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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원 May 07. 2023

갓 세이브 더 킹

대관식으로 둘러보는 영국여행


전 세계 돌아다닌 나라 중에 영국에 유달리 애정이 있는 것도 아닌데 [영국 중세사]라든가 [왕실 비화] 같은 글들을 몇 차례 썼다. 얘기할 거리가 많기도 하거니와 알려질 기회도 상대적으로 많았던 근대 최강국이었기 때문이지 싶다. 한데 배배 꼬인 배선줄 같아 당최 정리되지 않는 유럽의 족보 가운데 그나마 독자적 인식이 용이한,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왕실을 소유한 나라. 그 나라의 왕좌에 새 군주가 올랐다.


2023년 5월 6일, 영국 런던에서 찰스 3세의 대관식이 3시간 반 동안 펼쳐졌다. 가장 최근이 어머니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1953년에 있었으니 무려 70년 만이다. 일흔다섯의 나이에 쓰게 된 참 오래 기다린 왕관이다. 엄청난 경비와 수많은 인원, 군주제 폐지하라는 민원까지 화제가 된 세기의 대관식의 몇 가지 화제를 정리해 봤다.



1. 대관식? 즉위식?


작년 9월 8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승하 직후에도 찰스 3세의 즉위식이 있었다. 즉위식은 내가 왕이다 선포하는 proclamation이고 대관식은 말 그대로 왕관을 쓰는 coronation이다. 세인트 제임스 궁에서 있었던 즉위식에서 이미 국왕의 위치가 공식화되었으므로 실무적으로는 사실상 더할 것이 없지만, 영국의 상징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왕관을 머리에 제대로 쓰는 대관식은 그 자체로 상징적인 의미가 강하게 존재한다.


대관식은 영어로 코로네이션 coronation인데, 왕관을 뜻하는 corona가 어원이다. 코로나 하니까 무슨 코로나 바이러스 따라한 거냐 할 사람이 있을까 모르겠지만 맞다 그 코로나가 이 코로나다. 당연히 따라한 쪽은 바이러스다. 모양이 왕관처럼 생겨 이름을 그렇게 붙였다. 코로나 창궐하고 매출이 급감한 멕시코의 코로나 맥주는 무척 억울한 노릇이다. 폼나는 왕관 맥주가 하루아침에 바이러스 맥주 이미지를 갖게 돼 버렸다.



2. 미디어에 의해 주목된 소품들


 -1) 다이아몬드 주빌리 마차


버킹엄 궁에서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갈 때 찰스 국왕 부부는 여덟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를 탔다. 눈썰미 좋은 분은 갈 때와 올 때 마차가 달라진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가는 길엔 검은색 바탕에 황금색 테두리를 둘렀는데 오는 길엔 완전히 샛노란 황금마차로 바뀌어서 돌아왔다. 이 마차가 오리지널 황금마차인 골드 스테이트 코치이다. 옛것답게 목재에 승차감이 좋지 않기로 악명이 높기 때문에 2014년에 다이아몬드 주빌리 스테이트 코치라는 이름의 알루미늄 마차를 새로 만들었다. 유압식 서스펜션에 전동 창문, 에어컨까지 갖춰 고령의 국왕 부부의 예식장 출근길을 조금이나마 안락하게 하였다.




 -2) 킹 에드워드 왕좌


ㅅ자 모양으로 등받이가 뾰족하게 올라간 나무 의자 하나가 웨스트민스터 사원 제단 바로 앞에 놓였다. 딱 봐도 오래돼 보이는 게 뭔가 사연이 있는 유물 냄새가 물씬 난다. 1300년에 만들어져 대대로 대관식 전용으로 쓰인 에드워드 왕의 의자다.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 나오는 왕좌는 칠 왕국의 도검을 몽땅 녹여 붙여 위압감이 장난 아닌데 진짜 왕좌는 무척 단순하고 투박하다. 하지만 투박한 외양에 숨은 사연이 깊다.  



