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읽은 책들 가운데 나의 인생 책을 딱 하나만 꼽으라고 하면 나는 주저 없이 루시모드 몽고메리의 <빨강머리 앤>을 꼽을 것이다.
내 나이 40대, 나와 비슷한 또래의 사람들, 특히나 여성들 가운데 '앤'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아마 대부분 잘 알고 있을 것이고 중년이 된 지금까지도 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을 거라고 믿는다.
'빨강머리 앤'은 만화 영화로도 방영이 되었었기 때문에 더 유명하다. 나도 어렸을 때 텔레비전에 빨려 들어갈 것처럼 몰입해서 본 기억이 생생하다. 찾아보니 이 만화는 1979년에 일본 후지 TV에서 처음으로 방영이 되었다고 한다.
나는 앤의 광팬이라서 집에 앤 시리즈를 전권 소장하고 있다. 만화에서는 앤의 극히 일부분의 삶만을 다룬 것에 불과하다. <ANNE> 시리즈를 보면 앤이 길버트와 결혼하여 6남매의 어머니가 된 이야기, 그 6남매가 장성한 후의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다.
우리 집 책장에 꽂혀 있는 <ANNE> 시리즈
지금까지 읽은 책 중에서 유일하게 목차 하나를 기억하고 있는 책이 바로 이 책이다. 그 내용이 얼마나 강렬하게 기억에 남았는지 어제 일도 잊어버리고 사는 내가, 읽은 지 수십 년이 지나도 기억하고 있는 목차가 있다. 바로 이 시리즈의 1권인 <만남>에 있는 마지막 목차, '길모퉁이'이다.
<ANNE> 시리즈 1권의 마지막 목차, '길모퉁이'
앤은 장학금을 받고 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었으나 고아인 자신을 키워 준 머릴러가 실명 위기에 놓이고, 머릴러 혼자서는 그린 게이블즈(앤이 살던 초록색 지붕 집)를 관리할 수가 없어 팔아야 한다는 말을 듣고 대학 입학을 포기하게 된다. 그리고 머릴러 곁에 남아 마을 학교의 선생님이 되기로 결심한다.
자신 때문에 앤이 장래의 꿈을 버리는 것에 대해 미안함과 안타까움을 느끼는 머릴러에게 앤은 이렇게 말했다.
장래의 꿈을 버린 건 아니에요.
다만 목표가 달라졌을 뿐이에요.
훌륭한 선생님이 되는 일, 그리고 머릴러의 눈을 소중히 하는 일이에요.
또 교편을 잡으면서 대학 과정을 독학으로 공부하는 일,
아, 내게는 계획이 너무 많아요.
그린게이블즈에서 제일 가까운 학교는 '애번리(당시 앤이 살던 마을 이름) 학교'인데 이미 길버트(같은 학교 동급생으로 훗날 앤과 결혼하게 됨)가 이 학교로 결정이 되어 있어 앤은 거리가 좀 먼 학교로 다녀야 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앤의 소식을 들은 길버트가 앤에게 애번리 학교를 양보한다. 직접 이사회를 찾아가서 자신이 다른 학교로 가겠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진짜 가슴 설레는 장면! 그동안 크고 작은 오해로 말미암아 냉전 관계에 있던 두 사람이 마침내 이 일을 계기로 화해하게 된다.
앤이 매슈(머릴러의 오빠로 생전에 앤을 무척이나 아껴주었음)의 무덤에 꽃을 두고 언덕을 내려오다가 휘파람을 불며 자기 집에서 나오던 길버트와 마주친다. 앤과 사이가 좋지 않았기에 길버트는 앤을 보자 정중히 모자를 벗고 인사한 후에 그냥 지나쳐 가려한다. 그때 길버트에게 앤이 멈춰 서서 조심스레 손을 내민다(아, 정말 떨리는 장면이다!). 가까운 애번리 학교를 양보해 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
길버트는 앤이 내민 손을 꼭 쥐고 예전에 자신이 앤을 '홍당무'라고 놀려댔던 일에 대해 다시 진심으로 사과를 한다(빨간 머리에 대해 콤플렉스가 심했던 앤은 이 일로 인해 길버트와 오랜 기간 냉전 관계를 유지해 왔다.).
앤도 그동안 이미 마음속으로 용서를 했으면서도 어리석은 고집을 부렸던 것에 대해 사과를 하면서 웃으며 손을 빼려고 하지만 길버트는 앤의 손을 잡고 놓지 않는다. 이 장면에서 어찌나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설레었는지!!
우리는 서로 훌륭한 친구가 될 거야.
너와 나는 좋은 친구가 되도록 태어났는데
네가 이제까지 그 운명에 거스르고 있었지, 앤.
이때 앤과 길버트는 두 사람이 친구 사이를 넘어 미래에 연인이 되고 부부가 되어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게 될 줄 짐작이나 했을까?
이 '길모퉁이' 챕터의 끝 부분에 보면 이런 문장이 나온다.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문장이다.
길에는 언제나 모퉁이가 있고 그 너머에는 새로운 세계가 펼쳐져 있는 법이다.
앤은 고아인 자신을 사랑을 다해 키워 준 머릴러와 그린게이블즈를 위해 자신의 대학 입학이라는 꿈을 접었다. 당장 자신의 꿈보다 더 중요한 우선순위를 선택한 것이다. 앤은 애번리에 남기로 결정한 뒤에 실망하지 않았다. 꿈을 잠시 접긴 했지만 그 꿈이 사라진 건 아니기 때문이다(실제로 앤은 나중에 다시 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앤은 오히려 새롭게 펼쳐질 미래에 대해 희망과 기쁨을 느끼며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인생 앞에 놓인 '길'을 따라 걷고 있다. 어떤 사람은 지금 한창 앞이 시원하게 뚫린 대로를 걷고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구슬땀을 흘리며 구불구불한 산길을 걷고 있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열심히 걷다가 예상치 못한 '길모퉁이'를 만나 멈칫한 상태일 수도 있다.
길모퉁이를 만나면 불안할 수도, 설렐 수도 있다. 왜냐하면 모퉁이를 돌아 만나게 될 길이 어떤 길일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했던 '그 길'이 맞을 수도 있지만 전혀 다른 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길모퉁이 너머에는 가슴 뛰는 '새로운 세계'가 펼쳐져 있다는 것이다.
나 역시 지금 인생의 길모퉁이 앞에 서 있다.
이 모퉁이를 돌아서면 어떤 길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앤처럼 불안과 두려움이 아닌, 가슴 뛰는 기대와 설렘을 갖고 새롭게 펼쳐질 세계를 맞이하면 좋겠다. 생각했던 것보다 길이 험하고 가끔은 흙탕물에 옷이 더러워지더라도... 불안함보다는 기대와 긍정의 마음으로 그 길을 마주하며 걷고 싶다.
길에는 언제나 모퉁이가 있고
그 너머에는
새로운 세계가 펼쳐져 있는 법이다.
- ANNE 시리즈 1권 <만남>
'길모퉁이'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