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도호 <스페큘레이션> 전시와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
그동안 서울 문화생활을 할 때 주로 삼청동을 방문했고 국립현대 미술관과 국제 갤러리, 학고재, 가끔 금호 미술관 등을 섭렵하곤 했다. 뒤늦게 한남동과 청담동 일대에 좋은 갤러리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최근에는 그 동네에서 새로운 곳을 발굴해 가는 중이다. 가을 날씨가 아름다웠던 오늘은 서도호의 전시를 꼭 보고 싶어서 다시금 친숙한 동네인 삼청동을 찾게 되었다.
서도호 작가는 이미 명성이 자자한 동시대 미술가로서 다양한 출판사에서 나온 중고등학교 미술 교과서들 중 대부분에 이 분의 작품이 실려 있다. 이번 아트 선재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대규모 개인전에 대한 관람평들이 워낙 좋았고 추천하는 사람이 많아 기대감을 가지고 방문했는데 기대한 만큼 놀라움을 주는 전시여서 몇 시간을 집중해서 보고 왔다.
제목에 사용된 '스페큘레이션(speculation)'이라는 단어는 추측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갖고 있으며 작가의 미래에 대한 상상, 삶과 세상에 대한 성찰을 경험할 수 있도록 이 전시의 사유 전략으로 사용된다고 한다.
서도호 작가가 그간 해왔던 작업들은 집을 소재로 한 설치, 입체 미술이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졌던 것으로 아는데 이번에도 집에 대한 사유를 흥미롭게 풀어낸 작품들이 많았다.
1층의 '다리 프로젝트' 라는 작픔은 작가가 주인공이 되어 자신이 몸담았던 뉴욕, 런던, 서울 세 도시들의 위치를 연결하고 중간 지점인 북극 지방에 완벽한 집을 만드는 상상을 실현하기 위한 여러 시도들을 유머러스한 내용과 스펙터클한 그래픽 영상으로 풀어냈다. 영상 속에서 작가가 극지방에서 생존하기 위해 착용했던 간이용 집 역할을 하는 방한복이 스크린 앞에 실물로 전시되어 있었고 그 복장을 구상하는 과정의 입체 샘플과 방대한 스케치들이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실물과 미디어 아트를 함께 구성함으로써 관람자가 가상의 세계에 더욱 몰입할 수 있게 했다.
2층의 전시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서도호라는 작가가 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우리나라의 동시대 미술가를 대표할 수 있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게 하는 작품들이라고 생각된다. 유명한 '집 속의 집' 설치 작품을 축소한 모형으로 시작하여 그간 해왔던 집을 소재로 한 기상천외한 상상력을 구현한 작업들을 모형과 그래픽 영상, 드로잉, 글 등으로 감상할 수 있었다. 완벽한 집은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작업으로 트레일러 위에 작가가 살았던 한옥과 전통 정원을 조성하고 미국을 횡단하는 작품, 대도시 또는 무인도에 불시착한 한옥의 모습을 디테일하게 재현한 모형 작품 등이 있었다. 개인과 사회의 관계나 권력 구조에 대한 도전을 주제로 한 작업으로 기념 조각상이 군중으로 변해 받침대를 이고 가는 작품, 조각상이 번개를 맞고 형태가 내부로 들어가 버려 지하의 거꾸로 조각상이 되는 작품 등이 있었다. 대형 거울을 실은 트레일러가 미국을 횡단하며 실제 풍경과 반사된 풍경을 묘하게 합성시키는 작품은 국내외 도시들을 이동하며 유목민처럼 사는 자신의 상황을 상징한 것인가 싶었다. 미국의 캘리포니아 대학교 건물 옥상 모서리에 작은 주택이 불시착한 모습을 한 설치 작품은 스튜어트 문화 재단이 후원 작품으로 선정하여 현실화시켰는데 많은 전문가들이 작가의 구상을 변형 없이 실현시키기 위해 구조 공학적, 물리적으로 노력과 논의를 하는 과정을 영상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작가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미국 미술계에서 인정해 주어 실현시킨 광경이 감동적이었지만, 막상 작품을 대할 때 시민들 중 일부는 후원금이 아깝다는 둥 작품을 이해할 수 없다는 둥 부정적인 피드백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명성을 얻은 현대 미술가라고 해도 대중들로부터 이해받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음을 알았다.
이번 서도호 전을 열면서 아트선재 센터 옆에 있는 한옥 건물을 지난 전시의 팜플랫들을 진열, 판매하는 아카이빙과 아트샵을 겸한 '더북스'라는 곳으로 꾸몄다고 한다. 내가 예전에 아트 선재 센터를 방문했을 때 못 봤던 곳이라고 안내하시는 분께 말씀드렸더니 과거에는 갤러리, 카페 등으로 운영되었다고 알려주셨다. 내부도 아늑했지만 한옥 외부의 대청마루에 앉아 작은 전통 정원을 바라보는 고즈넉한 여유를 즐길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서도호 작가의 전시가 준 경이로움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그동안 잘 사지 않던 전시 팜플랫을 특별히 구입했다. 전시 팜플랫이라고 했지만 작가의 러프한 아이디어 스케치들이 인쇄된 두툼한 스케치북이라 작가의 그림을 두고두고 꺼내 볼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전시의 여운을 안고, 삼청동 방문하면 다시 가려고 생각했던 곳인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로 향했다. 그동안 두 번 방문했는데 한옥과 현대 건물이 결합된 건축물(과거에 갤러리 서미였다고 한다.)의 형태도 훌륭하고 미술과 디자인 관련 서적들이 많은 쾌적한 장소라서 갈 때마다 느낌이 좋았다. 1층의 레어북 라이브러리라는 희귀본 서적 전시관을 예약해서 잠시 도슨트의 설명을 들었다. 전권을 보유하고 있다는 미국의 라이프지와 플레이보이지, 이탈리아의 건축잡지 도무스지 등에 관한 설명을 들었는데 가장 관심이 갔던 잡지는 오브제 작품으로 한정판을 내는 '비저네어(visionaire)'라는 예술적인 잡지였다. 제판용 동판 모음, 향수 모음, 향신료 모음, 레코드판, 데님 셔츠, 향초, 아트 토이, 입체 조형 등 표현의 한계라는 게 없었고 각 잡지들의 아이디어와 디자인이 세련되고 참신했다.
서가에서 사진, 디자인, 예술에 관한 서적들을 잠시 열람했고 디자인의 기본 조형을 쉽게 알려주는 '디자인 구구단'이라는 흥미로운 신간을 발견해 그 자리에서 동네 도서관 사이트에 예약 도서 신청을 했다.
오직 하나의 전시만으로도 적지 않은 영감을 얻고 정서적 포만감을 느낄 수 있었던 삼청동 방문이었고 보기 드물게 완벽한 가을 날씨가 함께 해 주어 행복한 주말이었다. 삼청동 갈 때면 참새 방앗간처럼 들르는 곳인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과 국제 갤러리에 못 간 관계로 가까운 시일 내에 다시 갈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