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한국여행이야기 6 (부제: 정동교회 정오음악회)
1.
덕수궁 돌담길은 언제 봐도 정감이 간다.
정동으로 가는 덕수궁 돌담길은 보기 좋게 조금 휘어져 있다. 인도와 차도가 구분되어 있기는 하지만 높낮이 차이는 없다. 그 길에 은행나무가 많다. 가을이 되면 노란 은행잎들이 길바닥에 무수하게 떨어져서, 보는 이에게 쓸쓸한 정서를 더해 주지만, 걷는 이들은 짙은 냄새 때문에 은행을 밟을까 봐 조심조심 걸어야 한다.
대한문에서 은은한 엷은 갈색이 감도는 돌담길을 따라 걸어가면 곧 정동제일교회에 이른다. 이 교회가 유명한 이유는 한국 최초의 개신교회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한국 최초 개신교회는 1883년 황해도에 건립된 소래교회라고 한다.)
보통 ‘정동교회’라고 불리는 이 교회는 1885년 감리회 선교사인 헨리 아펜젤러 (1858-1902)에 의해 개척된 감리교회이다. 처음에 그는 가정교회 방식으로 시작했지만, 1897년에 지어진 벧엘예배당은 최초의 서양식 교회가 되었다. 1919년 이 교회의 지하실에서는 ‘기미독립선언서’가 대량으로 인쇄되었으며, 이화학당에 다니던 유관순 열사도 이 교회 교인이었다. 그때 이 교회의 이필주 목사 (5대 담임목사)와 박동완 전도사는 민족대표 33인에 포함되었다.
2023년 11월에 그 교회 새 예배당 1층에 역사기념관을 개관했다. 그곳에 가면 정동교회의 역사를 금세 알아볼 수 있다. 이 교회에는 구 예배당인 벧엘예배당이 있고, 그 옆에 신 예배당이 있는데, 내가 관심을 두는 곳은 물론 벧엘예배당이다.
내가 지난 9월 중순에 역사기념관에 갔을 때마침 기념관 해설사를 만났다. 그는 친절하게도 벧엘배당 자물쇠를 열고 내부를 구경시켜 주었다. (그곳은 보통 문이 잠겨 있어서 일반인들이 그냥 방문하면 들어갈 수 없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예배당 정면에 있는 파이프오르간은 1918년에 독일 기술자들의 도움을 얻어 한국 최초로 설치되었다. 한국전쟁 시기에 불행하게도 예배당 천장을 뚫고 폭탄이 떨어졌으며 오르간까지 파손되었다. 전후에 교회는 독일에 연락해서 정확히 동일한 오르간 부품들을 주문하여 현재 위치에 재설치했다.
2.
그 예배당에서 해마다 봄가을에 무료 음악회가 열린다.
아펜젤러의 문화유산에 따른 결과이겠지만, 이 음악회에는 연대 음대 출신자들이 자주 출연한다.
나는 지난 10월 이 음악회에 두 차례 참석했다.
이 음악회는 평소에는 굳게 잠겨 있던 벧엘예배당에서 열리기 때문에 충분히 들어가 앉아서 감상할 가치가 있다. 예배당에는 파이프오르간 외에 그랜드 피아노도 있다. 적당하게 넓은 예배당에 천장은 높고 양옆에는 높고 아름다운 창문들이 있어서 음악회를 즐기기에 무척 좋다.
월요일 정오에 시작하는 음악회라서 주변에 있는 직장인들도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잘 찾아온다. 음악회가 시작되기 전에 교회 마당에는 음악회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먹거리와 음료를 제공된다. 교회 음악 관계자들로 보이는 중년의 여성들이 빵과 커피 또는 차를 무료로 제공한다.
맑은 초가을 빛이 찬란하게 빛나는 정오 무렵, 새파란 하늘 아래 오래된 교회 마당에서 싱그러운 공기를 마시면서 먹는 작은 카스텔라와 차는 무척 맛있다. 특이한 것은, 그 빵과 음료를 예배당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서 음악회를 즐겨도 된다는 것이다.
“이 빵과 차를 예배당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도 된다는 말씀입니까?”
“그럼요. 다만 나올 때 쓰레기는 꼭 가지고 나오세요.”
나는 놀라서 일부러 재차 확인했다. 내가 아는 한, 일반적으로 말해서, 예배당 안에서 음식을 먹는 것은 금기시된다. 물론 거기에는 전통과 문화도 있고 복잡한 신학적 논쟁도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그 점에 관하여 정동교회, 또는 벧엘예배당에서는 거침이 없다. 아주 마음에 들었다.
