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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은 Jul 16. 2022

붕괴되지 않고자 했던 미결의 사랑

영화 <헤어질 결심> 리뷰






    오랜만에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스크린에서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개봉을 기다렸다. 박찬욱 감독의 정통 멜로 영화라니,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혼자 영화관으로 달려가 봤던 <헤어질 결심>은 나의 기대감을 완전히 충족시켜준 영화였고, 오래 곱씹으면 곱씹을 수록 남는 게 더욱 많아지는 영화이기도 했다.





1. 견고하고 세련된 박찬욱의 미장센






    영화관에서 <헤어질 결심>을 보는 동안 절로 감탄이 나와 소리를 삼켜야 했던 순간들이 여러 번이었다. 단순히 스토리가 재밌다고 좋은 영화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결국 영화는 하나의 영상으로서 관객에게 보여지는 것이므로, 스토리 뿐만 아니라 연출, 촬영, 미술, 조명, 음악 등의 여러 부분이 하나의 지향점 아래 서로 조화를 이뤄야만 관객에게 더 큰 울림을 선사할 수 있다.

 

    그러한 부분에서 나는 <헤어질 결심>이 아주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한다. 한 순간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연출과 촬영, 영화의 몰입감을 높이는 미술과 음악까지, 그 모든 것이 모여 이루는 견고한 미장센은 박찬욱이 만든 영화의 일종의 트레이드마크와도 같다.


    특히 감탄이 나오는 부분은 미술이었다. 박찬욱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도 류성희 미술감독과 함께 작업했는데, 이번에도 역시 영화 전체의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바로 영화의 초중반부에 나왔던 서래 집의 푸른 벽지였다. 언뜻 보면 푸르고 높은 파도가 가득한 바다처럼 보이는 벽지는, 계속해서 보다 보면 푸르른 봉우리를 가진 산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산과 바다는 서래와 해준의 관계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장소가 된다.


    잔인함과 폭력이 있는 영화에서도 아름답기로 유명했던 박찬욱의 미장센은, 정통 멜로로 돌아온 그의 새로운 영화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영화의 완성도 있는 미장센을 기대하는 사람이라면, 꼭 영화관에서 <헤어질 결심>을 보는 것을 추천한다.






2. 사랑과 붕괴, 그리고 헤어질 결심







    붕괴.

    무너지고 깨어짐.

*출처: 네이버 어학사전



    영화를 보고 나면 잊혀지지 않는 한 단어의 정의가 있다. 극의 중후반부를 이 한 단어로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준은 서래를 사랑함으로써 스스로 붕괴했다. 서래는 자신의 헤어질 결심을 통해 해준이 붕괴하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길 바란다고 말하지만, 서래의 헤어질 결심으로 인해 어쩌면 해준은 영영 붕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이가 되었다.


    박찬욱 감독과 정서경 작가의 작품에는 늘, 어딘가 문어체적이지만 대체할 말을 찾을 수 없는 좋은 대사들이 등장하곤 한다. 박찬욱 감독과 정서경 작가의 영화들을 하나하나 떠올려보면, 그 영화의 대사가 하나 정도는 떠오르는 것도 그러한 이유다. <헤어질 결심>도 예외는 아이었다. 오히려 그러한 부분이 아주 두드러진 작품에 속한다. 품위 있는 형사인 해준과, 사극 드라마로 한국어를 배운 서래의 언어들은 고풍스러운 느낌이 강하고, 덕분에 영화 전반적으로 신비로운 느낌이 더해진다.


    영화의 중후반부 서래의 대사에 직접적으로 '헤어질 결심'이 언급된 것도 인상적이었다. 제목인 <헤어질 결심>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단번에 알 수 있는 장면이었고, 사랑을 시작할 때는 결심이 필요하지 않지만 헤어질 때는 결심이 필요하다고 얘기했던 박찬욱 감독의 인터뷰가 어떤 의미였는지도 느낄 수 있는 대목이었다.






