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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원 May 02. 2022

유로 이야기

유럽의 단군 할머니

저거 다 환전하면 환차손이 더 크겠지..

여러 나라를 여행하다 보면 미처 다 처치하지 못하고 남겨오는 그 나라 돈이 적잖이 쌓이게 된다.


남은 남의 나라 돈 끝까지 살뜰하게 털어내려고 공항 내 면세점에서 껌이라도 한 통 사고 그래도 남는 돈은 투명 아크릴로 만든 유니세프 기부통에 쏟아 넣고 와도 집에 돌아와 짐을 풀다 보면 어느 주머니에선가 짤랑짤랑 살아남은 한두 푼이 출토되기 마련이다. 일부러 수집하려고 한 게 아닌데도 그렇게 차례차례 모인 전 세계 60여 개국 화폐들한 소쿠리 굴러다닌다. 명색이 돈인데 버릴 순 없고 어디 바꿔먹을 데도 없는 것이 혹시 저금은 되나 싶어 방문한 은행에선 "저, 죄송한데 이런 나라가 있어요?" 질문만 되돌아올 뿐이다. 큰 유리단지에 담아놓고 굳이 다 헤아려본 적은 없지만 1센트 동전만 해도 몇 천 개는 되지 않나 싶다. 죄다 쇳덩어리니 무겁긴 오지게 무거워 이사 다닐 때마다 낑낑거리면서도 신줏단지 모시듯 잘도 모셔온 애물단지이자 나만의 세계여행 기념품이며 기록물이다.


마다가스카르 '아리아리'


그렇게 각양각색 다른 모양새의 화폐를 한자리에 모으다 보니 에 담긴 각 나라의 역사와 특색을 엿보게 되기도 한다.


여우원숭이가 앙증맞게 그려져 있는 이름마저 귀여운 마다가스카르의 '아리아리'는 색색 도안이 만화 같아 예쁘고, 조금만 환전해도 몇백 몇천만은 우스운 백만장자 환율의 베트남 '동'은 잠시 외환 공부를 하게 해 준다, 각 나라 돈 속에 숨어있는 다양한 역사문화적 요소들만 캐치해도 어느 가이드북 못지않은 그 나라 정보를 읽어낼 수 있다.


베트남 최고액권 50만 동은 우리 돈 2만 5천원 정도 한다.




유럽 여행이 편한 건 나라마다 제각각 달라 늘 번거롭고 헷갈리는 환전이란 숙제를 한 번에 끝낼 수 있다는 점이다.


2002년부터 유럽연합 내 유로존 (EU와 유로존이 반드시 동일한 것은 아니다) 모든 국가에서 통용되는 유로화(€)라는 초국가적인 통화 덕에 국경을 넘어도 따로 환전할 필요가 없게 됐다. 예전에는 프랑스 가면 프랑, 이탈리아 가면 리라, 독일 가면 마르크 하는 식으로 나라마다 그 나라 돈 바꾸느라 시간 다 보냈는데 말이다. 하지만 하나의 화폐를 만든다는 게 말이 쉽지 절대로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들 한 자존심 하는 나란데 모두를 만족시킨다는 게 어찌 쉬웠으랴. 흔히 조폐 시 위인의 초상을 그려 넣는 게 보통인데 이 나라 영웅이 저 나라 원수인 경우가 태반일 텐데다 특정 국가를 편들 수도 없으니 결국 인물을 배제하고 유럽의 유구한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문, 다리 등의 건축물이 도안의 재료가 되었다. (모든 나라에서 동일 디자인인 지폐와 달리 동전만큼은 나라마다 도안이 다르다)


유로 지폐는 5유로에서 500유로까지 총 일곱 권이 있는데 순서대로 고전, 로마네스크,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와 로코코, 아르누보, 현대의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마저도 특정 나라에 실재하는 실물이 아니라 어떤 나라에도 적용될 수 있는 가상의 건축물이다. '싸우지 말고 하나가 되자'는 통합의 의미를 담은 것이다. 그렉시트부터 브렉시트에 나토냐 아니냐 요즘 같아선 이 불안한 통합이 속될 수 있을지 의구심이 지만 어쨌거나 틈만 나면 통합을 강조하는 게 유럽인들이다. 그런데, 유로 지폐 속에는 또 다른 비밀스러운 통합의 상징이 하나 더 숨어있다.




