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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혜원 Feb 29. 2024

음악 에세이 '첫귀에 반한 재즈' 4

나로부터 도망치는 나; 담금질 당하는 마음

스탄 겟츠 <Dear Old Stockholm> 들어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o2qnZ3cW7bw

'The Sound' 앨범 들어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edAkJteGcTk&list=PL0q2VleZJVEk_u758BtNbLj01J0vg5Sop

테너 색서포니스트 스탄 겟츠Stan Getz의 1956년도 앨범 ‘The Sound’의 수록곡 <Dear Old Stockholm>은 내게 우울증을 형상화한 것 같은 곡이다.
곡 특유의 애수 어린 단조 선율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단조의 선율 아래서 분주히 움직이는 드러머의 브러쉬 스틱 연주 때문이다. 드럼 연주가 곤두박질 칠 듯 아슬아슬하고 맥없는 잰걸음처럼 들린다.
무언가 소중한 것을 상실한 이가 눈 쌓인 길 위를 멍하니 터벅터벅 빠르게 정처 없이, 굳은 몸을 억지로 반동으로 이끌며 좁디좁은 보폭으로 걷듯이, 브러쉬 스틱은 쉴 새 없이 드럼 위를 문질러 댄다.

나는 2년 가까이 우울증 치료를 받고 있다. 다행히 아주 많이 좋아져서 곧 치료를 끝낼 수 있겠다 싶은 희망이 보인다.
나는 내가 우울증을 앓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글 쓰고 음악 듣고 소설 읽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우울하고 염세적인 감상에 젖을 때는 예전부터 종종 있었지만, 그런 감정이 내 일상을 지배한 적은 없었다.
심지어 우울증을 심하게 앓을 때조차 우울이나 허무는 내 심적 고통의 지배적인 감정이 아니었다.

평소 나의 성격은 때에 따라 그리고 내 의지에 따라 그때그때 다르기는 했지만 대체로 밝고 외향적인 쪽에 더 가까웠다.
우울증을 앓고 치료를 받게 되면서 알게 된 것인데, 우울하고 염세적인 감정과 질병으로서의 우울증은 직접적이고 필연적인 관계는 없다고 한다.
언뜻 낭만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창조적 힘의 원천이 되기도 하는 그런 감정은 우울증의 부분적인 양상일 뿐이었다.
정작 가장 힘들고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마음이 쉼 없이 이 생각 저 생각으로 산만하게 분주히 내달리며 불안과 초조함으로 영혼과 온몸이 함께 타들어가는 듯한 느낌에 시달릴 때였다.
극도로 뜨거운 불길 속에서 달궈진 채로 쉼 없이 담금질 당하는 쇠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담금질 당하는 쇠는 더 강해진다는데, 왜 나의 영혼은 점점 더 쇠약해지는 것일까, 순간순간 이런 절망의 공포와 무력감이 더해지고 여기에 우울감이 살포시 얹어지는 게 내가 경험한 우울증의 증상이었다.
이는 내가 조사하고 공부한 우울증의 증상과도 일치했다
이런 증상은 무엇보다 신체 증상을 동반한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몸이 굳고 떨리며 호흡이 가빠지는 공황증은 기본이며, 두통, 현기증, 복부 팽만감, 메슥거림, 근골격계의 통증, 배변*배뇨의 곤란, 오한, 하지불안, 심지어 극심한 경우 파킨슨 증후근 같은 운동능력의 실조 증상마저도 나타난다.
나 또한 이들 중 몇몇 증상이 동반됐다.
이 증상들은 뇌와 뇌에 연계된 신체의 자율*운동 신경들이 탈진한 탓에 발생하는 증상일 뿐, 해당 신체 기관들이 세포 조직 단위에서 실제 손상을 입은 것은 전혀 아니다. 다만 손상이 발생한 것과 매우 유사한 증상이 나타날 뿐이다.

그렇다면 우울증을 묘사한 것만 같은 이 곡 <Dear Old Stockholm>을 우울증 환자들이 듣는 것은 좋지 않은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로 우울증에서 제일 먼저 환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자신의 병, 즉 자신의 마음을 똑바로 바라보고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아는 것이다.
이를 내 식대로 해석하면 자신의 몸과 마음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며, 내 영혼과 내 마음에 주인이란 존재하지 않고, 나란 존재는 그저 우연히 세상에 나온 한 떨기 풀꽃처럼 어떤 목적성이나 영원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라는 것은 하찮은 존재이지만, 다른 그 어떤 것도 귀한 것은 없기에 하찮음조차 지워지고 오롯이 유한한 생명만이 남는다.

우울증 환자로서 내가 내린 결론은, 내가 나의 주인이 됨으로써, 혹은 다른 특별한 무엇인가를 나의 주인으로 삼음으로써 나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여기며 자신을 괴롭히기에 나의 영혼과 나의 몸이 나로부터 계속해서 도망치는 것이 우울증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왜 나를 괴롭히는 것이냐 하면, 나 혹은 다른 무엇을 나의 주인으로 삼는 것은 곧 내가 나 자신 혹은 다른 무엇의 노예가 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신이란 복잡미묘한 것이라서 내가 나 자신의 노예가 되는 모순도 발생한다.
<Dear Old Stockholm>을 듣고 있노라면 나로부터 도망치는 내 영혼과 몸의 필사적인 잰걸음이 보인다. 나의 마음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이 곡을 듣는 것이 우울증 환자에게 ‘좋지 않지’ 아니한 두 번째 이유는, 이 곡이 실제로는 우울증과는 아무 상관없는 곡이기 때문이다.

