나 빼먹지 않고 정확히 외웠다. 홍보는 대체로 일본 소설이지만 한국에서 흥행했고, 그 덕에 일본에서 영화로 제작됐다는 내용이었다. 실제로 이 작품에 관해 얘기하는 지인을 본 적 없다. 하지만 그 마케팅으로 작품을 알게 됐다는 지인은 넘치는 걸 보니, 서동이 선화 공주를 얻을 만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이 메인 디시인 영화보다, 커다란 사건 옆 사이드 메뉴로 감질나는 로맨스만 선보이는 영화를 좋아한다. 그러니 평소대로라면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를 극장에서 볼 일은 없었을 것이다. 부산국제영화제에 갔을 당시 이 영화가 야외극장 상영작으로 걸렸었다. 야외 영화가 보고 싶어 예매했는데, 다른 일정과 겹쳐 1시간만 보고 나와야 했다. 아예 모르는 내용이면 모를까, 절반만 알고 결말을 모르는 작품이 생기다니. 모양만 만들어 둔 베이킹 반죽 보는 기분이었다. 맛이 없을지언정 일단 이걸 구워서 먹어야만 했다.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카미야 토루에 대해 잊지 말 것”
 
자고 일어나면 전날의 기억을 잃는 ‘선행성 기억상실증’에 걸린 소녀 ‘마오리’ “내일의 마오리도 내가 즐겁게 해줄 거야"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는 무색무취의 평범한 소년 ‘토루’

매일 밤 사랑이 사라지는 세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날 서로를 향한 애틋한 고백을 반복하는 두 소년, 소녀의 가장 슬픈 청춘담


시놉시스를 얼핏 읽으면 판타지일 것 같지만, 이 영화에 판타지는 없다. 선행성 기억상실증에 걸린 여주인공 히노 마오리와 남주인공 카미야 토루가 위장 연애를 한다. 마오리의 비밀을 알고도, 잊힐 걸 알면서도 매일 그녀에게 행복한 기억을 주고자 최선을 다하는 토루. 그리고 이들의 사랑을 굳건히 지켜준 마오리의 친구 와타야 이즈미가 있다. 아픈 친구를 위해 고군분투하고 속앓이하는 이즈미는 영화 <20세기 소녀> 속 연두를 위해 달리던 보라를 떠오르게 한다.


나무 한 그루보다 숲에 의미를 두고 싶었다. 오늘의 성과에 집착해 전전긍긍하지 않고, 오늘을 발판 삼아 내일은 한 칸 올라가길 기대했다. 가랑비에 옷 젖듯 발전하는 게 뿌듯했다. 그런 가치관을 갖고 바라보니 마오리는 밑 빠진 독이었다. 그녀의 대사 중 “내 속에는 어제의 내가 남지 않는다.”라는 대사가 있다. 절대 물을 채울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매일 물을 부어야 하는 게 무슨 기분인지 가늠조차 안 됐다. 하지만 세상에 헛된 노력은 없다는 교훈이 이 영화에도 녹아있다.


밑 빠진 독은 물을 모을 수 없다. 그럼에도 덕분에 이 독은 촉촉해지고, 흥건해진 바닥을 보며 누군가 나를 채워주려 노력했음을 안다. 그리고 가끔은, 물이 조금이라도 고여있길 바라며 항아리를 끌어안고 버틸 두꺼비가 온다. 마오리의 기억이 되어준 것들에 눈이 갔다. 그녀의 손끝에 토루를 심은 그림, 두꺼비가 되어 곁을 지킨 이즈미, 그리고 또 하나의 두꺼비였을 마오리의 일기장. 일기를 쓰지만 한 번도 애정을 담아 기록한 적 없다. 그저 그날의 생각을 남기는 데 급급했던 일기의 가치를 돌아보게 됐다. 추억은 기록하는 만큼 더 생생히 일기 안에서 살아 숨 쉰다. 영화는 오늘이 그리울 내일을 위해 좀 더 소중한 일기를 쓰고 싶다는 욕구를 자극한다. 역시 아날로그 감성의 상기와 미화엔 일본 영화만 한 게 없다.


다만, 최근 사랑 영화를 보며 아쉬웠던 점을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마저 피해 가지 못했다. 요즘 로맨스에는 갈등이 없다. 전쟁, 납치 등 생이별로 사랑에 장애물이 생기지, 감정선에는 위기가 닥치지 않는다. 첫사랑은 모든 게 처음이기에 풋풋하지만, 그만큼 서툴러서 이루어지기 힘들다고 한다. 영원히 변치 않는 애틋함을 위해 영화계가 택한 방식은 주인공의 사망이다. <20세기 소녀> 속 풍운호의 죽음을 보며 황당하고 불쾌했다. 그런데 토루가 일본의 풍운호를 자처하듯, 갑작스레 심장병이라며 이 세계에서 사라져버린다. 맛있는 음식도 아까워서 놔두면 상하기 마련이다. 향이 좋다고 병에 담아둔들 평생 가는 게 아니다. 첫사랑을 그 시절에 가둬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연스레 시간이 흐르며 맞는 결말을 원한다.


인스턴트 기억력을 갖고도 마오리는 매일 행복을 찾아 나섰다. 머리가 외면한 오늘을 손이, 가슴이 기억했다. 머리까지 힘내고 있는 내 마음은 오죽할까. 온몸이 더 많은 걸 기억하고 무언가를 그려 나가겠지. 선명하고 확실한 행복을 위해 노력해야겠다. 온몸 구석구석이 행복을 느끼고 각인시키도록. 


내 독은 가득 찬 물로 풍족함을 느끼는 독이길. 그 행복이 넘쳐서 감당 못할 즈음엔 다른 독과 물을 나눌 여유가 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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