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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 still Dec 31. 2022

인도 버스 여행에서 만난 한 가족

그냥 행복하면 되는거지

히말라야 계곡 바람을 피해 리시케시에서 푸쉬카르로 이동했다. 버스여행이기에 그냥 단순하게 생각해서 버스를 한 번만 탈 줄 알았는데 버스를 3번이나 갈아타야 했고 16시간이 넘게 걸린 버스 여행이었다. 그것도 완행버스로 많은 곳에 멈춰 섰고 많은 사람들이 탔다가 다시 내리기를 반복하는 여행이었다. 버스가 멈출 때마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구글지도로 위치를 확인해보았는데 지도상에서 정말 눈곱만큼 이동한게 다였다.


내가 예약한 자리는 1인용 침대칸이었고, 통로를 사이에 두고 2인용 침대칸이 있다. 버스에 올라보니 내 옆 2인용 침대칸에 성인 3명과 2명의 아이들이 앉아 있었다. 그 들은 할머니, 엄마, 아빠와 초등학교 1학년쯤으로 보이는 여자아이와 갓난아기였다. 갓난아이를 제외하고서도 총 4명이 2명의 자리를 택하고 여행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내가 가방을 내리고 모자를 벗고 마스크를 내려 물을 마실 때마다 쉴 새 없이 나를 관찰하였다. 나를 네팔사람으로 착각을 하고 있던 그 가족은 나의 국적을 묻더니 한국인임을 확인하고 한국의 코로나에 대해 짧은 단어로 물었다. 팬데믹 중에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던지라 다시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쪽에서 증가하는 확진자 수를 매일 매스컴에 알리며 코로나 재유행에 대비하고 있는 중이고, 경계해야 하는 아시아의 5개국 중에 불행히도 한국이 끼어있었다. 나는 한국은 괜찮다며 나는 중국 사람이 아니라고 짧은 영어로 이야기를 했다. 괜찮다는 이야기에 마음이 놓이는지 그들은 나에 대한 경계를 조금 푸는 듯이 보였고 연신 신기한 듯 나를 바라봤다. 영어가 안되지만 손짓으로 우리는 "혼자 여행하느냐?" "푸쉬카르를 왜 가느냐?" "결혼은 했느냐?" 등등 소통을 했고 그것을 바라보던 다른 인도인들도 내 주위를 둘러싸고 궁금한 듯 자리를 잡았다.


나를 둘러싼 인도인들 한가운데에 있는 것이 참 오랜만에 마주하는 모습이었다. 내가 맨 처음 인도 여행을 했을 20년도 더 된 그때는 길거리에 외국인만 나타났다고 하면 순식간에 100명도 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었다. 그들은 일종의 호구조사를 하며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 낯선 외국인에 대해 정보를 나누곤 했다. 이름은 무엇이고, 직업은 무엇이고, 아버지는 무엇을 하며, 돈은 얼마나 벌며, 등등을 물었었던 것 같다. 그때의 나는 내 개인정보를 비롯한 신상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이 싫어서 어떻게든 이야기를 안 하고 싶어 했던 때가 더 많았다. 개인 신상에 대해 묻는 사람들은 그나마 양반이었고, 특히나 시골 인도할머니들과 아주머니들은 불쑥불쑥 내 피부를 만지기도 했었다. 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흰 피부를 가진 내가 무척이나 궁금하였고 한 번씩 만져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내 피부를 만지고 신기한 듯 쳐다보고 자기들끼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었다.


요즘 인도의 대도시에서는 외국인이 와도 별 관심이 없다. 인도는 많이 변했다. 대도시에서 지하철을 타도 자신들의 스마트폰만 바라볼 뿐 다른 일에 별 관심이 없다. 그런데 이렇게 인도 사람들에게 오랜만에 둘러싸여 본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다시 20년도 넘은 그때의 여행자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었다.


여행 중에는 마주하는 상황과 나에게 접근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 늘 분석을 하곤 한다. 이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해야 하나 경계를 해야 하나라는 생각에 많은 에너지를 쓰는 것이 사실이다. 이 가족에게 어떻게 대해야 할까 고민하다 결국 한 버스를 타고 같은 목적지로 간다는 것을 알고 나도 그들에게 경계를 풀었던 것 같다.


