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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아브 Jan 01. 2023

고지식한 남자의 3가지 장점

철저히 함구하는 과거 연애사

"아니 나 진짜 그냥 궁금해서 그래, 전여자 친구 얘기 조금만 해 주면 안 돼??"



연애 초반에는 그의 구여친 스토리가 너무 궁금했다. 자연스럽게 알게 된 지 4-5개월 정도만에 연애를 시작해 그의 과거에 대해서는 일절 아는 게 없었다. 주변에 연애 중이거나 이미 결혼한 친구들을 보면 서로의 과거를 대강은 알고 있는 경우가 꽤 많았는데 말이다. 연애를 시작할 당시에도 사실 뭐 말해주지 않아도 상관은 없었지만, 내가 궁금했던 것은 구체적인 일화가 아니라 그저 몇 명 만나봤어? 얼마나 오랫동안 만났어? 같은 호구조사 정도인데 하도 말해주지 않으니 오기가 생겨 더더욱 때때로 장난치듯 물어봤던 것 같다. 여태까지 한 20번 정도. (나는 그게 굳이 왜 궁금했을까?)


물어볼 때마다 항상 눈짓으로 그만하라는 눈치를 주던 단장 오빠는 어느 날 말했다.


"그거 알아서 좋을 게 대체 뭐가 있노?"

"아니, 나쁠 건 뭐야? 나 막 구체적인 게 궁금한 게 아니라 그냥 몇 명 만나봤는지, 제일 오래간 건 얼마나 되는지 이 정도만 궁금한 건데!!(하도 안 말해주니 쒸익쒸익) 오빤 내 과거 안 궁금해?"

"어, 난 하나도 안 궁금하다. 지금이 중요하지 그거 내가 알아서 뭐 하는데? 니도 지금은 가볍게 들을 테니 말해달라고 하지만 나중에 어느 포인트에서 어떤 걸로 기분이 상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 건 서로 모르는 게 베스트야"


와, 이렇게까지 사람이 꽉 막혔을 수 있나? (물론 계속 캐묻는 내가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그게 뭐가 대수라고, 그냥 좀 말해주면 어디 덧나나- 싶었다가 하도 단호해서 어느 순간부터는 물어보는 것을 관두게 되었다. 그는 정말로 인생을 본인이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기준에 맞게 FM으로 사는 사람이라 이 정도면 천지개벽이 일어난 들 말해줄 리 만무한 인간.


(숨기면 더 의심스럽지 않냐는 친구가 있었는데 오히려 과거가 제로라 민망해서 성내는 거 아냐? 쪽이 더 가능성 있어 보였던 건 비밀)


결과적으로 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는 한 번도 자기 입으로 나의 과거 연애사를 묻지 않았고 우리는 서로 그 부분에 있어서는 시원하게 오픈한 적이 없다. 사실 이제는 궁금한 마음도 옅어져 간다. (이제와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어릴 때부터 만나 오면서는 "그걸 아는 게 우리 관계에 무슨 도움이 되는데" 스탠스를 고수하는 모습이 소위 말해 '노잼'이고 고지식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와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의 <서로의 과거는 가볍게라도 캐묻지 않고 함구한다>는 원칙이 지금의 단정한 우리 관계를 만드는 데 한몫한 것 같다. 과거 연애에서 기인한 아주 작은 다툼조차 우리에겐 없었고 삶에서 가장 사랑한 연인은 서로라는 순수한 믿음이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믿음을 깨지 않기 위해 매 순간 노력하는 것임을 안다.




이렇듯 나의 고지식한 남편(a.k.a. 구남친)은 내 속을 뒤집을 때도 있지만 8년간의 DB를 파헤쳐 보면 고지식남에겐 뚜렷한 몇 가지 장점이 있다.



예측이 가능하다


그의 성격이나 취향 측면에서 디테일하게 들어가자면 아직도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 때가 종종 있다. 하지만 그 새로운 모습으로 만들어지는 상황조차 내 예측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우리 집 고지식남은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거지, 매사 괜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애매하게 행동한다거나 결정을 못해 헤매지 않는다. 연애 초반부터 마치 결혼 적령기에 남편감을 만난 것처럼 지독한(?) 안정감이 있었고, 단 한 번도 나를 불안하게 혹은 불필요한 신경을 쓰게 만들지 않았다.



듬직하다

단단한 주관을 가진 고지식남은 많은 상황에서 큰 의지가 된다. 나는 가끔 그와 동일 선상에서 인생을 함께 걸어가는 느낌과 더불어 내 뒤를 따라 걸으며 나를 받쳐주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특히 고민을 나눌 때 참 좋은데, 본인의 고지식하지만 안전한 주관을 기준으로 해 주는 조언을 들으면 그게 맞던 틀리던 그냥 안심이 된다.



선을 지킨다

예측과 통제, 그리고 본인이 감당 가능한 범위 내에서만 행동하는 우리 집 고지식남은 사람 사이에 절대 선을 넘는 법이 없다. 상대적으로 포용 상한선이 높은 만큼 어쩌면 남의 선도 나도 모르게 넘나들 위험이 있는 나의 특징을 보완해 준다. '워-워-'






쓰고 보니 오늘도 내 옆을 든든하게 지켜 주는 단장 오빠의 존재에 참 감사하다. 점심엔 라면을 팅팅 불려 끓여 왔길래 굶주린 예민함에 조금 짜증을 냈는데, 오늘 저녁은 같이 맛있는 거 해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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