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 - 종로서적과 교보문고

2025년 한국 여행 이야기 4 (부제: 김경미 시인의 시)

by memory 최호인


1.


여의도에서 친구를 만나고 돌아온 늦은 오후.

뭔가 시작하기도 하루를 마치기도 애매한 오후 4시.


이럴 때 헤어지면 다음엔 뭘 해야 할지 참 막연해진다. 낮도 아니고 저녁도 아니라, 조금 기울어진 햇살을 바라보지만 거기서 시나브로 다가서는 어둠을 짐작하기도 어렵다. 조금 있으면 러시아워. 거리로 더 많은 사람들이 튀어나올 텐데 나는 뭘 해야 하나. 그냥 숙소로 갈지 뭔가 새로 시작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가 복잡해진다.


용인으로 간다면서 함께 신논현역으로 왔던 친구는 무심히 총총 떠나가고, 나는 지하철에서 오르락내리락 길을 잃는다. 신분당선을 그냥 타면 숙소로 갈 수 있지만, 숙소로 가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판단한 나는 이 역 바깥에 있는 교보문고 강남점을 생각해 냈다. 다행히.


며칠 전에 이 근사한 서점에서 비교적 저렴한 가격의 니체 책들을 발견하고 조금 샀다. 그 책들을 나는 이미 아마존 킨들에 영어 책으로 가지고 있지만 처음만 조금 읽다가 말았다. 뭔 소린지 이해가 안 돼서. 창피하지만, 영어 실력이 문제인지 철학 수준이 문제인지 그 모양이다. 하여간 니체를 읽기는 영 쉽지 않다.


교보문고.

이렇게 큰 서점에 들어오면 기분이 좋아진다.

아무도 나를 방해하지 않을 테니, 나는 거대한 책의 바다를 천천히 유영할 수 있다.


2.


어린 시절, 내가 가장 사랑하는 서점은 종로서적센터였다.


이미 오래전에 사라져서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종각역에서 내려서 자주 가던 곳이다. 나의 중고등학생 시절, 수많은 학생들이 다녔던 단과반 학원과 당대에는 가장 현대식이었던 빵집이 밀집된 곳이 종로였다. 혹시 독일빵집이나 크라운제과 같은 이름을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책 읽다가 다리 아프면 가고 친구들을 만날 때도 가고 빵이 먹고 싶어서도 가던 곳이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카페가 흔하지 않은 시대였으며, 아직 미성년자라서 다방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당시에 다방은 중고등학생이 출입할 수 없는 곳이었다.)


골치 아픈 일이 있거나 고민이 생겼을 때, 잠시 눈을 붙이고 앉아 있고 싶을 때, 또는 더욱 진정한 의미에서는 고전음악을 감상하고 싶을 때, 내가 찾아가곤 했던 고전음악감상실 ‘르네상스’가 있던 곳도 그 근처다. 르네상스에 가면 거대한 음량으로 음악을 들려주는 당대 최고급 스피커가 있어서 고전음악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곳이었고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이 사랑하고 모여들던 곳이었다. 나의 대학시절에는 종로 뒷골목에 있는 술집과 다방을 곧잘 전전하기도 했다. 경양식 레스토랑이 유행하던 시절도 그즈음이었다.


그렇게 자주 가던 종로서적 건물의 1층 좁은 로비와 입구에는 언제나 친구와 연인을 만나려고 기다리는 젊은이들이 촘촘히 모여 서 있었다. 종로서적 2층에는 중고등학교 참고서가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또 층마다 각각 다른 분야의 책들이 있었고, 나중에는 옆 건물까지 서점을 확장하기까지 했었다. 날마다 하루 종일 수많은 사람들이 종로서적으로 몰려들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종로서적보다 더 큰 서점이 생겼다. 한국 최대 서점이라는 교보문고가 광화문에 생겼던 것이다. 그래서 그때 나는 마치 거대기업의 횡포를 느끼는 것처럼 교보문고를 바라보면서 거리를 뒀었다. 의리를 중시하는 나는 ‘종로서적파’라고 자처하면서.


부수적인 진실을 말하자면, 그때 시내에서 나의 주된 동선은 종로였던 것이 내가 종로서적과 친하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고등학생이었을 때 자주 가던 학원들이 종로 2가 근처에 있었고, 시내로 나갈 때마다 지하철 1호선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광화문 교보문고에 가려면 종각역에서 내려서 걸어가야 했다. 지금은 지하철 노선이 많지만 그때는 지하철이 1호선과 2호선까지만 운행되었을 때였으니까.


세상은 어느새 변해서 그 종로서적은 내가 이민을 떠난 사이에 경영난으로 문을 닫았다. 마음이 매우 아프다. 그때 그 시절 내 손길과 발길이 수없이 닿았던 종로서적은 밤 9시 45분이 되면 문을 닫겠다고 방송을 했다. 천장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서점 마감을 알리는 낭랑한 방송 소리가 아직도 그립다.


