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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원 Aug 14. 2023

라 토마티나 La Tomatina

사생결단 토마토 전쟁



아는 만큼 보이고 본 만큼 누린다


세상엔 갈 곳도, 즐길 거리도 많다. 여행을 제대로 즐길 줄 아는 사람은 축제를 찾아다닌다. 나라마다 평생 한 번쯤 겪어봄직한 축제들이 있다. 개중에는 미쳤다 싶을 정도로 요란 뻑적지근한 축제도 다. 물을 뒤집어쓰기도 하고 꽃을 뒤집어쓰기도 흙을 뒤집어쓰기도 한다. 무릇 광적일수록 기억에 더 남는 법이다. 그렇다면 토마토를 뒤집어써 보는 건 어떨까?


길거리 한복판에서 서로에게 미친 듯이 토마토를 집어던지는 광란의 한 장면을 어디선가 본 것 같다면 바로 찾아왔다. 뜨거운 여름 막바지 8월의 마지막 주, 온몸에 시뻘간 토마토 잔해를 뒤집어쓴 좀비들이 날뛰는 이곳은 스페인 동부 발렌시아의 작은 마을 부뇰이다.


부뇰 Buñol. 생소한 이름이다. 사실 토마토 축제만 아니었다면 알아둘 이유를 찾기 힘든 시골 마을이다. 그러나 별것 아닌 해프닝 하나가 때로 엄청난 나비효과를 불러온다. 여느 스페인 시골이 그렇듯 들에서 올리브나 키우던 평범한 촌마을이 1945년 벌어진  사건 때문에 국제적 축제의 장이 되었다.



역사


스페인 북동부 발렌시아와 까딸루냐 지방에는 기간떼라고 불리는 거대한 거인 인형을 둘러메고 거리를 누비는 행사가 있다. 옛 아라곤 왕국 시절부터 가톨릭을 수호한 기독교 왕들을 기리는 퍼레이드다. 종교행사가 어느 날 전혀 엉뚱한 세속축제가 되었다.



1945년 8월의 마지막 수요일, 그해도 어김없이 거인인형들이 읍내를 행진하고 있었다. 이때 동네 장난꾸러기 몇행렬에 난입했다. 무리에 끼고 싶어 일어난 단순 해프닝이었다. 그런데 와중에 한 참가자가 넘어졌다. 골이 난 참가자는 앞을 가로막는 사람들을 마구 밀쳤다. 여파가 도미노처럼 이어지며 길거리 채소 가게 진열대가 무너졌고 화난 군중들이 떨어진 토마토를 집어 들어 마구잡이로 던지기 시작했다. 소동은 경찰이 출동하자 일단락 됐다. 하지만 다음 해 같은 날이 되자 마을 젊은이들이 토마토를 박스째 준비해서 대놓고 던지며 놀았다. 당시는 가톨릭의 위세가 살벌했던 독재자 프랑코 총통 시절이었다. 엄숙한 종교행사에 이런 불경한 장난이 용납될 리 없었다.


토마토 던지기는 금지됐지만 마을사람들은 그 순간의 희열을 잊지 못했다. 장난이 어느덧 자유에 대한 열망으로 바뀌었고 십여 년이 지난 1957년, 마을사람들은 항의의 표시로 커다란 관에 토마토를 잔뜩 담아 어깨에 둘러메고 악단의 장송곡까지 곁들여 길거리를 행진했다.


토마토 장례식은 금세 입소문을 탔다. 하나둘 몰려든 외지 사람들까지 합쳐 토마토 전쟁은 매년 규모를 키웠다. 시대가 변하고 인기가 더해지자 2002년 이 축제는 스페인 관광청에서 공식적으로 미는 관광상품이 되었다. 얼마나 인기 있었던지 작은 시골 마을에 관광객이 너무 몰리자 2013년부터는 참가 인원수를 제한하고 입장료를 받기 시작했다. 이제 토마토 거리에 입성하기 위해서는 2만 장 한정의 유료 티켓을 구매해야 한다. 전체 주민 9천 명에 불과한 이 작은 마을에 단 한 시간의 광란을 즐기기 위해 전 세계에서 찾아오는 관광객 수가 5만 명을 넘는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2년 간 취소됐던 축제는 75주년을 기념하며 작년에 성대히 재개됐다. 그렇다면 올해도 어김없이 치러지겠지? 매년 8월 마지막 주 수요일이니까 2023년 올해는, 바로 2주 뒤 8월 30일이다!



