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되기 위한 첫 번째 문을 열다.
예전에 제 아이가 2살 때 가서 정신과에서 진단받을 때, 정신과 선생님이 제게 물었었죠.
"이 정도의 분노를 누르고 사는데 다른 감정이 느껴져요? "
"... 그다지... 불편함은 없는 거 같은데요? "
"감정은 한 종류만 누를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분노를 억제하고 있다면 모든 감정이 한꺼번에 눌릴 겁니다."
"..... 감정이 사는데 꼭 필요한가요? 보통 판단을 제대로 할 수 있으면 별 문제가 없을 거 같은데요?"
제 대답에 선생님이 절 쳐다보면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르네요. 뭔가 말을 하고 싶은데 말해봤자 못 알아들을게 뻔해서 삼키던 그런 표정이었던.
사실 감정을 누른다는 것에 대한 어려움은 한 번도 느낀 적이 없었습니다. 나의 최초의 기억인 초 3~4 쯤부터 이제까지 늘 눌러왔고, 눌러오는데 크게 힘듬을 느끼지 못했기에, 이번에도 별 문제가 없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살아오던 대로 사는 건데 뭐 그리 큰 문제가 생길까 싶었죠. 그러나 그게 저의 오만이고 오판이었던 것을 깨닫는 데에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아이의 심리치료 상담이 시작되었습니다. 그저 내가 변하면 되는 거라 생각했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변하는 방향만 잡으면 잘해나갈 수 있을 거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건 좀 웃긴 생각이었습니다. 내 안에서 길을 찾으려면, 내 안의 장애물을 제대로 봐줘야 했는데, 그걸 간과했던 거죠. 심리치료 상담이 시작되면서 아이는 아주 천천히 자기 안의 감정을 가끔 드러내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건 저의 마음이라는 호수에 파문을 일으키는 돌 같은 거였죠. 외면하고 제대로 봐주지 않았던 과거를 꼭꼭 묻어두었던 호수에 자꾸만 돌이 던져졌습니다.
사실 그게 진짜 호수였다면 그렇게까지 아프지 않았을 것인데, 안타깝게도 제가 호수라 생각해서 뭐든 던져도 된다 생각했던 제 마음은 호수가 아니라 그냥 제 자신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만신창이가 되어있는 상태지만 자꾸 돌은 던져지고, 전 아이를 위해선 그 표시를 내면 안 된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작은 자극에도 극도의 스트레스가 차올랐지만 잘 꾹꾹 집어넣었어요. 작게 작게 접어서 작은 틈이라도 있으면 넣어주겠어!! 이러면서요. 상담을 진행하면서 아이의 상태를 제삼자의 눈으로 확인을 할 때마다 매주 매주.. 전 작아졌어요. 상담 선생님이 뭐라 하신 것도 아니고 그 무엇도 아닌데 전 작아지더군요. 아이가 뭔가 잘못된 것 같은 모습이 보이면 제가 저를 평가하고 제가 저를 심판하며 스스로를 작고 작고 작게 깎고 있었던 나날들이었죠.
그러던 어느 날 저녁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진짜 별일 없이 너무나 편안한 저녁이었습니다. 저녁도 잘 먹었고, 아이는 잠이 들었고, 남편도 곧 잔다고 준비하고 있었죠. 컴 앞에 앉아서 글 쓴다는 핑계를 대며 자유시간을 즐기려고 만반의 준비를 다 했을 때였죠. 적당히 조용한 음악과 커피 한잔. 그리고 평화로운 조용함. 모든 식구들이 다 자는 나만의 시간. 그 시간을 즐기려고 음악을 틀고 웹서핑을 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급체했을 때 오바이트 올라오는 것처럼 욕지기가 치미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너무 가슴이 답답하고 뭔가 가득 차서 뻥 터질 것 같은데 그럴 이유가 없어서 너무 당황스러웠죠. 급체한 건가? 싶어서 손도 따고, 소화제도 먹고 등도 쭉쭉 스트레칭해주면서 나름 편안한 자유시간을 즐겨보려고 노력했지만 가슴만 더 답답해졌습니다.
결국 편안한 자유시간 따위 포기하고 불을 끄고 누웠습니다.
그리고 잠이 안 오기에 바디스캔 명상을 하며 잠들기를 재촉했죠. 바디스캔을 하며 어느 순간 잠이 들었지만, 두 시간 만에 깨버렸습니다. 결국 그 주를 내내 그렇게 불면의 시간을 보내고 지친 몸을 이끌고 아이와의 상담을 갔습니다. 아이의 상담이 다 끝나고 부모 면담을 하는 상황에서 제가 하는 이야기들을 곰곰이 들으시던 선생님은 제게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어머니, 다음 주에는 어머니만 오셔서 저와 이야기 한번 하시겠어요? "
"네? 제가요? "
"네. 좀 필요하실 것 같아요. 어머니의 이야기를 제게 좀 들려주시겠어요?"
순간 진땀이 쫙 났습니다. ' 뭐가 잘못된 건가? 왜 나를 보지? 내가 뭘 많이 잘못했나? '라는 생각에 손이 순식간에 차가워졌습니다. 우선은 선생님께 알겠다며 다음 주에는 나 혼자 오겠다며 이야기를 하고 돌아오면서 전 갈등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이 잘못되었지?'
'내가 가서 무슨 이야기를 하지?'
'난 뭘 하고 싶은 거지? '
...
그 고민은 그다음 주에 저 혼자 갈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