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3일 오전 11시 55분, 영하의 쨍한 날씨에도 따뜻한 지하도를 두고 찬바람을 맞으며 광화문에서 20여분을 걸었다. 목적지인 을지면옥까지는 5분.
오늘 점심은 예측 가능하다. '오랜만에 냉면에 소주 한 병 마시겠네.' 점심을 함께 할 회사 선배가 먼저 자리를 잡았다는 소식에 신호등을 바라보는 마음이 급해졌다. 반주에 취한 선배의 붉은 얼굴까지 떠오르자 마스크 아래로 웃음이 났다. 파란 불이 켜지고 을지면옥까지 달렸다.
수육 한 접시와 소주 한 병. 찬 기운을 몰고 온 내 앞에 따뜻한 면수 한 컵 놓아주고 "따뜻하게 몸 좀 녹이라"며 반겨주는 선배. 머릿속에 떠올렸던 그림과 완벽히 일치했다.
"새해니 찬술을 마셔줘야지?" 함께 술을 채우고 잔을 부딪히며, 최근 바뀐 부서 생활부터 서른이 되자 느낀 심란한 심경까지 오래 쌓인 내 근황을 허겁지겁 풀었다. 둘이 소주 1병을 비워 얼굴이 뜨끈해지고서야 시작하는 평양냉면 한 그릇. 세상에 가득한 예측 불가능함을 줄이기 위해 생활의 규칙을 정해 따르는 '모닝 루틴'처럼 추위에 움츠러들어도 냉면을 즐길 수 있는 '평양냉면 루틴'이다.
술 기운에 냉면을 끝까지 비울 때까지 사진 한 장 찍는 것도 떠올리지 못 한다는 것이 이 루틴의 단점이라면 단점.
나는 서울에 연고가 없다. 회사에 붙은 2018년 말에야 난생처음 서울에 방을 구해 살기 시작했다. 친구도 가족도 없는 서울은 몇 년이 되어도 땅에 발을 붙이고 있는 것 같지가 않다. 쿠폰을 다 채울 만큼 좋아하는 집 근처 카페도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찻집처럼 여전히 낯을 가리게 되는 것이다.
이 낯설고 정이 안 가는 도시에도 '평양냉면 루틴'처럼 예측 가능한 사람과 장소가 느릿한 속도로 쌓이고 있다는 것은 큰 위로다. 서울의 개미굴처럼 복잡한 지하도가 두려워 추위를 감수하고 지상을 선택하는 지방 사람에게도 맘 놓고 냉면 한 젓가락에 술 한 잔 마실 사람들이 생기고 있다.
강원도에서 나고 자란 나는 함흥냉면 밖에는 몰랐다. 신문사에 들어와 처음 맛본 평양냉면은 내게 온전한 '서울의 맛'이다. 아무것도 넣지 않고 순수한 평양냉면을 후루룩 마시는 내게, 선배가 평양냉면에 대해서 잘 아는 것 같다며 농담을 던진다. "선배 따라서 먹는 건데요!" 선배들을 따라 이 집 저 집 가본 평양냉면집, 이제는 내가 후배를 데리고 밥을 사주러 간다. 서울이라는 도시가 내 삶에서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