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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근수근 Dec 09. 2024

4.19시기 혁신정당

1.서론

(1) 혁신세력의 기원

원래 혁신세력이라는 명칭은 “해방 이후 조선공산당에도 속하지 않았고 한국민주당에도 속하지 않았던 세력, 말하자면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인민당 세력 또는 근로인민당 같은 세력”을 지칭하는 용어였다. 이러한 이유로 혁신세력은 좌파인 조선공산당계열로부터는 협상파로, 우파인 한국민주당계열로부터는 중간파라는 비판을 동시에 받았다.

하지만 혁신세력이라는 명칭은 이후 역사적 사건들을 거치면서 조금씩 그 의미와 지시대상이 변했다. 단정수립 이전에는 여운형과 김규식계열의 협상파 혹은 중간파를 지칭하는 명칭이었다면, 단정수립 이후 6.25전쟁을 거치면서 혁신세력의 정치활동이 탄압을 받자 혁신세력의 외연은 여운형과 김규식계열은 물론 남로당을 포함한 구좌파 활동가들까지 모두 포괄하게 되었다. 다시 4.19혁명을 거치면서 혁신세력은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에 반대하며 4.19혁명 이전 혁신세력의 정치활동에 동조·동참했던 정치세력으로까지 확대되는데, 거칠게 표현하면 “반이승만·비민주당” 정치세력을 광범위하게 지칭하는 명칭이 혁신세력이었다.

(2) 분단과 6.25전쟁

분단과 6.25전쟁은 혁신세력의 등장에 있어서 중요한 요인이다. 분단체제의 형성과정에서 단정을 지지하던 세력이 이승만정권의 지배세력으로 편입되었다면, 김구·김규식을 비롯한 이른바 비단정세력과 좌파세력들은 이승만을 비롯한 단정세력의 대항세력으로서 혁신세력의 기초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6.25전쟁은 구좌파의 이념적 공간과 합법적인 활동 공간을 완전히 증발시켜버렸는데, 이러한 이데올로기 공간의 편협화는 혁신세력의 이념적 지향을 극도로 제약했으며 좌파와 혁신세력의 힘을 약화시켜 보수주의 정치세력의 정치적 헤게모니를 확립시켜 주었다. 즉 분단이 이승만정권의 지배체제를 공고히 했다면, 통일은 이들 단정세력의 지배권을 약화시킬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었고, 여기에 이승만의 북진 통일론과 대비되는 민족의 자주적인 평화통일론이야말로 혁신세력이 이승만 정권에 대항하여 제기할 수 있는 최선의 정치적 대안이었다.

(3) 혁신세력의 등장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4.19 이전에는 혁신세력들이 실질적으로 존재할 수 없었으며 4.19 이후에 혁신세력이 등장하게 된다. 4.19 직후 혁신세력의 등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 3대 대통령선거(1955)를 전후하여 형성된 진보당과 민주혁신당을 파악해야 한다. 진보당의 결당은 1954년 10월 9일 ‘사사오입 개헌’ 이후 비자유당계 인사를 총망라하는 범야당운동의 추진과정에서 진보파인 조봉암의 참여를 반대하는 신익희, 조병옥, 등의 소위 자유민주파를 중심으로 한 보수세력만이 민주당으로 결집되게 됨에 따라 여기에서 이탈한 서상일, 장택상 등의 민주대동파와 조봉암 등의 진보파를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1955년 12월 22일에는 가칭 진보당발기취지문과 강령초안을 발표하였으며, 1956년 3월 31일 전국추진대표자회의에서는 이동화가 기초한 정강정책을 채택하는 동시에 5.15 대통령 선거에 대비하여 대통령 후보로 조봉암을, 또 부통령후보에는 서상일을 지명결정(서상일은 거절하고 뒤에 박기출로 결정)하였다.

제 3대 대통령선거에는 이승만, 신익희, 조봉암이 입후보했었지만, 이중 신익희가 유세여행 도중 사망함으로써 선거전은 이승만과 조봉암의 대결로 나타났고 조봉암은 216만 3808표를 획들하여 유효투표수의 30%를 차지하게 되었다.

조봉암은 선거결과에 힘입어 공화당이탈파인 장택상과 합작을 시도함은 물론 다시 김창숙, 이명룡, 서상일, 박용희, 장건상, 이범석 등 재야거물급 인사를 망라한 민주혁신당을 도모하다가 당 영도권을 둘러싼 갈등에 부딪치게 되면서, 자파로만 구성된 진보당을 결당하게 된다. 반면 서상일 등 중앙상임위원 23명은 민주혁신당을 추진할 것을 성명하고 탈퇴하였고, 이에 대하여 진보당에서는 이들의 제명을 결의하였다.