“오늘도 종로서적을 방문해 주신 고객 여러분~~~”


그 방송이 나올 때면 이미 정문은 잠겨 있었다. 서점 내에 있던 손님들은 계단을 통해 내려와서 건물 옆문으로 나갔다. 대학 시절에 꽤 정기적으로 성실하게 종로서적을 출입한 적이 있다. 거의 매일 오후, 도서관에 있다가 오후 6시쯤 나와서 라면이나 비빔밥을 먹고, 종로서적으로 가서 서점이 문을 닫을 때까지 시간을 보낸 후 늦은 밤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서점이 문을 닫은 시각에 옆문으로 나오던 나의 발길은 언제나 가벼웠다. 대학 1학년 1학기 내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그렇게 종로서적을 방문했다. 그래서 서점 5층인가 6층인가에 있었던 사회과학 섹션에서 일하는, 예쁜 제복을 입은 여직원들은 모두 나를 알아보았다. 더벅머리에 촌스럽게 생긴 놈이 묵직한 가방을 어깨에 맨 채 매일 밤마다 서점으로 와서 유리로 만든 전시대 위에 몸을 기울여서 책을 읽는다고. 그놈이 책을 사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3.


다시 2025년 교보문고 강남점.


드넓은 서점에 책이 한가득이다. 사지 못해도 읽고 싶은 책들이 많아서 마음이 풍성해지는 느낌이 든다.

오늘은 무슨 책을 뒤져볼까. 잠시 전진했더니 시집 코너가 나왔다. 이런저런 책들을 건드리다가 김경미라는 시인의 시집을 들었다. 책 제목은 <당신의 세계는 바다와 빗소리와 작약을 취급하는지>.


처음 눈에 들어온 시 몇 수가 눈길을 끌어서 그냥 다 보기로 했다. 그래봐야 시 칠십여 수다. 작가는 몇 해에 걸쳐 썼을지 모르지만 나는 미안하게도 몇십 분 내에 모두 읽었다. 책도 사지 않으면서…… 작가에게 또 미안하다.


표지 뒷면을 보니, 김경미는 1983년 등단한 시인이다. 이미 여러 시집을 냈다. 현재는 방송작가이다. 시집에는, 다른 시인은 전업으로 시를 쓰는데 자신은 방송국에 남아서 시를 쓴다고 자조하는 내용을 담은 시도 있다. 하여간 그렇게 읽은 시들 중에 내 눈길을 잡은, 짧은 시를 조금 소개한다.


그녀의 번뜩이는 재치가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아, 이런 재능과 재치는 어디서 오는가. 부럽다. 방송작가가 가질 만한 빠른 속도가 느껴지고 도시 엘리트다운 향내가 풍긴다. 시를 인용한 후에 나의 느낌을 아주 간단히 덧붙였다.




<청춘>


없었을 거라고 짐작하겠지만

집 앞에서 다섯 시간 삼십 분을 기다린 남자가

제게도 있었답니다.


데이트 끝내고 집에 바래다주면

집으로 들어간 척 옷 갈아입고

다른 남자 만나러 간 일이 제게도 있었답니다


죽어 버리겠다고 한 남자도


물론 죽여 버리고 싶은 남자도


믿기지 않겠지만 (전문)


(낭랑하게 탁탁 튀는, 아름다웠던 격정기 청춘의 소리가 들리는 들리는 듯하다. 오래된 찬란하고 싱그러웠던 순간들이 순간적으로 머리를 스치면서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아 그리워라.)




몇 년 만에 미장원엘 가서

머리 좀 다듬어 주세요, 말한다는 게

머리 좀 쓰다듬어 주세요, 말해 버렸는데


왜 나 대신 미용사가 울어 버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시, ‘취급이라면’ 중)


(이 짧은 시를 읽었는데 왜 나도 순간적으로 눈물이 핑 도는지 모르겠다. 정작 본인은 오랜만에 그냥 머리를 다듬으려고 했는데, 겨우 머리 쓰다듬어 달라는 말만으로도 미용사는 왜, 오랫동안 잊었던 또는 묻어두었던 날카로운 감정이 갑자기 솟아올라 마음을 푹 찌르는지… 그리고 이어서 잊힌 감성들이 웅성거리면서 일어서서 여운을 넘기는 건지…… 달콤했던 사랑은 멀고도 멀어라.)




<꿈>


못내 그리워서

몇 날 며칠이고 피가 나도록 걸어

멀리 꿈속까지 찾아왔다면서


남의 꿈을 그렇게 난장판을 만드나 (전문)


(전문이 겨우 네 줄의 시. 그래도 그 짧은 시에서 인간관계에 관한 신랄하고도 해학적인 느낌을 팍팍 주고 있다. 실제로는 아무도 나오지 않지만 간단한 꿈 얘기만으로도 상대방과 나와의 관계까지 염탐하게 한다. '난장판'이라니...... 갑자기 마음이 아프다.)




<다 쓴다는 것>


발이 구두를 다 써서

발가락이 구두밖으로 튀어나오는 것


귀가 말을 다 써서

더는 듣고픈 말이 없는 것


다 쓴 관계들이 가득한 사진첩들

다정도 부드러운 손을 다 썼을까


저녁노을 다 써 버린

커피색 유리창 옆


당신과 맞잡은 나의 손이 풀린다 (전문)


(재치가 돋보인다. 도치된 어구들의 관계들 속에서 묘한 긴장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연을 거듭하면서 당신과 나 사이에 시간적으로 진행되고 풀리는 관계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그 관계의 결론인 마지막 줄이 시의 백미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