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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별 Sep 16. 2024

동행

아버지 손잡고 걸었던 어릴적 기억


   

  열 살짜리 아이는 발이 아파 새 구두를 벗고 맨발로 걸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가족들과 경주 여행을 간 적이 있다. 사진을 보니 모처럼 여행을 간다고 챙 달린 둥근 모자와 세트로 된 치마 정장, 그리고 빨간색 구두를 신고 있는 나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위아래로 남자 형제들만 있어 평소 어머니는 나도 남자 형제들처럼 짧은 커트 머리로 헤어 스타일을 고수하시고 티셔츠, 바지 차림의 간편한 복장을 챙겨 주시는 편이었는데 그날 나의 옷이 평상시와 다른 걸 보니 특별한 여행었나보다. 경주에서 금관, 천마총, 불국사, 석굴암 등 주요 문화재들을 해설하시는 분의 설명과 함께 재미있게 구경했던 기억이 남아있고 그보다 더 생생하게 남아있는 기억은 예뻤던 새 구두 때문에 발이 너무 아팠다는 것이었다. 어느 공원을 걸어갈 때 참을성의 한계가 와서 더 이상 못 걷겠다고 투정 부렸더니 아버지께서 신발을 벗고 맨발로 가면 된다고 알려 주셨는데 나름 학교에서 모범생 소리 좀 듣는 아인데 맨발로 걷는다는 게 창피해서였는지 성격이 예민해서 발이 더럽혀지는 게 싫어서였는지 맨발로 절대 못 걷겠다고 한 것 같다. 아버지(내가 열 살 때니 아버지는 서른여덟의 젊은 나이)는 자기 손을 잡고 걸어가면 된다고 달래셔서 아버지의 손을 잡고 다른 손에 구두를 들고 조심조심 걸어갔다. 당시 여자아이라면 누구나 신었던 밝은색 타이즈의 발바닥 부분이 더러워지는 일이 신경이 쓰여서 얼굴이 울상이었던 것 같다.


 이번에 팔십 다 되신 아버지와의 전시를 준비하면서 아버지의 수채화를 참고로 그리는 그림 외에 두 사람이 사는 동네의 전망을 크게 그린 그림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송파구의 아파트가 내가 사는 수지의 아파트로 점차 변화하는 모습을 선으로 묘사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막상 그려보니 아파트라는 것이 다 거기서 거기인지라 중간에 만나는 부분의 이음새를 신경을 쓸 필요 없이 그냥 두 동네가 하나같았다. 60호의 캔버스 위에 두 사람이 사는 아파트가 넓게 펼쳐진 가운데 이 그림 속에 아버지와 나의 뒷모습을 그려보면 괜찮겠다고 생각했는데 어린 시절 해외 출장으로 부재가 많으셨던 아버지와 둘이 찍은, 다정해 보이는 사진을 찾기 어려웠다. 어렵사리 찾은 사진이 경주 여행 때 찍은 이 사진인데 한껏 빼입고 맨발로 걷고 있는 어린 나와 젊은 아빠였던 시절 늘 큰 가방을 메고 다니셨던 아버지 두 사람이 손잡고 걸어가는 뒷모습이 들어 있었다.


 아버지는 해외 건설 현장을 책임지는 매니저로 일하시며 나의 유아기, 아동기 성장하는 모습을 거의 보지 못하셨고 청소년기가 되어 부모와의 애착이 옅어질 무렵 우리와 함께 국내에서 살기 시작하셨다가 다시 해외로 나가셨다. 함께 한 시간이 부족한 우리 부녀는 사실상 자잘한 정을 쌓지 못해서 같이 있어도 왠지 어색한 사이였다. 서로 자연스럽고 편안한 대화를 할 수 있도록 물꼬가 트인 계기는 내가 첫 아이를 낳고 아버지께서 아이를 너무 사랑하셔서 늘 안아 주시고 자주 만나러 오셔서 대화를 나누게 된 무렵부터였다. 자신의 자녀들이 가장 귀여울 때 자라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늘 황량한 건설 현장에 계셨기 때문에 손자가 태어나서 자라는 과정을 보는 일을 진심으로 기뻐 하셨다. 그전까지 정이 쌓이지 못했던 어색한 부녀 사이였지만 나의 삶 중간중간 아버지께서 딸에게 애정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해 준 몇 번의 순간들이 기억 속에 남아 있긴 하다.

 경주에서 맨발로 걸을 때 아버지 손을 잡고 걸으니 창피하지 않았던 기억, 고등학생 때 열감기에 걸려 저녁 내내 앓고 있을 때 물수건을 갈아주시던 기억, 자카르타에 둘이 지내면서 맥주 한잔 걸치며 서로의 삶과 미래에 관한 대화를 나눈 기억, 아버지께서 인도네시아 회사에서 나와 한국으로 떠나시기 전 함께 여행을 했던 쁠라우 스리부에서 밤바다 보며 속내를 털어놓고 서로를 격려해 주었던 기억 등.


<동행> 80.3 x 130.3 cm acrylic on canvas 2024

 

 이 그림 속 배경은 평범한 아파트 단지인데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삼십 살이 될 때까지 자라온 나에게 아파트는 마냥 삭막하게 느껴지지 않는 친숙한 풍경이다. 태어나서 열 살 때까지 아버지께서 지으셨다는 단독 주택에서 자랐고 열한 살 때부터 지금까지 나의 주거지는 늘 아파트였다. 똑같아 보이는 네모난 주거 공간이지만 그 속에는 인생의 각양각색의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삼십 대의 젊은 아버지와 어린 딸이 손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이 배경과 오버랩되어 있고 왼쪽에는 아버지의 삶의 공간인 송파구 일대 아파트와 어린 시절 과수원 하는 집에서 자라셨음을 암시하는 사과나무가 그려져 있다. 이 사과나무는 아버지의 고향 트미실을 답사하러 갔을 때 어느 과수원에서 보고 공중에 드로잉을 하는 것 같은 나뭇가지 선이 멋이 있어 사진에 담아온 것이다. 오른쪽에는 현재 내 삶의 공간인 용인 수지의 아파트가 있고 스케치북을 들고 다니며 스케치하는 것을 취미로 즐기는 나의 삶을 의미하는 이미지인 만년필로 그림 그리는 손을 넣었다. 작품 제목 '동행'을 짓고 보니 요즘 잘 듣고 있는 가수 김동률의 노래 제목과 같다.


 이제 5일 뒤면 성남아트센터 갤러리 808에서 아버지와 함께하는 전시를 열게 되는데 아버지와 딸이 인생의 한순간에 동행했던 따사로운 기억을 품고 있는 이 작품을 갤러리 중앙에 걸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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