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이었다. 지하철 출구 앞으로 당신이 보였다. 나와 당신 사이로 수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통과하고 있었다. 내 앞으로 다섯 사람이 당신의 손을 뿌리쳤다. 나는 천천히 다가가 당신이 건네는 전단지를 받았다. 짧은 순간 당신은 내게 고맙다는 말을 세 번 건넸다. 나는 짧게 목례를 하고 당신을 지나왔다. 짧은 하루, 당신은 얼마나 많은 거절을 받았던 것인가. 당신의 삶에 환대란 무엇인가.
경계를 생각한다. 당신과 나 사이의 경계. 경계는 중간이다. 당신과 나를 구분하는 것이 아닌, 아우르는 공통 지대로 인식할 때 경계는 모습을 드러낸다.
연암 박지원에게 경계는 창작의 지점이었고, 상상의 지점이었다. 열하일기는 지리적 경계뿐 아니라 사유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그는 조선과 청의 경계에서 북벌과 북학의 이항대립을 고민했다. 조선에서 외치는 북벌론이 허구적 수사학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다. 그 결과가 열하일기였다.
“자네, 길(道)을 아는가? 길이란 알기 어려운 게 아니야. 바로 저편 언덕에 있거든. 이 강은 바로 저들과 우리 사이에 경계를 만드는 곳일세. 사람의 윤리와 만물의 법칙 또한 저 물가 언덕과 같다네. 길이란 다른 데서 찾을 게 아니라 바로 이 사이에 있는 것이지. 이것과 저것, 그 사이에서 존재하는 것은 오직 길을 아는 이라야만 볼 수 있는 법”
낯설음과 낯익음의 경계를 생각한다. 그것은 낯익으면서 낯선 풍경이다. 중년 여성이 전단지를 건네는 일, 건물을 청소하는 일, 가스를 검침하는 일, 간병을 하는 일, 식당에서 서빙을 하는 일. 그것은 낯익으면서 낯선 일이다. 낯익지만 그들은 영원히 타자일 뿐이다.
중년 여성 노동자들이 찾는 일자리들은 대개 비정규직이나 저임금 일자리다. 일하지만, 불안정한 불안 노동들. 코로나19에 일자리를 잃은 이들이 더 불안정한 일자리들로 밀려났다. 아줌마를 쓰면 최저임금을 안 지켜도 된다는 생각, 못 배우고 무시해도 된다는 생각, 집에서 하던 일이니 특별한 기술이 없어도 된다는 생각. 결혼과 출산 이후 노동시장에서 중도 탈락한 여성 노동자들에겐 익숙한 시선이었다. 그것은 늘 값싼 비용으로 유지됐다.
그리고 경계가 드러났다. 코로나19에서 우리가 마주한 것은 경계였다. 그것은 내가 당신이 될 수 있다는, 당신과 내가 같다는 어설픈 감정이입이 아니었다. 값싼 비용으로 유지해온 어떤 노동이 사회를 멈춰 세울 수도 있다는 진리였다. 코로나19 이후 재난 속에서 사회기능을 반드시 유지하는 데 필요한 필수 노동자 4명 중 1명은 60세 이상 여성노동자였다. 값싼 비용으로, 비정규직으로, 당신이 아프거나 다치면 다른 노동으로 대체할 수 있는 부속품으로 여겼던 일자리들이었다. 그러나 그 공백 이후 시민이 마주하게 될 혼란은 숫자로만 가늠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코로나19 이후 필수 노동자들의 처우는 달라졌을까. 법은 만들어졌지만 달라진 건 없다. 지정 종사자 법률이 시행됐지만, 여전히 필수업무 범위조차 정해지지 않았다. 만약 당신이 사라진다면. 어느 영화에서처럼 외계인이 한 날, 한시에 당신들을 모두 데려간다면. 그것은 얼마나 혼란일까.
당신과 나의 경계를 생각한다. 선은 점과 면의 중간이다. 점이 모여 선이 되고 선이 모여 하나의 면이 된다. 그렇다면 경계선은. 점도 선도 아닌 그 어딘가에 경계선이 존재한다.
크리스티안 크라흐트의 소설 '나 여기 있으리, 햇빛 속에 그리고 그늘 속에'에는 경계에 선 존재들이 등장한다. 여러 영역 안에 동시에 선 경계의 존재들. 소설은 가상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다. 1917년 2월 혁명 이후 상트페테르부르크행 열차를 타지 않은 레닌, 그는 러시아로 돌아가지 않고 스위스에 남아, 스위스소비에트공화국을 설립한다. 그렇게 독일과 영국을 상대로 한 96년의 전쟁이 시작된다.
'나'가 모든 것의 무의미함을 깨닫는 순간은 브란치스키 대령을 만난 순간이다. 모든 것은 가공의 것이며, 내가 알던 세계는 모두 무의미하다. 공화국은 아무런 실체가 없다.
"당신의 기억은 사실이 아니에요. 우리가 실제라고 부르는 그런 사실 말입니다. 당신은 청소년 시절부터 줄곧 세뇌를 받아왔으니까. 당신은 스위스의 노예라고요. 노예로 태어나 노예로 훈련받고 노예로 만들어진 거죠. 당신과 당신의 민족은 그냥 대포밥이예요. 로봇이라고요.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답니다. 당신의 어린 시절은 한 편의 위조입니다"
나는 죽임을 당하지만 죽지 않는다. 나는 햇빛 속에도 그늘 속에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의 정체성은 확고하게 그어진 경계선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그의 심장은 오른쪽에 존재하며, 그는 백인이면서 동시에 흑인이다. 그는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다. 분리와 경계가, 주체와 객체의 대립이 그의 앞에서는 무의미하다. 그는 가상의 인물이지만, 우리 모두에게 존재하는 정체성이기도 하다.
유클리드 기하학에서는 경계를 빛이 있고 없는 경계로 정의했다. 우리 모두는 햇빛 속에도 그늘 속에도 존재한다. 그 경계에 당신과 내가 있다. 전단지 노동이 사라진다고 이 세계가 멈춰 서지는 않는다. 하지만 상상해본다. 어떤 필수노동에서 밀려난 당신이 밀려나고 밀려나 그곳에 서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 그 지하철 출구 앞의 당신이 내 옆자리 누군가의 엄마일지도 모른다는 상상. 그런 상상이 이 세계를 만든다는 생각을 한다. 그것은 거창한 공감이 아니다.
우리 삶의 문제들은 예고 없이 불쑥 일상을 밀고 들어와, 불쑥 일상을 깨뜨린다. 그것은 당신도 나도 누구도 비껴가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여행해야 한다. 당신과 나의 경계를 생각하고 여행해야 한다. 그곳에서 우리는 길을 찾을지도 모른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