이로써 제 1공화국 하의 진보적인 정당은 진보당과 민주혁신당으로 양립되었다. 물론 이 중에서는 진보당이 민주당 다음가는 제 2야당이었으며 전국적인 조직력을 가진 유일한 혁신정당이었고 선거를 통하여 대중의 지지를 확인한 정당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민주혁신당계는 조직과 활동의 면에 있어서 특별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2. 본론

(1) 7.29총선 및 결과

진보당사건으로 진보당이 불법화되고 조봉암이 법살된 이후, 4·19까지 명맥을 유지했던 진보 정당은 민주혁신당(서상일)뿐이었다. 그러나 4대 정부통령 선거를 계기로, 진보당 재건 움직임이 일어났지만 구심체가 되어야 할 당의 부위원장 박기출·김달호, 윤길중은 함께 지도부를 구성할 만한 결속력이 없었다. 혁신정치세력의 통합이 실패를 보자 각 분파는 독자적으로 총선에 대비하기 시작하였다. 사회대중당은 123개 선거구, 한국사회당은 17개 선거구, 혁신동지총연맹은 무소속으로 13개 선거구에 후보자를 등록하였다. 따라서 혁신정치세력이 서로 경합하는 선거구가 24개에 이르게 되었다.

한편 후보등록에 있어서 혁신정치세력간에 경합하는 현상뿐만 아니라 몇 지역에 편중되는 현상을 볼 수 있었다. 경상남북도와 전라남도가 전체 선거구의 70%이상 후보자가 출마한 반면에 충청남도와 강원도 경우는 각각 18%,25%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지역편중현상은 이 지역이 과거 해방정국과 한국전쟁 시기에 좌익운동이 활발하였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음을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이들이 제시한 선거공약을 살펴본다면, 대체로 이들의 선거공약은 통일 및 외교정책에 있어서는 유엔감시하의 평화통일, 경제정책에 있어서는 장기계획을 통한 주요산업과 금융기관의 국유화, 사회복지정책에 있어서는 중소기업의 지원과 공공화 등을 제시하고 있었다. 이러한 선거공약은 민주당의 것과 대동소이하게 나타났고 특히 경제정책에 있어서는 다분히 추상적이었고 구체적인 방안이 결여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들의 선거운동은 민주당의 구악을 폭로하거나 새로운 통일반안의 제시 나타났다. 즉 이들은 민주당에 자유당의 정치자금이 유입되어 있다는 사실과 양민학살사건에 민주당의 장면이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중점적으로 선전하고 나섰다. 또한 이들은 선거공약중 특히 민주당과 차이점을 발견하기 어려운 통일정책에 대해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고 나섰다. 사회대중당의 서상일은 통일방안으로 남한측의 “유엔감시안”과 북한측의 “중립국감시안”을 절충한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는 유엔회원국 중 한국전쟁 참전국을 제외한 비참전국 감시하의 총선거를 실시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혁신동지총연맹의 장건상은 통일의 여건으로서 중국의 유엔가입이 필요하므로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려하여야 한다고 밝혔다. 즉 중국의 유엔가입으로 소련의 거부권행사를 방지할 수 있기 때문에 국제적인 협조관계가 형성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들의 이런 선거운동은 여론에 파문을 일으키면서 혁신정치세력의 붐을 조성하였다. 특히 경남북 지역에서는 상당한 호응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붐은 선거 종반전에 들어가면서 현저히 저하되고 있었다. 이는 민주당이 자신들의 반독재투쟁에 있어서 유일한 공로자로서 선전하고 혁신정당들의 통일방안이 용공적이라고 비난하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러한 상황은 혁신세력의 총선 참패로 이어졌다.