Nöel-Nicolas Coypel "The Abduction of Europa", 1726-1727


옛날 옛적 그리스 신들이 올림피아에서 껌 깨나 씹던 시절에 페니키아라는 나라에 에우로파라는 어여쁜 공주가 살았다. 어찌나 미모가 출중한지 장안에 소문이 파다하여 올림피아 신전에까지 퍼졌다. 미녀만 봤다 하면 집적대기로 소문난 천하의 바람둥이 제우스가 가만있었을 리 없다. 어느 날 바닷가에서 머리에 꽃 꽂고 아무 생각 없이 놀고 있는 에우로파 공주에게 잘생긴 수소 한 마리가 접근했다. 대리석처럼 새하얗고 매끈한 뿔을 뽐내는 몸매 쭉 빠진 흰소였다. 어머 넌 어느 목장에서 왔니? 제우스가 변신한 것인 줄은 꿈에도 모르는 순진한 공주는 흰소의 등을 쓰다듬었고 그 순간 흰소는 공주를 냅다 들쳐업고 바다로 튀었다. 아리따운 에우로파 공주는 그렇게 백마 탄 왕자 대신 파도 탄 백우(白牛)에게 납치되어 바다 너머로 사라지고 말았다...



에우로파.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이름 아니신지?


모르시겠다면 질문을 바꿔보겠다. 영어로 유럽이라고 쓸 때 스펠링이 뭐더라? Europe. 이걸 알파벳 발음 그대로 읽으면? 에-우-로-페(E-u-ro-pe). 유럽이라는 대륙의 이름은 바로 이 에우로파(Europa) 공주로부터 나온 것이다. 납치 후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속절없이 백우호를 타고 지중해를 항해한 에우로파 공주는 크레타 섬으로 건너제우스와의 사이에 미노스라는 아들을 낳게 되고 미노스는 나중에 크레타의 왕이 된다.


그런데 이 집안 어째 소랑 인연이 깊다. 에우로파 시즌2에 따르면 미노스 왕이 포세이돈 신의 황소를 훔치는 바람에 그 벌로 왕비가 황소랑 사랑에 빠지는 해괴망측한 사건이 벌어지고, 그 결과 인간의 몸에 소의 얼굴을 가진 흉측한 아들을 낳고 말았으니 그가 바로 사람 잡아먹는 크레타 미궁의 괴물 미노타우로스다. 신화긴 하지만 참 답 없는 콩가루 집안 아닌가? 할머니는 소(로 변신한 제우스)한테 보쌈당하고 그 며느리도 소랑 정분이 나더니 그렇게 나온 손자는 아예 반인 반소였다는 얘기. 정말 이런 소족보가 있나. 우리 배달민족에겐 웅녀의 곰 신화가 있듯이 아마도 유럽인들은 스스로를 소의 자손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비밀 초상창 속 파마머리 에우로파 할머니


에필로그:

여느 지폐가 그렇듯 유로 지폐에도 위변조를 방지하기 위한 첨단 기술들이 존재한다. 그중에 하나, 유럽 중앙은행에서 자랑스럽게 도입한 것이 바로 '초상화 창' 트릭이다. 2013년부터 발행되고 있는 신권을 보면 오른쪽 귀퉁이에 작은 초상화 창이 그려져 있는데 평소엔 잘 보이지 않다가 지폐를 들어서 빛에 비춰보면 숨어있던 파마머리 여인처연한 얼굴이 드러난다. 워낭소리사랑한 유럽의 단군 할머니, 에우로파 공주의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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