의자 아래엔 '스콘의 돌 the Stone of Scone'이라는 돌덩이가 끼워져 있었다. 구약 성서의 야곱이 천사와 밤새 씨름을 하고 베고 잤다는 전설의 돌베개다. 스코틀랜드 왕들이 이 돌 위에서 왕이 되곤 했는데 1296년에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가 뺏어서 런던으로 갖고 왔다. 에드워드 1세는 잉글랜드의 진흥왕 같은 인물이지만 스코틀랜드 입장에선 잔혹한 점령자다. 던바 전투에서 스코틀랜드 인들을 도륙한 에드워드 1세는 대관식용 의자를 주문제작해서 스코틀랜드에서 뺏어온 스콘의 돌을 그 밑에 끼워놓았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통일 국왕임을 선포한 것이다. 스코틀랜드 인들에겐 아픈 역사가 담긴 돌과 의자가 아닐 수 없다. 이번 대관식에서 의자 밑에 어디 돌이 있나 찾으려 했다면 끝까지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프리덤을 외치는 스코틀랜드를 달래기 위해 1996년에 진작 반환했기 때문이다.


의자를 유심히 살펴본 분들은 돌 대신 다른 걸 발견했을 것이다. 아무리 오래됐다지만 왕좌 치고는 너무 관리가 안 된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나무 등받이 상태가 엉망이다. 누구누구 왔다감 하고 몰상식하게 새겨 넣는 관광객 이름 같은 글씨들이 빼곡하게 파여 있다. 맞다 정말 관광객들의 낙서들이다. 거진 800년 가까이 된 오랜 역사에 수난을 당하지 않았을 리 없다. 18세기까지만 해도 관광객들이 돈을 내고 의자에 앉을 수 있어서 이니셜을 새기는 건 물론 기념품 삼아 모퉁이를 떼어가기도 했다고 한다. 1914년에는 폭탄 테러도 당했다고 하니 제대로 사연 많은 앤틱 가구라고 하겠다.



 -3) 성 에드워드 왕관  


성 에드워드 왕관은 12세기 참회왕 에드워드의 성물에서 비롯된 것으로 1661년 찰스 2세가 왕정을 복고하면서 새로 제작했다. 순금 22캐럿에 루비, 사파이어 등 형형색색의 보석 444개로 꾸며져 무게 2.23㎏에 달한다. 워낙 무거워서 엘리자베스 2세 여왕도 대관식 때에만 쓰고 이후론 런던탑 안에 고이 모셔두었다. 영국 왕실의 상징으로 각종 문장에 이용되며 영국 여권에도 왕관 문양이 들어가 있다.


한편, 커밀라 왕비도 왕관을 썼다. 그녀가 쓴 것은 찰스의 증조할머니인 메리 왕비가 1911년 대관식 때 쓴 왕관이다. 왕관도 왕관이지만 호칭의 변화 자체가 큰 의미다. 이번 대관식의 초청장에서 퀸 커밀라라는 명칭이 비로소 사용됐다. 이로써 퀸 콘소트(왕의 배우자)로 불리던 것에서 정식 왕비 직함을 부여받은 것이다. 그동안 커밀라는 퀸은커녕 다이애나처럼 프린세스 칭호도 받지 못하고 콘월 공작부인으로만 불렸다.


무미건조한 표정의 찰스와 달리 커밀라는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그런 커밀라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그 자리에 다이애나가 앉아있는 모습을 떠올렸을 것이다. 프린세스 다이애나가 아닌 퀸 다이애나. 나도 잠시 마음속 CG로 그녀의 얼굴을 합성해 보았다. 그런데 정작 하늘에서 지켜봤을 다이애나 본인은 그리 아쉬워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자유 없이 살다 환갑을 넘긴 퀸이 되기보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한 프린세스로 남는 것에 더 만족하지 않았을까.



 -4) 오브(Orb), 셉터(Sceptre)


머리에 왕관을 쓴 찰스 국왕은 한 손에는 여의주 같은 구슬을, 다른 손에는 긴 지팡이 같은 걸 들었다. 이것들은 레갈리아 Regalia라고 부르는 왕권의 표상들로서 크리스챠니티의 전통도 담고 있다. 보주라고 해석되는 오브는 멜론 사이즈의 둥근 황금공 위에 십자가가 올라있는 것으로, 이 세상(지구)의 왕이 왕 중의 왕 신으로부터 권위를 부여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왕의 통치권을 상징하는 왕홀, 셉터 위에도 성령을 뜻하는 비둘기가 붙어있다. 사실 이밖에도 왕좌에 앉은 찰스는 반지 팔찌 장갑 목도리 망토 박차까지, 각종 쓰고 끼고 들고 둘러야 할 것들에 둘러싸여 한동안 힘들어 보였다. 견뎌야 할 무게는 왕관만이 아니었다.