7.29총선 전의 분위기는 혁신정당이 무난히 원내교섭단체를 이룰 수 있을 것처럼 예측되었다. 하지만 민의원·참의원을 합하여 8석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가장 핵심적인 원인은 준비부족이었다. 혁신세력은 아무런 준비도 없이 4·19라는 역사적 대격변을 맞았고, 총선에 대비하여 급속히 조직화를 꾀했지만 내부통합을 이루는 데 실패했다. 창당에서 선거를 치르기까지에는 3개월이 너무 짧았다. 그 때문에 창당에서 선거과정을 주도할 만한 새롭고 탄탄한 정책을 마련하지 못하였다. 혁신정당들의 경제분야 공약들은 이미 1950년대 중반 진보당이 내걸었던 주장이자 7·29총선에서 민주당이 공약으로 선전함으로써 참신함이 떨어졌다. 무엇보다 통일방안에 대해서는 용공시비에 휘말릴 것을 우려해 통일방안이 반공에 토대한 것임을 강조하는 조심성을 보였다. 혁신정당의 이러한 태도는 지나치게 몸을 사린다는 비판과 함께 보수정당에게 자신들과 별 차이가 없다는 공격의 빌미를 제공했다. 다음으로 조직과 자금의 열악함을 들 수 있다. 차기 집권이 예상되는 민주당에 부정축재자금을 비롯한 기업자금이 대거 몰린 반면에 혁신정당은 선거 후반에 들어서는 운동원과 조직을 거의 가동하지 못 할 정도로 심각한 자금 부족상태였다. 그리고 혁신정당은 각 부문운동과의 연대에 무관심하였다. 교원노조운동, 노동조합운동, 학생들의 선거계몽운동과 적절하게 결합하지 못하였다. 마지막으로 안일한 정세인식 등을 지적할 수 있다. 총선을 전후한 민주당 정부에 대한 미국의 지원은 미국의 식민지 정치권력 재편이라는 측면이 강하게 내포되어 있었으나, 혁신정당은 이러한 미국의 의도와 총선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2) 사회대중당의 분열

총선 이후 사회대중당은 선거 참패로 인한 침체 국면을 벗어나기 위해 당을 재정비할 필요가 있었다. 선거 직후 사대당은 다른 혁신정당과의 재편을 통한 혁신세력의 통일보다는 사대당을 중심으로 한 혁신운동의 확대 강화를 꾀했다.

그러나 선거 패배의 원인을 밝힌다는 명분 밑에 책임 소재를 밝힌다는 구실을 들어 진보계(김달호)와 비진보계(서상일)는 각 진영의 해당행위를 들추게 됨으로써 내분이 재연되었다. 결국 두 진영의 반목 대립은 비진보계의 메별 선언 발표를 계기로 둘로 분열되고 말았다. 이후 두 진영은 각각 사회대중당의 간판아래 사무실을 열고 지방조직 장악 및 세 불리기에 나섰다. 이처럼 사회대중당 내 서상일과 김달호 사이의 대립과 갈등이 빚어지는 것에는 나름대로 원인이 있었다. 첫째, 진보당(가칭)결성과정에서 진보당과 민주혁신당으로 분열된 것에서도 찾을 수 있다. 둘째, 4·19를 계기로 같은 조직에 결집되었다 하더라도 총선 참패로 인해 정치적 형태의 차이에 따라 분열되었던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셋째, 두사람간의 노선 차이, 곧 서상일계의 민주사회주의 우파적 경향과 김달호계의 민주사회주의 좌파적 경향에서도 기인하였다.

비진보계가 여타 혁신 정당·단체와 제휴하기로 한 합의를 이끌어내며 비진보당계 사회대중당·한국사회당·혁신동지총연맹·한독당·독로당 등 각 단체별 5인 대표로 구성된 ‘혁신5당통합추진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합의하였다. 이 위원회에서는 당명은 독립사회당으로 결정하고 창당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중앙의 분열은 사회대중당 경북도당준비위원회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진보계와 비진보계로 분열되었다. 이 과정에서 진보당계의 윤길중은 장건상을 당수로 하는 혁신당을 창당하여 김달호와 결별하였다. 이처럼 7·29총선거에서 참패한 혁신세력들은 군소 혁신정당으로 분열되었다.

서상일은 독립사회당의 결성을 이끌어 낸 뒤 의회로 진출한 혁신세력의 통합에 나서 혁신계 의원을 설득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서상일을 비롯한 6명의 의원들은 1960초에 혁신구락부를 결성하였다. 이들은 창당을 추진하고 있던 독립 사회당과 혁신당을 통합에 의한 신당을 결성하기로 하고 각기 소속 정당에서 통합신당을 위해 노력하기로 하였다.

(3) 당 재통합 운동 : 2대 악법 반대 공동 투쟁과 통일 운동

통일사회당이 발기되자, 열세에 놓인 김달호·사회대중당, 장건상·혁신당, 최근우·사회당의 3당도 통합에 서둘렀다.

