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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다르의 책방 Sep 08. 2024

왜 그렇게 화나셨어요?

죄인은 왜 죄인이 되어야 했나

보편자로 기능하는 아버지의 이름으로부터 항상 등 떠밀리듯 쫓겨나는 이들. 종종 폭력과 죄의 원천으로 작용하고, 사회는 그러한 죄인, 혹은 범죄자들을 추방하거나 처벌하며 희열을 느낀다. 가장 실제적인 예시는 감옥일 테다. 사회가 약속했다고 가정되는 규칙으로부터 소외된 자들, 그들의 격리는 단순히 물리적 차원을 넘어선다. 비교할 바가 아니지만 당연히 사춘기 아들이 부모와 대화하기 싫다며 문을 걸어 잠그는 것과는 격이 다르다. '엄마는 날 이해 못 해!'라며 문을 쾅 닫는 철부지와 달리, 그들은 사회가 음지로 설정해 놓은 영역으로 떠밀리며 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다시는 이해받을 수 없게 된다. 이로써 아버지의 이름은 승리의 영광을 자축하며 자신이 설정한 보편자의 순환고리가 잘 작동하고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다시는 그것을 이해할 여지조차 남겨두지 않고 밀어버리는 것, 정신분석은 그것을 억압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정의가 범죄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면 도덕적 잣대는 잠시 미뤄두고, 스올의 낭떠러지로 밀어버리는, 사회적 살인행위 또한 억압의 범주에 넣어볼 수 있겠다. 가시적 현상으로 예를 들어보자면 언론에 보도된 온갖 범법행위에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을 살펴볼 수 있을 텐데, 사람들은 항상 화내는 역할을 담당한다. 마치 십자가를 진 예수가 지나간단 소식에 약속이라도 한 듯 몰려와 돌을 던지는 유대인들처럼 말이다. 저런 더러운 성범죄자는 물리적 거세를 당해도 마땅하다는 둥, 국회의원 월급을 반토막 내버려야 한다는 둥, 마치 그들 자신이 그런 일을 당한 것처럼 기세등등하게 분노를 쏟아낸다. 물론 분노의 이면에는 그들이 왜 그런 일을 벌였는지 이해하지 않으려는 강력한 동기가 작동한다. 이해하게 된다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길래?


실정법은 인간 사회에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기본적인 장치다. 우리는 법을 지키면서 사회의 일원으로서 안정과 조화를 이루려 한다. 하지만 실정법에 대한 존경심이 사라질 때, 그 법의 권위는 약해지고, 사회 질서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때 나타나는 것이 실재의 아버지다. 실재의 아버지는 존재하되 그 자체로 드러나지 않고, 우리가 신경 쓰지 않을 때는 숨겨져 있다. 하지만 법의 권위가 약해지면, 그 응시는 점점 더 뚜렷해지며 우리를 압박한다. 이 실재의 응시는 피하고 싶다. 그것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고 통제할 수 없는 어떤 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회피하기 위해 상징계의 대타자를 소환한다. 상징계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세계, 사회적 규칙과 질서로 구성된 현실을 의미한다. 대타자는 그러한 상징계의 중심에서 우리에게 규칙과 기준을 제공하는 권위적 존재다. 


대타자는 내면법과도 연결된다. 내면법은 때로 실정법과 일치하기도 하지만, 더 많은 경우에는 일치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각자 나름의 도덕적, 윤리적 기준을 가지고 있으며, 실정법과 충돌할 때 혼란이 생긴다. 그러나 내면법조차 실재의 응시 앞에서는 무력하다. 실재의 아버지가 상징하는 자연법, 즉 우리가 알지 못하는 법은 인간이 만든 어떤 법보다 더 근원적인 힘을 지닌다. 이 실재의 법은 마치 반으로 접힌 것처럼 이해하지 못하는 영역에 숨어 있다. 완전히 이해할 수 없기에 우리의 법 체계는 언제나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실정법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려 하지만 그 안에는 언제나 우리가 모르는 법칙, 곧 실재의 아버지가 웅크려 숨어 있다. 그 법칙이 드러날 때, 우리는 당혹감을 느끼고, 혼란에 빠지며, 그 혼란 속에서 죄인에게 분노를 느끼게 된다.


그러나 분노의 근본은 단순히 법을 어긴 자에게만 향하지 않는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계에 대한 두려움라고 말하는 편이 낫다. 실재의 응시는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무질서의 가능성을 제시하여 우리를 불안하게 만든다. 그래서 불안감을 억누르기 위해, 실재의 아버지의 무거운 응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각자의 신을 만든다. 이 신이야말로 우리가 만들어낸 일종의 상징적 질서의 대리물이다. 신을 통해 실재의 무게를 덜어내고, 자신만의 법칙과 규칙을 부여하며, 실재의 응시로부터 잠시나마 자유로워지려고 한다. 


따라서 범죄자에 대한 분노는 사회적 질서가 무너질 때 느끼는 불안과 직결되어 있다. 이 불안은 단순한 규칙을 위반한 어린아이가 지레 겁먹는 것과 질적으로 다르다. 흥미로운 사실은 불안을 피해 신을 만드는 과정마저도 너무나 뻔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마치 정해진 길을 걷는 것처럼, 신을 만들고 그에게 의미를 부여하지만, 그 과정은 새롭지 않고 진부하기에 짝이 없다. 범죄현상의 도미노 효과를 말하는 것조차도 진부하다. 그보다는 실재와 상징의 경계에서 우리가 항상 마주하게 되는 근본적인 문제다. 인간은 실재의 아버지의 응시를 피하기 위해 법을 만들고 신을 창조하지만, 그 경로마저도 결국 실재의 무게를 벗어날 수 없다.


지젝이 지적한 바, 의처증은 그 결과를 정확히 예측했더라도 병적이다. 우리 사회가 제대로 지탱되지 않는 것은 저 규칙 위반자들 때문이라고, 연쇄살인마, 강간범, 방화범과 같은 흉악범죄자들 때문이라고, 처벌이 가벼워 법을 우습게 아는 저 사이코패스들 때문이라고, 한국법과 문화를 존중하지 않는 무지한 이민자들 때문이라고, 엄한 데 매를 들어봤자 변하는 건 하나도 없으며 결국 같은 문제를 마주한다. 우리가 마주한 실존의 근본적 불안이란 그따위 시시한 변명으로 치부될 수 없다.


도리어 위험한 가설을 시험해보면 어떤가? 눈을 질끈 감고 저 멀리 낭떠러지로 죄인을 밀어버린, 당신의 피 묻은 손에, 거기에 실재가 있다고. 무엇이 그토록 당신을 화나게 했기에 그 사람은 죄인이 되어야 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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