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장

잃어버린 일기장, 잃어버린 나

by 나린


국민학교 시절부터 내 곁에 있던 일기장이 있었다. 방학 과제라는 이름으로 시작했지만, 내겐 어린 날의 자서전이자 마음의 앨범이었다. 선생님께 검사를 받고 돌려받았을 그 일기장은 지금 집 안 어디에도 없다. 아마 예전 학교에서 폐지 수집을 하던 날, 무심코 다른 종이들과 함께 내 손에서 떠나버린 듯하다. 버린 건지, 잃어버린 건지조차 흐릿한 기억 속에 묻혀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지금이라도 찾을 수 있다면 꼭 다시 만나고 싶은 물건 중 하나라는 것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그 시절의 일기장을 더 자주 떠올리게 된다. 나는 어떤 놀이를 하며 지냈을까. 어떤 친구들과 웃고, 또 어떤 고민에 잠겼을까. 동화 속 주인공이 되어 놀던 순간들, 세상을 향해 맑은 눈을 반짝이던 어린 소녀의 기록이 그 속에 있었을 것이다. 그땐 내가 ‘어른’이 되리라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니, 그것이 얼마나 귀한 시간의 증언인지 몰랐던 모양이다.


에고의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던 나에게, 그 일기장은 ‘셀프’의 나를 만나게 해주는 창이었다. 매일의 분주함 속에서도 잠시 멈춰 숨소리를 들을 수 있는 안식처, 거울 앞에 선 듯 진짜 나를 마주하는 시간. 우리는 타인의 시선과 기대에 맞춰 살아가느라 종종 내 안의 목소리를 잊는다. 하지만 일기장은 그 잃어버린 나를 부드럽게 이끌어 되찾게 해 준다.


아침 커피의 온기, 창문 너머 스치는 바람, 아무도 모르는 내 마음의 작은 떨림. 화려하지 않아도 충분히 빛났던 그 순간들을 일기장에 적어 내리며, 나는 나 자신에게 귀를 기울였다. 스스로를 위로하고, 다시금 사랑하게 되는, 가장 사적인 대화였다.


그래서일까. 그리움은 그 일기장이 내 곁에 없을 때 더 깊어진다. 바쁜 하루를 보내다 문득 떠오르는 빈 페이지, 아직 쓰이지 못한 이야기들, 종이를 넘기며 나를 기록하던 손끝의 감촉이 그리워질 때, 그 소중함은 더욱 선명해진다.


일기장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에고의 껍질을 벗고, 셀프의 맨 얼굴을 마주할 용기를 주는 존재다. 이제 나는 그 존재를 위해 첫 페이지를 조심스레 연다.


혹시 요술램프의 지니가 내 소원을 들어준다면, 잃어버린 그 일기장을 다시 한번 안아보고 싶다. 그 안에서, 오래 전의 내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