3. 빈틈 없는 연기 앙상블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영화 <헤어질 결심> 中



    영화의 주인공으로 처음부터 탕웨이 배우를 생각했다는 박찬욱 감독의 말이 충분히 이해될 정도로, 영화 속 손서래는 다른 누군가를 떠올릴 수 없을 만큼 탕웨이 그 자체였다. 한국어가 서툰 중국인, 한국사회에 온전히 섞일 수 없는 신비롭고도 고독한 외부인의 느낌을 탕웨이는 완벽하게 연기해냈다.


    매 영화마다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는 박해일 역시 이번 영화에서도 명연기를 펼쳤다. 서래의 표현을 빌리자면 '품위 있는' 형사인 해준은, 우리가 '형사'라고 하면 보통 떠올리는 거칠고 대담한 인물상에서 벗어나 섬세하고 차분한 형사 캐릭터를 보여주었다. 스크린에서 박해일과 탕웨이가 만들어내는 케미는 놀랍도록 매력적이다.







    서래와 해준을 연기하며 극을 이끈 박해일과 탕웨이의 연기만 빛났던 건 아니다. 영화를 빈틈없이 채워준 탄탄한 조연들이 있었다. 해준의 후배 형사를 연기한 고경표 배우, 해준의 아내를 연기한 이정현 배우, 짧은 출연으로 강한 인상을 남겨준 박정민 배우, 스크린 첫 데뷔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 김신영 배우까지 조금의 빈틈도 보이지 않는 배우들의 앙상블은 시청자들을 스크린 속으로 끌어당겼다.





4. 미결의 사랑이 남긴 지워지지 않는 흔적






    "깊은 바다에 버려요. 아무도 못 찾게요."

영화 <헤어질 결심> 中



    박찬욱 감독이 지금껏 만들어왔던 영화들과 비교했을 때 이례적으로 폭력적인 장면과 잔인한 장면이 없는 영화라고는 하지만, 어쩌면 이 영화만큼 잔인한 게 또 없다고 생각했다. 해준에게 미결 사건으로 남고 싶었다는 서래의 말처럼, 결국 그들의 사랑은 서래의 헤어질 결심과, 해준에게 남겨진 미결의 사랑으로 끝이 난다.


    <헤어질 결심> 속의 서래와 해준은 사랑한다는 말 없이도 서로에게 사랑을 얘기했다. 한 명이 사랑을 얘기한 순간부터 다른 한 사람의 사랑이 시작됐다. 내가 그렇게 만만하냐고 묻는 해준에게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라고 되묻던 서래는 해준이 영원히 잊지 못할 미결 사건으로 남았다.


    사랑할 때가 아닌 헤어질 때 결심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처럼, 우리가 무언가를 미련 없이 보내주기 위해서는 그것을 제대로 마무리 짓는 과정이 필요하다. 해준이 미결 사건을 모두 벽에 붙여놓고 매일 밤 떠올리는 것 역시 그 사건들을 자신의 손으로 보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떠난 이보다 남겨진 이가 서글플 수밖에 없는 것도 같은 이유다. 그렇기에 서래의 헤어질 결심은 한편으로 서글프고 다른 한편으로는 잔인하다. 그것은 헤어질 결심을 할 수밖에 없었던 서래에게도, 해준에게도 마찬가지다.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은 내게 오랜만에 영화관에서의 설렘을 느끼게 해준 영화였다. 영화를 보는 2시간 동안도, 영화가 끝이 난 이후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도 이미 좋은 영화라고 느꼈지만, 한참을 곱씹고 다시 생각할수록 더 많은 여운이 남고 다시 영화관을 찾고 싶게 만드는 영화였다.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음악 역시 깊은 인상으로 남아 쉬이 잊히지 않는다.


    사랑한다는 말 없이도 사랑을 이야기한 영화, 더 많은 이들이 영화관에서 이 작품을 보길 바라고, 영화를 본 더 많은 이들과 더욱 다양한 감상을 나누고픈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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