진행


빨로 하본 palo jabón이라는 미끌미끌 비누칠을 해놓은 2층 높이의 장대 위에 돼지 넓적다리 햄 하몬 jamón을 매달아 놓고 누구라도 먼저 올라가서 따내는 순간 축제가 시작된다. 시나리오는 그렇지만 실제로는 이게 쉽지 않다. 그렇다고 축제가 지연될 순 없다. 하몬을 따든 말든 오전 11시가 되면 토마토를 산처럼 실은 덤프트럭들이 메인 광장인 쁠라사 델 에블로 Plaza del Pueblo 주위에 진입하여 토마토를 쏟아 놓는다. 물대포 신호가 떨어지고 총성 없는 유쾌한 전쟁이 드디어 시작된다.



뿌려지는 토마토 전체 무게가 무려 160톤에 달한다. 튼실하니 개당 250g이라 어림잡아도 64만 알이라는 어마어마한 계산이 나온다. 감이 오시는지? 주스 한 잔에 토마토 2개씩 착즙 한다 면 동시에 32만 명이 마실 수 있는 분량을 한꺼번에 거리에 쏟아붓는 것이다. ‘세계 최대 규모의 푸드 파이트’라는 타이틀이 무색하지 않다. 먹는 거 갖고 장난치는 거 아니랬는데,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이라는 본질 상 이성의 잣대를 갖다 대서 살아남을 수 있는 축제는 솔직히 몇 안 될 것이다. 어쨌든, 이 정도 규모의 토마토는 부뇰의 작황량만으로 충당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인근 다른 마을에서 날라한다. 비용 절감을 위해서 저렴한 서부의 엑스트레마두라 주에서 주로 공수해 온다고 한다.



공놀이나 눈싸움처럼 편안하고 낭만적인 분위기를 상상했다면 오산이다. 아비규환, 말 그대로 전쟁터란 걸 깨닫는데 채 10초도 걸리지 않는다. 뭘 던져보기도 전에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를 묵직한 한두 방을 먼저 얻어맞고 나면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곧장 자동 광란 모드로 진입이다. 맞으면 꽤나 아프다. 으깨서 던지라는 룰이 있긴 하지만 딱히 그걸 지키는 사람은 없다. 그나마 다행인 건 토마토가 푹 익어 잘 문드러진다는 것. 그렇다고 또한 우습게 볼 즙이 아니다. 벌건 얼룩이 좀 묻는 정도라고 생각하면 진짜 오산이다. 얼굴이고 머리카락이고 온몸이 케첩처럼 토마토 물과 과육에 절여진다고 면 된다. 토마토 안에는 구연산이 들어있다. 눈퉁이가 밤퉁이 아니 토마토퉁이가 되고 쓰라린 즙까지 점막으로 받아들이고 나면 말 그대로 앞에 뵈는 게 없어진다. 전투에 승리하기 위해 따라서 반드시 준비해야 할 필수템은 물안경! 큼지막한 스키 고글 쓴 사람이 짱 먹는 게임이다.



말만으로는 이 유쾌한 아수라장을 제대로 설명하기 어렵다. 처음엔 덩어리가 손에 제법 잡히다가 이내 현장엔 시뻘건 국물만이 넘쳐흐른다. 안전을 위해 야들야들한 플라스틱 컵에 담아 파는 맥주나 상그리아는 얼른 마셔버리고 그 컵으로 바닥의 걸쭉한 수프를 한가득 퍼담아 때려 붓는 목욕탕 바가지 작전을 써야 한다. 토마토 더미를 말 그대로 산처럼 쌓은 덤프트럭은 전투 와중에도 몇 차례 더 찾아온다. 어떤 트럭엔 토마토와 사람들이 함께 타 있다. 돈 좀 지른 VIP들인가 보다. 트럭 위 토마토 귀족들과 땅 아래 평민들 사이 공성전을 방불케 하는 빠알간 수류탄 수천 개가 허공을 가르며 날아다닌다. 축제가 끝나도 아쉬움에 자리를 뜨지 못하는 무리들은 발목까지 잠기는 토마토 강에서 물장구를 치며 못다 푼 여운을 즐긴다. 역시 온몸을 던져 부대끼는 해방감이 제일이다.