민주당 정부는 1961년에 들어서면서 ‘굴욕적인’ 한미경제협정으로 미국에 대한 의존성을 심화시키고 ‘반공법’과 ‘집시법’으로 새로이 세력화되어나가는 민족주의적 사회민주주의 세력을 탄압하려는 노골적인 의도를 드러냈다. 민주적 사회주의 세력은 한미경제협정을 반대하고 사회대중당, 혁신당등 16개 정당·사회단체가 ‘2·8한미경제협정 반대 투쟁 위원회’를 결성하였다.

혁신계의 통일논의가 해방3년기 좌우합작 운동 노선을 따르는 양상을 띠자 민주당 정부는 이들 혁신계를 대상으로 한 것이 분명한 ‘반공법’과 ‘집시 시위에 관한 법’ 제정에 박차를 가했다. 이 두 법에 대한 반대 투쟁이 거세게 일었다. 민주당과 우당인 신민당조차 이에 반대했고, 혁신계에서는 정당·정파를 초월한 ‘반민주악법반대공동투쟁위원회’가 3월 15일 결성되었다.

- 통일 운동 -

혁신 세력이 분열되고 민주당이 신민당, 민주당으로 분당되는 혼란된 정국에서 정치권에 실망하기 시작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통일에 대한 막연한 기대는 확산되었다. 서울대학교 민족통일연맹을 비롯한 통일 운동체가 전국 각 대학에 결성되었다. 청년 단체도 각종 사회 문화 단체도 통일 문제로 달아올랐다.

대구에서 기치를 든 통일 운동은 무대를 서울로 옮겼다. 1960년 9월 초 민족자주 통일중아협의회가 사회당·사회대중당·혁신연명의 중핵적 역할에 의해 발기되자 분열된 혁신 세력의 외압에 의해 통일사회당 준비위원회가 이에 합류하게 되었다. 지방 조직이 자생적으로 조직되어 오히려 혁신 정당 중앙 지도부를 채찍질하며 독자적인 활동 영역을 넓혀 나가고 있었다.

통일 방안을 중심으로 ‘민자통’은 사회당이 영도하는 민자통 노선과 통사당 창당준비위·사회대중당 지도부·혁신당 지도부가 이끄는 중립화조국통일총연맹(중통련)노선으로 갈라졌다. 전자는 “자주적·민주적·평화적 통일”을 내걸고 구체안은 나중에 내걸자고 주장했고, 후자는 “합리적이고 실현 가능한 영세 중립을 통일 방안으로 내걸 것”을 주장하면서 “대안 없이 통일 의욕만 고취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이렇게 2대 통일 노선이 제시됨에 따라 다시 양분되어 정책갈등이 조직갈등으로 이어졌다.

혁신계가 사분오열되고,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가 발기되자 그 열기는 각 대학으로 번졌다. 1960년 11월 18일에는 서울대 민족통일연맹이 결성되고, 성균관대,경희대등 속속 민통련 또는 민족통일연구회가 결성되었으며, 이들은 모두 굴욕적인 ‘한미경제협정’에 반대하는 혁신계의 ‘한미경제협정반대 투쟁위원회’에 참가했다. 뒤이어 ‘반민주악법반대공동투쟁위원회’에 참여하는 등 혁신계와 보조를 맞춰 나갔다. 1961년 5월 3일에는 17개 대학으로 된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이 주동이 되어 ‘남북 학생회담’을 제의하며 학생 통일 운동을 북으로 확산 연계시키고자 했다. 그런데 혁신계 각 정당과 민자통 등이 이에 호응, 열렬한 지지를 보내면서 운동은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민자통이 주최한 궐기대회는 데모로 이어졌다. ‘오라 남으로! 가자 북으로!’라는 구호가 온 장안을 뒤흔들었다.

한편, 한미 경제협정 반대 공동투쟁, 2대 악법 반대 공동투쟁에 이은 남북 학생 회담 지지 등의 투쟁 과정에서 통사당준비위계의 중통련 노선과 사회당계의 민자통 노선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났다. 민자통의 그것은 순수한 민족감정에 호소하여 통일 염원에 불을 붙이고 민족 자주라는 면을 부각시켜 국제 정치적 내지 국내 정치적 여러 조건에 구애됨이 없이 남북이 직접 통일로 나아가자는 것이었다.

통일사회당준비위는 그러한 민자통의 입장에 반대하고 확고한 통일 방안 없이 통일 열기만 고조시킨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여 민자통에서 탈퇴, 중통련을 결성한 바 있었다.

