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과 새남터 성지

2025년 한국여행 이야기 5 (부제: 천주교 순교자들을 위하 성지)

by memory 최호인

1.


한국은 어디를 가나 수많은 역사적 유물과 사적지가 가득합니다. 말 그대로 돌 하나 함부로 찰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비록 불가피했지만 무자비했던 개발경제로 인해 수많은 유물이 소실되었겠지만, 그래도 경제발전과 더불어 유적지 발굴과 훌륭한 전시장을 설치하는 것은 어느덧 유행이 된 듯도 합니다. 전국 어디를 가나 박물관과 전시관과 기념관과 사적지가 들어선 것을 보면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한국 천주교는 매년 9월을 '순교자의 달'로 기념합니다. 순교자들을 기념하고 그들의 신앙과 삶을 본받으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수많은 천주교인들은 이 달에 순례자가 되어 성지들을 다닙니다. 한반도에서 기독교 전래와 전파는 매우 독특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많은 순교자들이 피와 땀을 흘리고 목숨을 바친 결과이기도 합니다. 한반도에서 개신교의 전파보다 백 년 정도 앞선 천주교의 연구와 전파는 로마 가톨릭 사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고자 했던 조선 중인 역관들과 실학파 지식인 양반들로부터 시작됐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계 어디에서도 이런 경우를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유럽이 세계로 팽창하던 시기, 총칼로 무장한 제국의 병사들을 따라서 기독교 사제들이 이방인들이 사는 타지로 가서 그들의 전통종교를 무력화시키고 기독교를 전파한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때 사제들은 결코 단독으로 갔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금욕적 욕심에 가득 찼거나 모험심으로 무장한 제국의 군대를 따라갔으므로, 그것은 곧 아프리카와 중남미와 아시아를 향한 유럽인들의 침략이자 기독교 전파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군사적 침략뿐 아니라 문화종교적 침탈이기도 다는 겁니다.


지리적 발견과 더불어 대양의 시대를 맞아 유럽인들은 이방인들과 우아하고 평화롭게 문화적 교류를 한 것이 아니라 경쟁적으로 식민지를 개척했습니다. 그들의 침략으로 인해 아프리카와 중남미는 대대적인 종족멸살(genocide)을 면하지 못했고 그 잔악성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유럽인들은 제3세계 사람들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고, 성경도 그렇게 묘사하고 있다는 식으로 기독교를 호도했던 것입니다.


힘없던 그들이 노예로 착취당하고 멸살된 것을 생각할 때 아시아의 여러 부족과 국가들이 거쳤던 식민지 시대는 고통스럽지만 다소 낭만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모든 침략과 전쟁과 살육 뒤에 사랑의 기독교가 십자가 교회를 세운 것은 기독교 전파 역사에서 돌이킬 수 없는 수치일 것입니다. 치유와 겸손과 희생과 봉사와 사랑과 평화를 설파했던 예수의 삶이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기독교 전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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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국에서 기독교 전파는 18세기말 정조 시대에 시작됐습니다. 조선의 실학파 지식인들은 청나라에 전파된 서양 문물을 통해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공처럼 둥근 지구의를 보면서 세계의 중심이 중국이 아니라 어디든 지구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모든 사람이 천주 앞에서 동등하게 사랑받을 수 있고 구원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당대 지식인들에게 가히 의식의 혁명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들에게 천주교는 빠르게 확산되었는데 특히 정약용 형제와 친척들은 조선의 초기 기독교 전파 역사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조선말 역사를 배울 때 들었던 인물들이 다수 망라되어 있는데, 정약현,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네 형제 외에도 이벽, 이승훈, 황사영, 윤지충 등도 이들의 가계에 포함됩니다. 정약용의 작은 형인 정약종은 신유박해(1801년) 때 순교했고 정약전(흑산도)과 정약용(강진)도 유배 경험이 있습니다.


한국 천주교에서 순교자 숫자는 명단이 확인된 것만 해도 1800여 명이고, 신원이 알려지지 않은 순교자까지 합하면 1만 명 정도로 추산됩니다. 서기 64년 네로 황제부터 313년 밀라노칙령으로 박해가 끝날 때까지 로마제국에서 순교한 사람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기독교인들에 의해 다소 과장되어 알려졌다는 게 역사학계의 중론입니다. (로마 제국에서 황제숭배를 거부했다고 하여 순교한 사람은 역사학자에 따라서 수만 명에서 수백만 명까지 다양합니다만, 실제로는 수만 명에 이른다는 주장에 무게가 더 실려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 영화를 통해 기독교인들이 굶주린 사자들에 잡아먹히면서 순교하는 장면은 매우 충격적으로 기억에 남았고, 이것이 로마 제국의 기독교인 박해에 대한 동정심을 더욱 부추겼습니다.)


조선에서 이름이 확인된 순교자 중 103명은 교황청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고, ‘복자’로 시복된 사람도 123명에 이릅니다. 성인이나 복자는 모두 교황청에서 엄격하고 세밀한 조사를 거쳐 순교자나 기독교적 의미의 기적을 성취한 사람을 기리는 인물들을 뜻합니다.


