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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잡념 박스

사유의 믹서기, 세상의 소멸에 관하여

문자가 빼곡히 써 있는 종이를, 파쇄기로 갈기갈기 갈아버려라

by Edit Sage

사유는 믹서기다.

생각과 감정, 이념과 습관,

그 모든 걸 넣고 돌리면

정체성의 형체조차 사라진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고심했는가?

빽빽한 문장들,

절박한 해석들,

조밀한 개념의 겹겹들.

그 모든 건

당신의 세계를 지탱하던 구조물이다.


그러나

그 구조가

지탱하고 있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두려움이다.



믹서기의 날이 회전할수록,

‘설명하려 했던 모든 말’은

침묵보다 불순해진다.


그래서

파쇄기로 갈아라.

문장이 담고 있던 권위,

문장이 포장하고 있던 감정,

문장이 막고 있던 가능성을

갈기갈기 찢어버려라.



세상의 소멸이란

폭발이 아니라

해석의 멈춤이다.


그 어떤 정의도 붙지 않는 상태.

그 어떤 언어도 도달하지 못하는 침묵.

그 무語의 공간에서,

비로소 새로운 감각이 태어난다.



문자는 감옥이다.

그 종이 위에 쓰인 모든 명제는

기억의 질서이며,

존재를 제한하는 연습장이다.


그걸 불태우는 게 아니라,

잘게 부숴야 한다.

하나하나 갈아서,

의미조차 재조합할 수 없을 만큼

소리 없는 입자로.



사유의 믹서기는

해체의 기술이 아니다.

그건 존재의 물성 실험이다.


믿었던 너를

믿었던 방식으로

믿을 수 없을 때,


그곳에서만

새로운 ‘너’가 발효된다.



묻는다.

당신은 지금까지

무엇을 설명해왔는가?

그 설명은

당신을 구했는가,

아니면 구속했는가?



그러니,

갈아라.

파쇄기의 칼날에

당신의 언어를 올려라.


다시 말이 되지 않도록.

다시 쓰여지지 않도록.

오로지 감각만 남도록.



세상이 소멸하는 순간이란,

사유가 감각을 멈출 때가 아니라,

사유가 스스로를 삼켜

침묵의 덩어리가 될 때이다.



그 덩어리 위에서,

너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존재의 구조’를 조립할 수 있다.


그리고

그때부터

말은 다시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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