이와 같은 통일 운동 과정을 통해 통일 사회당 준비위를 제외한 사회당·혁신당·사회대중당의 3당 통합 운동은 급진전을 보았다. 5월 7일 3당 통합 교섭 대표가 선정되고 다음과 같은 3대 기본원칙에 합의했다.

1. 기본 노선 : 민족 자주 노선

2. 통일 방안 : 민족 자주 원칙에 입각하여 남북 협상과 국제 협조로써 평화 통일을 기한다.

3. 당면 과제 : 민주주의 민족국가 건설

그러나 이 합의는 분단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남북에 각각 친미·친소의 정치 경제 체제가 자리 잡은 당시의 조건에서는 실현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결국, 이들 3당 통합 운동은 ‘조건 없는’ 민족 자주 노선을 주장하는 사회당과 영세 중립 노선을 주장하는 혁신당 그리고 사회대중당 간에 노선상의 대립을 끝내 극복하지 못했다. 그래서 노선상으로는 사회당·민자통과, 통일사회당 준비위·혁신당·사회대중당 3당의 중통련으로 갈라졌지만, 서상일과 김달호 간의 앙금이 가시지 않아 이들의 통합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3. 결론

이상에서 우리는 4.19이후에 혁신세력을 집단화 과정과 그 활동양상을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이 시기에 혁신정치세력의 전면적인 대두와 조직화, 독자적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펼치기에는 너무 일렀다는 지적을 피할수 없을 것이다. 스스로의 투쟁과 조직을 통하여 쟁취하지 못하고 주어진 정치공간을 지나치게 조급하게 이용하려 했다는 것이다.

더욱이 혁신세력의 대부분은 지식인들이었다. 4.19 지후 민중운동이 소생하고 그 활성화의 가능성이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민중운동을 지원하고 대중노선을 취하기보다는 지식인 중심의 혁신정치 활동가들을 중심한 정치 투쟁에만 매진했다는 것은 당시의 혁신 운동이 지식인 인동의 차원에서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반드시 짚어야 할 또 문제는 이념논쟁과 분열이다. 4.19이후 혁신정당이 이념보다는 인맥에 따라 이합집산한 경우가 많았다. 좋은 기회 였던 7.29총선에서 패배한 이유는 혁신정당간의 경쟁 이었다. 4.19이후에 1년도 채 안되는 기간동안 정치노선을 정립하고 그 노선에 따라 여러인사가 이합집산 한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치열한 논쟁을 통해서 방향성과 구체성을 갖추도록 노력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렇지만 4.19 직후의 혁신운동 역시 그 역사적 지위는 분단시대의 민족운동 속에 포괄되는 것이며 민족운동의 역사적 전통 위에 놓여져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당시의 사회운동은 아직도 여전히 해결되어야 할 문제로서 분단시대 한국사회의 성격에 조응하는 민주화의 내용성문제, 민중생존권의 문제, 조국통일의 문제를 제기했다는 점과 민중운동의 지속성이라는 점에서 이 모든 사회운동들은 역사적 정통으로 남겨져 있다.

물론 혁신정치활동가들의 활동은 이후 단절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그렇지만 미약하게나마 이들 활동가들의 영향이 이후에 사회운동에 지속적으로 수용되었다는 점도 부정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혁신정당은 이승만정권하에 명맥만 이어오던 것을 4.19이후 분출하고 조직화하여 8명의 원내진출에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4.15총선에서 지역구 2명과 비례대표 8명 4.9총선에서 지역구3명과 비례대표 3명 당선에 비하면7.29총선에서 지역구만 8명만 당선된 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평가할수 있다.

특히 혁신세력은 점차 통일문제를 중심으로 결집하였고, 그것은 기존 정치세력과 가장 차별적인 모습이었다. 다시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대부분의 혁신 세력들이 결집하여 분열의 골을 메우고 통일운동과 변혁운동을 결합하여 본격화해 나간 점은 큰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김광식, 「4.19시기 혁신세력의 정치활동과 그 한계」,『역사비평』제2호, 역사비평사, 1988

노중선, 「4월혁명기 혁신정당, 왜 좌절하였나」,『역사비평』제20호, 역사비평사,1992

정태영, 『한국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역사적 기원』, 후마니타스, 2007

정태영, 『한국사회민주주의 정당사』, 세명서관, 1995

한모니까, 「4.19와 혁신정당, 그리고 통일문제」, 『내일을 여는 역사』제12호, 내일을 여는 역사, 2004


*2010년 전후에 학부 토론용 소논문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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