장시간의 버스 여행을 위해 그 가족은 두꺼운 이불까지 준비를 했는데 아무것도 없는 나를 보자 나에게 자신의 숄을 그냥 내주었다. 추우니 꼭 덮고 자라는 이야기이다. 처음에는 사양하였지만 잘 닫히지 않는 창틈으로 들어오는 밤바람을 생각하니 안 받을 수도 없었다. 그 숄은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그게 없었으면 나는 추위에 떨면서 버스에서 내리면 감기에 걸렸을지도 모르겠다. 숄도 챙기지도 않은 내가 너무 불쌍해 보였을까? 나중에는 밖으로 나가 짜이를 사가지고 와서 따뜻한 짜이 한 잔도 나에게 내밀었다. 내가 잠시 화장실을 갈 때 내 짐도 봐주고 아침 일찍 간밤에 내가 추위에 떨었는지 확인도 하고 새벽에 버스 밖으로 나가 온 가족이 마실 짜이를 사 오면서도 내 것도 잊지 않고 챙겨주었다.  고마운 가족이었다. 그렇게 버스를 타고 푸쉬카르에 도착했다.



버스에 내려 화물칸에 있던 내 짐을 찾고 나서 함께 여행한 그 가족에게 인사를 건네려 기다렸다. 그제야 안 사실인데 온 가족이 신발을 신지 않고 있었다. 나는 버스 안에서 신발을 안 신고 돌아다니는 것은 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다. 인도인들이 건물 안에서 기차 안에서도 신을 신지 않고 돌아다니는 것을 종종 보기도 했었다. 그런데 버스에서 내려서 모든 짐을 챙겨 들고 서있는 가족들을 마주 할 때 나는 비로소 그들 모두 신발을 신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인도에서 심리학 석사과정을 공부할 때 약 1년 정도 인도의 국립학교에서 주 2회 정도 인턴을 했었다. 빈민가의 아이들이 다니던 학교였다.  영국의 한 NGO단체의 후원을 받고 있던 그 학교는 빈민가에 있는 인도 아이들에게 가방과 신발을 제공하며, 정규교육을 받을 것을 권장하였다. 그때 그 학교 교장은 아이들이 생애의 첫 신발을 가져보기 위해 이 학교를 오는 아이들도 있다고 했었다.


나는 순식간에 이 가족이 어떠한 환경 속에 살아가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 또 다른 생각도 들었다. 인도사람들은 성지 순례를 꼭 가고 싶어 하고 어떤 곳을 성지순례할 때는 신발을 신지 않고 가는 경우도 있다. 요가학교의 한 교수님이 어느 날 신발을 신지 않고 지나가길래 물었더니 약 2주간 힌두교 성지로 여행을 가는데 그때를 대비해서 지금부터 신발을 신지 않는 것을 연습한다고도 했었다. 또 아루나찰라성지, 라마나마하리쉬 아쉬람으로 유명한 Tiruvannamalai도 신발을 신지 않고 걷는 일이 다반사이기에 그들이 신발을 신지 않았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 순박한 시골 가족들이 신발을 신지 않고 있음에 나는 잠시 당황했지만 자신들이 신발을 신고 있지 않다는 것에 그들은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기나긴 버스 여정으로 힘들었을 텐데 갓난아이를 챙기고 짐을 챙기고 하루 밤 옆에서 보낸 외부인에게 아쉬운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영어를 못하는 그 가족은 내게 계속 무슨 말을 하고 있었고 눈치로 보아하니 푸쉬카르에 머무는 동안 자기 집에 와서 밥을 먹고 가라는 이야기 같았다. 그 말을 못 알아먹는 척 태연하게 인사를 나누고 그들과 헤어져 미리 예약을 해 둔 숙소로 이동을 했다.




이 가족과 함께한 시간 동안 나는 그저 잔잔한 따뜻한 마음이 느껴졌었다. 힘든 버스 여정이었지만 나름 안도감을 느끼게 해 준 시간이었다. 그들은 가진 것이 나보다는 부족해도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행복은 무엇인가를 성취해야만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남이 가지고 있지만 나에게는 없는 것들만 보다 불행하다고 느낄 때도 있었다. 지혜로워야만 행복할 수 있고 성공해야지만 행복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행복은 뭔가 고진감래처럼 힘겨운 시기를 겪어야지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던 때도 있었다. 나이 사십이 넘고 나서야 행복에 대해 그런 개념들을 가지고 있었던 나 자신을 무심한 듯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여기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사는 곳이다. 그 가족 또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겪는 우여격절도 겪고 행복한 일도 겪을 것이다. 그들도 나처럼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럼에도 지나쳐가는 낯선 여행자에게 이렇게 친절하게 대해줄 수 있을까? 과연 나라면 그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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