다만 빵 부스러기가 떨어지거나 차와 커피를 엎지르면 어떻게 청소할까 걱정이 되기는 했다. 이 오래된 예배당을 아끼는 마음에서 말이다. 하여간 그래서 나는 카스텔라를 밖에서 먹었고, 차만 예배당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서 음악회 중간중간에 조심해서 마셨다.
3.
정동교회 정오음악회에 처음 참석했을 때 나는 뒤쪽 중간 어딘가에 앉았다. 예배당이 너무 크거나 권위적이거나 신비롭게 보이지 않고 사방이 밝아서 그 정도 위치도 음악 감상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음악회 중간에 보려니까, 햇빛이 드는 창가 자리가 눈에 띄었다. 그날 그곳에 어떤 할아버지가 혼자 앉아 있었는데, 나는 무척 마음에 드는 자리라고 생각했다. 음악회가 진행되는 동안 격자형 창틀이 있는 교회 창문을 통해 화사한 가을 햇볕이 내내 내리쬐고 있었다. 나는 다음에 다시 올 때는 반드시 그 자리에 앉고 싶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로 음악회에 왔을 때 나는 정말로 그 자리에 앉았다.
창가에 볕이 들어오던 그 자리.
창문 앞에는 나무가 있고, 그 앞마당에는 자동차가 주차되어 있어서 바깥이 남만스럽게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도 위에만 본다면, 창문 저편에 고층 빌딩들이 있고 그 위에 새파란 하늘이 있었다. 투명하고 높다란 창문을 통해 무수한 가을 햇볕이 내리쬐었다.
그렇게 창가에 앉았을 때 후유증은 음악회 내내 몹시 밝은 햇빛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거기까지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한 시간에 걸쳐 따뜻한 햇빛에 계속 노출됨으로써 특히 왼쪽 어깨가 조금 뜨거워졌다. 그래도 나는 그 자리가 좋다.
내가 참석한 첫 번째 음악회는 피아노 독주 연주회였다. 프로그램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전날 밤에 이미 일부러 인터넷에서 다 들어본 것이지만, 일반인들에게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곡들이라서 조금 지루했다.
그러나 두 번째로 참석한 음악회는 소프라노와 카운터테너가 나오는 성악 음악회였고, 다행히 내가 좋아하는 곡들도 포함되었다. (아, 처음에 파이프오르간 연주도 있었지만!) 그날 성악 연주 가운데 하나는 프랑스 작곡가인 레이날도 안(Reynaldo Hahn, 1874-1947)이 작곡한 ‘클로리스에게(À Chloris). 나는 이 노래의 피아노 반주를 무척 좋아한다. 이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나의 젊은 날 오래된 낭만적 사연이 깃든 어딘가로 날아가는 느낌이 든다.
정동제일교회 정오음악회는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세속적’이다. 교회에서 하는 만큼, 적어도 기도 하나라도 할 법한데 이 음악회는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그런 종교적 행사를 전혀 포함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도 정말 좋다. 다만 음악회 프로그램을 보면 교회나 기독교 관련 음악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에서 하는 음악회니까.
나는 무엇보다 이렇게 좋은 장소에서 무료 음악회를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좋다. 교회라는 장소는 사실 비종교인들이나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참석하기에 심리적으로 부담이 될 수 있다. 그런데 비불교인들이 별 거부감 없이 사찰과 대웅전 내부까지 방문하고 ‘감상’하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런 부담을 쉽게 극복할 수 있을 듯하다.
참으로, 그런 점만 극복할 수 있다면 정동교회는 여러 면에서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예술 공간적으로 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도.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는 정도의 격식이 요구되는 음악회가 아니라 부담이 없고 참석 복장도 매우 편하다. 관객들은 평상복을 입고 들어올 수 있으며, 중간중간 작은 소리로 잡담까지 하면서 음악회를 즐긴다. 심지어 그러다가 재미없다고 생각하거나 급하면 음악회 중간에 일어서서 그냥 나간다.
그런 약간의 소란함이 진지하게 음악을 감상하고 싶은 사람들의 심기를 건드리겠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어 보인다. 무료 음악회라서 관객들은 쉽게 들어오고 쉽게 나간다. 그래도 길거리 버스킹에 비해서는 매우 안정적이고 전문적인 음악회임은 분명하다. 바로 이 정도의 품위와 격식을 나는 매우 좋게 느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h6UCcIvE18
À Chloris · Susan Grah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