3. 보검을 든 여인


레갈리아의 중요한 또 한 축은 보검이다. 커타나 Curtana 또는 자비의 검 Sword of Mercy으로 불리는 이 보검의 길이는 1m 21㎝, 무게는 3.6㎏이다. 검 끝은 떨어져 나가 뭉툭한데, 이번 대관식에서 보검보다 더 주목을 받은 건 그걸 들고 서 있던 파란 예복의 여인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페니 모돈트, 추밀원 의장이다. 딱 봐도 무거워 보이는 긴 검을 정확히 수직으로 들고 식 내내 한 치의 움직임도 없이 왕의 곁을 지킨 그녀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추밀원(Privy Council)은 왕의 자문기관인데 지루한 기관 이야기는 나중에 기회 되면 하고, 우린 사람 얘기를 해보자. 페니 모돈트 의장은 작년 9월 10일 찰스 3세의 즉위식에서도 이미 현장 진행을 맡은 바 있다. 1973년생인 그녀는 보수당 소속 정치인으로 언젠가 총리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인물이다. 얼마 전 실시된 당 대표 경선에서 리시 수낙 현 총리를 잇는 득표로 2위를 차지하면서 돌풍을 일으켰다. 심지어 테레사 메이 총리 시절에는 영국 최초로 여성 국방장관을 맡기도 했다. 괜히 검을 들고 있었던 게 아니라는 얘기다. 대관식 전 인터뷰에서 페니 모돈트는 무거운 보검을 든 채 기절하지 않고 오래 서있기 위해 팔굽혀펴기 운동을 엄청나게 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절대 여리여리한 여인이 아니다. 사진을 하나 소개하겠다. 2019년 당시 한영 국방장관 간의 회담 사진이다. 이하 설명은 생략하겠다.



4. 친숙한 음악들


국왕의 마차가 버킹엄궁을 나설 때부터 다시 들어갈 때까지 줄곧 연주되던 노래가 있었으니 영국 국가 God Save the King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신의 곁으로 갔으니 갓세이브더퀸이 70년 만에 킹으로 바뀌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겐 "피난처 있으니"로 익숙한 찬송가가 영국 국가였다는 사실이 놀라울 것이다. 영국뿐 아니라 리히텐슈타인의 국가이기도 하고 옛 스위스와 아이슬란드, 심지어 독일과 러시아 제국의 국가였던 적도 있다. 두루두루 쓰임새 좋았던 히트곡인 셈이다. 16세기 바로크 음악이라는 사실 외에 작곡가나 유래에 대한 정확한 사실은 알려져 있지 않다. 가사가 3절까지 있는데 2절은 적들을 쳐부수게 해 달라는 내용을 담고 있어서 거의 불리지 않는다는 점이 특기할만하다.


영국에서 국가보다 더 국가처럼 사랑받는 곡은 단연 <Pomp and Circumstance>이다. 흔히 '위풍당당 행진곡'으로 알려진 이 곡은 에드워드 엘가가 1901년 에드워드 7세의 대관식에 사용하기 위해 작곡한 행진곡이다. 'pomp and circumstance'는 '장려한 의식 또는 행사'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오델로> 3막 3장의 대사에서 따왔다. 이 노래에 대한 자세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는 예전 글에 써놓은 게 있으니 참고하시면 좋겠다.
https://brunch.co.kr/@ez1pd/49


대관식 초반 웨스트민스터 악단의 연주 중 익숙한 선율이 하나 더 들렸는데 영국의 대표 작곡가 구스타브 홀스트의 The Planets (행성 모음곡) 중 Jupiter (목성)이었다. 화성부터 해왕성까지 점성술을 음악으로 옮기기라도 하듯이 우주적 분위기를 풍기는 관현악 시리즈인데 영화 <스타워즈>에서 일부분을 차용하기도 했다. 대관식에 '목성'이 등장한 이유는 중간부 선율에 애국심을 고양하는 '조국에 대한 맹세'의 가사가 덧붙여졌기 때문일 것이다.




5. 영연방 왕국 Commonwealth realm


대관식을 위해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찾은 귀빈들은 주인공인 국왕 부부와 윌리엄-캐서린 왕세자 가족에 앞서각국 정상 사절단부터 전 수상단, 그리고 영연방 국가들 대표와 현 PM 순서로 입장했다. 특히 찰스 국왕 바로 앞에 영연방 국가들과 현 총리가 입장한 것은 정치적인 의미를 지닌다. 영연방 국가 대표들은 국기와 함께 앤티가바부다, 오스트레일리아, 바하마, 벨리즈, 캐나다.. 와 같이 알파벳 순서로 입장했다. 마치 올림픽 참가국 입장 장면 같은 광경이었다. 이쯤에서 고질적인 궁금증이 고개를 든다. 영국은 도대체 어디까지가 영국인 거야?


