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철두철미한 일처리와 새벽이면 일어나 일본어 공부를 하고 틈틈이 중국어 공부도 하며 신문을 좋아하고 시사에 대해 밝으시다.
엄마가 돌아가시기까지 나와 함께 10년이 넘는 병간호를 직접 하셨으며 아내에 대한 사랑이 끔찍하신 분이다. 또한 음식도 절대 과식하지 않고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매일 8000보 이상 걸어 다니신다.
우린 엄마의 병상을 지키며 시간이 멈춰버린 10년을 함께 한 전우다.
그러나 모시는 입장에서는 결코 쉽지 않다.
둘째 가라면 서러울만한 철저한 성격을 맞추려면 나는 더욱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식사도 간식도 기타 여러 가지 자잘한 모든 것을 아버지의 기준에 맞추려면 몹시 어려워 그냥 탈출하고 싶어진다. 같이 산 세월이 있어도 여전히 오후 4시 아버지가 들어오시는 시간만 되면 심장이 뛴다.
나는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고 자유롭고 감성 충만한 이상주의자이기에 아버지가 결코 편하지 않다.
그러던 어느 날 평생 처음 MBTI 검사라는 것을 하게 되었다.
반신반의하며 해본 결과 아버지는 ESTJ, 나는 INFJ라는 결과를 보고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그렇지. 그러니까 우린 안 맞는거야.
요즘은 로또 관계라고 하던가.
아버지와 나. 어쩜 이렇게 성격이 다를 수가 있을까.
나는 아버지의 딸이 맞을까? 아버지는 당신의 성격을 어쩜 이렇게 잘 맞추느냐며 신기하다고 손뼉을 치셨다.
나는 한숨만 내쉬며 앞으로 나를 어떻게 잘 보살필지 고민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INFJ라는 유형은 내가 보아도 보통 까다로운 성격이 아니었고 이런 결과가 나오지 않아도 익히 염려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우리 집에는 나와 정말 이야기가 잘 통하는 막내아들이 있다.
누구보다 나를 이해하고 자상하게 챙겨주며 가끔 자기가 어른인양 나에게 조언 같은 충고도 하는 꽤 믿음직한 녀석이다. 가끔 고지식한 부분이 있긴 해도 인생을 함부로 살진 않을 만큼 단단한 구석도 있고 한 가지 일을 시작하면 끝까지 해내고 마는 승부근성도 있어 나름 믿음직스러웠다.
온 가족이 모두 MBTI 검사를 해보면서 서로 그러면 그렇지를 연발하고 있는데 요 막내 녀석은 절대 안 하려 들기에 참 까다롭네 하며 몇 차례 권하다 접어두었다.
막내 아들이 군대 가기 일주일 전, 함께 책상을 정리하면서 대화를 하다가 가족들 성격에 대한 이야기와 군에 가서 만날 사람들과의 좋은 관계 유지하는 방법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게 되었다.
나는 아들의 군 생활이 걱정되어던거고 , 아들은 내가 아버지와의 관계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상처받지 않길 바랐던 거였다.
그런데 자기도 MBTI 검사를 해보았다며 슬쩍 말해주길, 그 대단한 ESTJ란다.
- 뭐? 네가? 네가 뭐라고? ESTJ???
그럴 리가 없잖아! 야, 다시 해봐. 맙소사. 뭔가 잘못됐어!!!
- 왜? 나랑 딱 맞던데? 내 키워드가 아주 딱이야! 현실적, 구체적, 사실적, 실질적, 체계적...
- 야! 그럼 네가 할아버지랑 똑같은 성격이라고???
이게 말이 되냐? 아, 나 진짜 아버지랑 안 맞는데...
그날 우리는 밤새 성격분석을 하느라 분주했다.
얘가 어려서 그런가? 아니면 아버지가 나이가 드셔서 그러신 건가? 어째서 똑같은 거야?
정말 믿기 어려웠지만 우린 성격의 양극단을 오가며 입장의 차이와 상황별 상대에 따라 느끼는 감도가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에 대한 활발한 연구를 벌이게 되었다.
그렇다.
일단 나의 경우는 입장의 차이에 따라 받아들이는 마음의 크기가 다른 것이 문제였다. 무엇보다 나는 아버지를 대하는 마음과 막내아들을 대하는 태도부터 눈에 띄게 달랐다.
어쩔수 없이 내린 결론은, 안 맞는 MBTI는 있어도 원래 안 맞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었다.
고정관념처럼 스스로 내린 성격의 정의를 다 부수고 우린 그저 이해하기로 했다.
이해가 안 되면 존재만 인정하기로.
존재마저 인정할 수 없는 인간은 잊기로 하면서 그 대단한 MBTI 성격 연구에 대한 토론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