토마토 전쟁은 굵고 게 딱 1시간이다. 1시간이면 충분하다. 전쟁이 끝난 후 광장은 온통 시뻘건 토마토 파편으로 뒤덮인다. 기다렸다는 듯 소방차가 출동해 물청소를 싹 한다. 재밌게도 토마토의 구연산이 세제 역할을 하기 때문에 마을의 묵은 때를 싹 벗겨준다. 주변 흰색 집들은 축제 전 미리 파란색 방수천을 덮어두어서 탈이 없다.


문제는 사람이다. 동네는 씻어도 사람은 씻을 데가 마땅치 않다. 군데군데 마을 주민들이 호스를 들고 나와 물을 뿌려주거나 아니면 알아서 물가를 찾아내야 한다. 동네 개울가를 어렵게 찾아도 위쪽에서 남들 씻은 국물이 졸졸 흘러 내려온다. 점잖게 눈치 볼 때가 아니다. 재빨리 움직여야 한다. 놀 땐 좋아도 끝나면 덥고 냄새나고 꿉꿉함이 말도 못 한다. 큰길로 나오면 돈을 아주 쬐금 더 씻을 수 있게 해주는 곳이 있긴 하다. 샤워 후 음료 한 잔 가격 포함이니 나쁠 건 없다.




꿀팁  


1. 가는 법 / 자는 법:


일 년에 단 하루인 데다 교통편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수만 명의 경쟁자들 틈에 잘 데를 구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전날 도착해서 밤새 술파티를 하고 길에서 노숙하는 사람도 있는데 방법이긴 하지만 안전문제도 있고 고되다. 직접 운전하는 것도 쉽지 않다. 아침 7시부터 차 통행을 막기 때문에 행사가 열리는 시내까지 인파를 헤치고 걸어가야 한다. 작은 마을이지만 터미널이나 기차역에서 광장까지 리가 제법 된다. 자칫 행사 시간을 놓칠 수 있다.


시간도 절약하고 몸도 편하려면 돈을 조금 투자해 사전에 왕복 티켓을 구입하면 된다. 바르셀로나, 마드리드, 말라가 등 대도시에서 출발하는 관광버스 상품이 있다. 난 바르셀로나에서 당일치기 서비스를 이용했다. 까딸루냐 광장 하드록카페 앞에서 새벽 2시 반에 출발해 축제에 참가하고 그날 저녁 8시에 돌아오는데 입장료와 티셔츠 포함 75유로였다. 장거리 교통비와 기회비용을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2. 준비물:


겉옷은 물론이고 신발이랑 속옷까지 버릴 각오를 하는 게 좋다. 더러워지는 게 문제가 아니고 솜털 한 터럭까지 깊숙이 아로새겨지는 냄새가 빨아도 빨아도 지워지질 않는다. 잔머리 쓰는 친구들이 신발 한번 살려보겠다고 청테이프 둘둘 감아온 걸 본 적이 있는데 부질없는 짓이다. 그냥 깔끔하게 더 이상 입지 않 옷으로 참가 후 미련 없이 버리고  것을 추천한다. 또한 쪼리나 슬리퍼는 분실되거나 다칠 위험이 있으므로 웬만하면 운동화를 신을 것.


휴대폰이나 카메라에 방수 케이스는 필수다. 셀카봉 같이 길고 딱딱한 건 위험하다고 반입이 안 된다. 하나 더. 방수팩은 목걸이형으로 준비하거나 스트랩으로 손목에 단단히 감아둘 것. 생각 없이 룰루랄라 그냥 들고 있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날아가서 다시는 만나지 못할 확률 100%.


3. 기타:


어딜 가나 줄을 잘 서야 하는 건 국룰이다. 늦지 않게 미리미리 중앙 광장으로 내려가서 입장용 팔찌를 나눠주는 부스 앞에 줄을 선다. 팔찌를 낀 확인돼 별도의 토마토 전투 지역에 입장할 수 있다.


안전에 유의한다. 병이나 단단한 물체 반입을 금한다. 일부러 남의 옷을 찢는 등 성범죄도 조심한다.


아이들을 위한 토마티나 인판틸 Tomatina Infantil이라는 미니 전투도 있다. 4~14세 어린이 대상이다. 애피타이저 격으로 본 행사 전 주 토요일에 약 30분 간 열린다. 만약 아이를 동반한다면 아이 에 연락처 같은 걸 적어 두는 게 좋겠다. 미아 되기 딱 좋은 환경이기 때문이다.



마무리


올해도 여행을 참으로 즐길 줄 아는 많은 모험가들의 무용담이 기대된다. 이 글 또한 여러분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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