우리말로는 영국, 하면 간단히 끝나는데 영어로 하자면 따져야 할 게 뭐가 많다. 영국사람한테 무조건 아 유 잉글리시? 하면 안 된다는 얘기도 많이 들었고, 월드컵에 우리는 지역예선 티오 한 장이라도 더 받으려고 아웅다웅하는데 영국은 한 나라에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 4개 팀이나 나오질 않나. 어떨 땐 유나이티드 킹덤이라고 하고 또 어떨 땐 그레이트 브리튼이라고 하는 건 도대체 뭐가 다른 건지. 거기다가 커먼웰스..라고? 커먼센스도 아니고 커먼헬스도 아닌 것이 재산을 공유하는 무슨 경제공동운명체 같은 건가?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정리 끝내자. 벼락치기 스타일로 요점만 간략히 한다. 잉글랜드에서 시작해서 점점 커진다. 첨부하는 지도와 그림을 같이 보시기 바란다.


잉글랜드: 그레이트브리튼 섬의 한 지역.

 

그레이트 브리튼 (GB): 그레이트브리튼 섬에 있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를 더한 명칭.


유나이티드 킹덤 (UK): 그레이트브리튼 섬 옆에 있는 아일랜드 섬 북쪽의 북아일랜드를 더하면 UK가 됨.



그래서 영국의 정식 국호는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이다. 패션 심벌로도 곧잘 애용되는 영국 국기 유니온잭은 각 지역의 수호성인인 잉글랜드의 성 조지, 스코틀랜드의 성 안드레, 북아일랜드의 성 패트릭 십자가를 겹쳐 그린 것이다. 웨일스는 왜 빠졌냐고? 웨일스의 심벌은 붉은 용인데 십자가들 사이에 껴넣기가 애매해서..는 아니고, 유니온잭이 나올 때 이미 잉글랜드에 병합된 뒤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 사이에 맨 섬, 채널 제도 같은 왕실 직할령 (British Crown Dependency)

/ 버뮤다, 지브롤터 같은 해외 영토 (British Overseas Territories)들이 들어가는데,

정신 사나우니까 얘네들은 얼추 넘어가겠다)


이제 드디어 커먼웰스 차례다.


커먼웰스 왕국 (Commonwealth Realm): 영국 국왕을 (이제는 찰스 3세) 군주로 삼는 나라들이다. 2023년 현재 앤티가바부다, 호주, 바하마, 벨리즈, 캐나다, 그레나다, 자메이카, 뉴질랜드, 파푸아뉴기니, 세인트키츠네비스, 세인트루시아, 세인트빈센트그레나딘, 솔로몬 제도, 투발루, 그리고 영국까지 총 15개국이다. 이들이 대관식에서 알파벳 순서로 입장한 국가들이다.


여기서 더 확대하면 영연방 회원국 (Commonwealth of Nations)이 나온다. 이른바 영국적 가치를 공유하고 지향하는 국가들의 모임이다. 쉽게 생각해서 영국과 관련 있거나 영국을 좋아하는? 인도, 싱가포르, 남아공 등 각 대륙에 56개국이나 되는데 과거에 이래저래 영국의 통치를 받았던 경험이 있는 국가들이 다 포함되어 있다.



6. 제국의 다양성


찰스 3세는 서약에서 “모든 종교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자유롭게 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70년 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대관식 때는 없었던 대목이다. 그만큼 세상이 변했다는 이야기다. 위 영연방 문단의 지도만 봐도 과거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의 위세가 얼마나 어마어마했는지 한눈에 딱 알 수 있는데 이젠 그 과거가 발목을 잡는 원죄가 된 것이다. 이번 대관식에선 앵글로색슨만 아니라 흑인, 아시안, 터번을 쓴 유색인 등 다양한 지역의 다양한 인종들이 등장했다. 영어와 함께 웨일스어, 스코틀랜드 게일어, 아일랜드어로 찬송가를 부르고 여성 사제와 카리브해 출신 여성 남작이 역할을 맡기도 했다. 특히 종교적으로 전혀 다른 브리티시 무슬림, 힌두, 유대교 대표들이 별도의 순서를 가지고 경하하는 장면은 꽤 인상적이었다. 하긴 현 PM이 인도 출신의 힌두 신자라는 것만 봐도 세상 참 달라졌구나 싶다. 이들을 한데 품어내야 하는 것이 찰스 3세가 짊어진 왕관의 무게다. 다만, 천사처럼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짙은 피부색의 흑인 중창단이 백인 귀족들 앞에서 좌우로 몸을 흔들며 알렐루야를 외치는 식 중 한 순서에서는 19세기 세실 로즈의 제국주의가 연상되어 조금 애매한 감정이 들기도 했다. 주관적인 느낌이 그랬다는 거지 가치판단을 내리는 건 아니다.