스탄 겟츠가 제일 먼저 녹음해서 그의 원곡으로 잘못 알려진 적도 있지만, <Dear Old Stockholm>의 원곡은 19세기 스웨덴 가곡 <Ack Värmeland du sköna>라고 한다. 스웨덴의 서쪽 지방 베름란드Värmeland주에 바치는 찬가다. 19세기면 유럽에서 한창 민족주의가 발흥할 때라서 자기 나라의 영토를 찬미하는 노래들이 많이 쏟아져 나오던 시대였다.
영어 번역을 거쳐 우리말로 제목을 중역하면 <베름란드, 너는 아름답구나!>정도가 되는 것 같다.
재미 있는 점은 지도에서 찾아보니 베름란드 주는 서쪽의 노르웨이와 국경을 맞대고 있고, 스웨덴의 수도인 스톡홀름은 동쪽 끝에 있어 행정구역이 서로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아마도 타국의 가곡 선율이 마음에 들어 음반에 실으면서, 잘 알려지지 않은 스웨덴의 낯선 지명 베름란드보다는 잘 알려진 수도 이름을 붙이는 게 곡을 알리는 데  더 낫겠다 판단한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이 곡에서 왜 엉뚱하게도 소리로 형상화된 우울증을 보았던 것일까. 아마도 곡 제목이 한 몫 했을 것이다.
스톡홀름은 우중충하고 추운 날씨에다 낮 시간이 짧아 일조량이 부족한 탓에 우울증 환자 많기로 유명한 나라 스웨덴의 수도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마음을 들여보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을 잘 비춰 줄 무언가를 내가 간절히 찾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Dear Old Stockholm>이란 곡을 처음 들었던 것은 사춘기 시절, 지금의 나는 그 누구도 우상으로 떠받들지 않지만 우상이 필요했던 나의 소년 시절에 내가 우상처럼 떠받들던 트럼페터 마일즈 데이비스Miles Davis의 앨범 <Round abou’ Midnight>에서였다.
그때 내가 구입한 마일즈 데이비스의 CD 속지에서는 모 평론가가 이 곡의 원곡을 스탄 겟츠의 것으로 잘못 소개하기도 했었다.
많이 좋아했던 곡은 아니어서 mp3 시대가 도래하고 CD를 듣지 않게 되면서 무척 오랜 시간 잊고 지냈었는데, 한 두 해 전에 문득 생각나서 다시 듣게 되면서 스탄 겟츠의 연주도 찾아 들어보게 되었다.
마일즈 데이비스의 녹음은 편곡의 구성이 매우 창의적이고 곡의 개성과 완성도도 더 빼어나지만, 내가 훨씬 더 이끌리는 것은 스탄 겟츠의 녹음이다.

한편, 스탄 겟츠는 쳇 베이커, 그리고 앞 장에서 쳇 베이커와  ‘피아노 없는 4중주단’을 이끌었다고 소개한 바리톤 색서포니스트 제리 멀리건과 함께 50년대 초, 웨스트 코스트West Coast 재즈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웨스트 코스트 재즈를 다른 말로 쿨 재즈Cool Jazz라고도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뒤에 나오는 다른 장에서 더 자세히 살펴 볼 것이다.


스탄 겟츠는 1961년에는 브라질 음악인들인 탐 조빔Tom Jobim 그리고 질베르또Gilberto 부부와 함께 보사노바 앨범  ‘Getz & Gilberto’를 발표해 세계적인 대성공을 거둔다.
보사노바는 흔히 알고 있는 대로 쿨 재즈와 브라질 삼바가 교배된 장르다.
재밌는 점은 보사노바의 탄생에 있어, 탐 조빔이나 질베르또 부부 같은 브라질의 보사노바 싱어송라이터들이 지망생이었던 시절에, 그들한테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은 스탄 겟츠가 아니라 쳇 베이커였고, 그 당시 브라질에서 쳇 베이커의 인기도 대단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쳇 베이커는 이 사실을 전혀 몰랐다가 먼 훗날 70년대에 뒤늦게 브라질을 처음으로 방문해서야 알게 됐다고 한다.
만약에 쳇 베이커가 브자질에서의 인기를 일찍 알았더라면, 그래서 미국에서 재즈의 인기가 급락했을 때 쳇 베이커가 이탈리아가 아니라 브라질로 갔더라면, 우리는 ‘Gezt & Gilberto’가 아니라 ‘Chet & Gilberto’를 듣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부록7)
앞 장서 언급한 대로 스탄 겟츠는 쳇 베이커를 마약의 구렁텅이로 끌어들인 장본인으로 지목된다. 젊은 쳇 베이커와 스탄 겟츠는 불과 몇 개월밖에 같이 활동하지 않았다.
먼 훗날 중년의 모습으로 몇 차례 공연을 함께 하기는 했지만 그 때에도 인연은 아주 짧았다.
젊은 스탄 겟츠와 쳇 베이커가 함께 연주한 1953년 공연 실황을 담은 앨범 ‘West Coast Live’ 중에서 <All The Things You Are>를 들어보자.
제리 멀리건이 마약으로 구속되고 얼마 안 지나 있었던 공연이라 ‘피아노 없는 4중주단’처럼 피아노가 빠진 멤버 구성으로 연주했다.
이 곡은 일전에 소개한 적 있는 거장5인의 더 퀸텟The quintet 라이브 곡과 같은 곡이다.
비교해서 들어보면, 거장5인의 좀 더 자유분방한 초기 비밥 스타일과 쿨 재즈라는 별칭이 붙기도 한 더 정제되고 세련된 웨스트 코스트 재즈 스타일의 차이를 엿볼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gmZuW3RG_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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