한국 천주교는 순교자들을 기리는 순교 성지를 꾸준히 개발했는데, 현재까지 160여 곳에 이르렀습니다. 수년 전에 나는 천주교인이었던 친구 Y와 함께 최초의 성지, 천주교회의 발상지로 일컬어지는 천진암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만 해도 한국의 천주교 성지는 백 곳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즈음하여 천주교에서 성지 개발이 유행이 되었던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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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번 한국여행에서 나는 다행히 지인들과 함께 서소문 성지를 방문할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현재 매우 거대한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이 건립되어 있습니다. 이 박물관은 2019년 6월에 개관했습니다. 박물관은 특이하게 지하에만 3층으로 건설되었는데, 건축학적으로도 매우 특이하고 잘 지어진 것으로 평가됩니다. 온통 붉은 벽돌로 이뤄진 이 박물관은 지하에 있어서 외부에서는 그 규모나 위용을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박물관 외부는 근린공원으로 꾸며져 있어서 언뜻 봐서는 박물관의 존재를 눈치채기도 어렵습니다.


서소문은, 돈의문과 숭례문 사이에 있었던, 한양의 사소문 중 하나인 소의문의 별칭입니다. 천주교에서 서소문이 유명한 이유는 매우 많은 천주교인이 처형되었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신유박해(1801), 기해박해(1839), 병오박해(1846) 병인박해(1866) 등이 유명합니다.


서소문은 특히 조선의 평신도들이 처형된 곳입니다. 외국인 신부와 양반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된 곳은 용산에 있는 새남터 성지입니다. 한국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신부도 새남터에서 처형되었습니다. 그러니, 순교자 숫자로만 본다면 서소문에서 죽은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그로 인해 서소문은 '평신도의 순교지', 새남터는 '사제들의 순교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반드시 알아둬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서소문이 단순히 조선 천주교인의 순교지로만 알려져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곳은 조선 왕조 500년 내내 수많은 백성이 처형된 곳이고, 동학의 성지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곳은 민족역사 사적지이며 평화와 상생의 역사공원으로 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곳이 지나치게 천주교적 의미만 담아서는 안 된다는 논란이 있다는 것입니다.


조선의 천주교의 성인 103위 중 44위, 복자 124위 중 27위가 서소문에서 처형되긴 했지만, 동학농민전쟁의 주역인 전봉준, 대규모 농민봉기를 일으켰던 홍경래도 이곳에서 처형됐습니다. 동학의 2대 교주였던 최시형이 재판을 받았던 곳도 서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서소문 성지를 천주교가 독점하려고 한다는 볼멘 주장이 터무니없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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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천주교인들인 지인들이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1층에 있는 소성전에서 미사를 드리는 동안 나는 지하 3층에 있는 박물관을 자세히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여유 있는 장소에 아주 근사하게 건설된 그곳에는 조선 근대 실학파의 역사가 고스란히 전시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천주교나 종교에 관심이 없다 해도 조선 근대역사를 이해하기 위해 충분히 가볼 만한 장소라고 믿습니다.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의 규모에 비해 새남터 성지는 소박해 보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천주교 전래 200주년이었던 1984년에 시공하여 3년 만에 완공했다고 합니다. 지금 보면 마당이나 건물이나 모두 협소하게 느껴집니다. 또한, 이 성지로 들어가는 도로나 입구도 조금 외딴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천주교인인 지인들이 그곳에서도 미사를 드리는 동안 나는 새남터 성지를 자세히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갔을 때 새남터성지기념관은 마침 수리 중이라고 입구가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지 입구에 있는 안내소에 가서 물었더니, 안내소 직원이 친절하게 20분 정도 시간을 줄 테니 기념관을 보라고 자물쇠를 열어 주었습니다.


새남터 성지의 한 귀퉁이 지하실에 있는 이 기념관은 2006년 9월에 개관했습니다. 좁은 입구를 거쳐 지하 계단을 내려가면 이곳에서 순교한 14인의 순교자를 기념하는 반달 모양의 전시장이 가장 먼저 보입니다. 전시장은 주로 천주교 박해의 역사와 신부들의 기록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김대건 신부가 청나라 교구청에 보내는 친필 서한들도 눈에 띕니다.


기념관을 돌아본 나는 3층에 있는 대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작은 미사는 주로 아래층에서 드리기 때문에 대성전은 마침 비어 있었습니다. 나는 다행히 아무도 없는 그곳의 긴 의자에 앉아서 눈을 감은 채 기도 아닌 기도를 꽤 오래 드릴 수 있었지요. 긴 여행으로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부당하고 부정의한 박해와 억압이 사라질 수 있도록, 평화와 상생과 사랑이 온 나라에 미칠 수 있도록, 더불어 나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도 행복과 건강을 기원할 수 있었습니다. 이 같은 관념적 기도가 현실적으로 의미 있는 결과를 주지 않을지 모르지만, 나는 이러한 명상을 통해 긴 여행으로 피폐해지는 내 마음을 새롭게 다지는 기회라고 여길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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