7. 나가며, 숙제.

 

1948년생인 찰스 3세는 일흔다섯의 고령이다. 대관식 내내 양 옆에 선 비숍의 지도를 받아 식을 진행했다. 그런데, 성경에 손을 얹고 국왕으로서의 서약을 하는 실질적으로 가장 중요한 순간에 쭈뼛쭈뼛 눈치를 보며 옆에서 들어주는 쪽지를 커닝페이퍼 따라 읽는 듯한 모양새를 보였다. 그 길고 복잡한 의식을 경직된 자세로 한결같이 임하기는 젊은 사람도 쉽지 않을 테니 별 뜻이야 있었겠냐만,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입헌군주제의 나라에서 국민에게 서약하는 가장 중요한 순간에 오히려 별생각 없이 기계적으로 임하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기존에 찰스에게 씌워진 부정적인 인상이 맞물렸다. 지난 즉위식 때도 펜이 잘 안 나온다고 옆사람에게 짜증을 내는 게 생중계되는 바람에 가십이 추가됐던 찰스인데, 왠지 작고한 모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라면 더 울림 있는 장면이 되지 않았을까 아쉽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다가도, 영화나 드라마의 멋진 장면들은 다 치밀한 연출에 따라 짜인 각본과 전문 연기자에 의해 촬영된 것임을 생각하면 실제 그 옛날 군주들이라고 얼마나 진지했으려나, 더 제멋대로였지 않았을까 하고 혼자만의 현실적인 상상을 해본다.


4천 명의 로열아미가 호위하는 웅장한 왕실 행렬이 위풍당당 거리를 행진할 때 그 한편에서는 군주제 폐지를 요구하며 "NOT MY KING" 구호를 외치는 시위대가 있었다. 결국 52명이 체포됐다. 이번 대관식에 소용된 경비가 1700억이 넘으며 국민 혈세로 들이는 왕실교부금 또한 매년 그만큼씩 하다는 자료가 있다. 불륜부터 패륜, 그리고 아예 미국으로 뛰쳐나간 해리 왕자네의 폭로와 갈등까지 온갖 추문이 끊이지 않는 왕실을 21세기를 사는 영국 국민들이 계속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는 현재진행형의 논쟁이다. 군주제에 대한 반감뿐 아니라 영연방의 이탈과 지역 독립 움직임, 왕실의 역할과 재정에 대한 문제 제기 등 새 국왕이 풀어야 할 숙제는 많다. <더 윈저스>라는 영국 코미디 드라마가 있다. 제목 그대로 윈저 왕가 즉 영국 왕실을 적나라하게 풍자하는데, 캐릭터의 싱크로율이 똑떨어지고 실제 인물과 사건에 대한 묘사 수위가 아찔할 정도로 대단히 높다. 드라마가 웃기다는 얘기는 그만큼 왕실이 맞닥뜨린 현실적 문제가 많다는 방증일 것이다.


대관식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면서 한편으로 이것은 인류의 참으로 진귀한 무형문화유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군주제가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모르겠으나 (역사를 돌아보면 없어진 것 같다가도 어느새 왕정이 복고되는 일이 다반사다) 인류가 만들어 유지해 온 아주 짜임새 있는 시스템 중 하나라는 엄연한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문제는 현상을 유지할 것인가 변화를 줄 것인가일 텐데, 그 무엇보다 확실한 논거가 되는 돈의 논리에 있어서도 만일 이런 이벤트가 없는 영국이라고 한다면 지금과 같은 세계적 관심을 받을 수 있을지, 이러나저러나 인기 많은 왕실이 벌어다주고 있는 경제문화적 이익이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아닐지 궁금해졌다. 아무래도 일단 유네스코에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부터 해놓는 건 어떨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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