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부터 파가니니 콩쿠르 우승자인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의 연주에 빠져 있습니다. 집에서는 예리하면서도 부드럽고 힘 있는 연주 영상들을 돌려 봤고, 출퇴근 길에는 스포티파이에 올라온 '현의 유전학' 앨범과 파기니니 앨범을 들으며 24시간을 양인모로 꽉 채우고 있었어요.
그러다 며칠 전 양인모가 참여했다는 'Leellamarz'의 'violinist 2'라는 앨범이 눈에 들어왔어요. '해외 뮤지션인가?'하고 들었는데, 요즘 국내 힙합씬에서 유행한다는 싱잉 랩을 하는 릴러말즈라는 래퍼였습니다. 힙합은 잘 듣지 않지만, 앨범 전체를 흐르는 바이올린 선율이 매력적이었습니다. 박수로 시작해서 인터미션 skit을 거쳐 박수로 마치는 연주회 형식으로 구성된 앨범(https://youtu.be/PTfZ_lOR5XI)도 특이했습니다. 릴러말즈가 궁금해졌습니다.
"어떻게... 어떻게 관둘 수 있었을까? 바이올린은 저 사람의 모든 것이었을 텐데..."
그의 본명인 'Minkyum Kim' 채널에 3년 전 올라온 바이올린 연주 영상에 달린 댓글입니다. 영상 속에서 까만 셔츠를 입고 역동적으로 바이올린을 켜는 김민겸은 10분 간 한 순간도 긴장을 놓지 않았습니다. 클래식을 모르는 제가 봤을 때도 그는 빛나는 재능을 가지고 오랜 시간 단련한 바이올리니스트였어요. 김민겸은 한예종에 영재 입학하고 어릴 때부터 바이올린 영재로 엘리트 코스를 밟다가 랩을 하게 됐다고 해요.
'Trip'이라는 노래를 관중과 함께 부르면서 바이올린을 켜는 공연 직캠(https://youtu.be/qEG7DaruWFo?t=120)까지 보고 '릴러말즈는 정말 용감한 사람이구나' 감탄했어요. 자신의 모든 것을 뒤로하고, 그것도 훌륭한 결과를 내던 모든 것을 뒤로하고 새로운 분야에서 첫 발을 내딛는 것은 어려운 일이니까요. 내가 버리고 온, 또는 버려지고 온 과거를 외면하는 대신, 그 정체성을 수용하고 '바이올리니스트'라는 이름을 단 힙합 앨범을 만들어낸 것도 용기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느꼈어요. 저는 제 못난 과거에 대해 외면하는 게 더 쉬웠으니까요.
저는 전자공학을 전공했지만, 코딩 한 줄도 제대로 짜지 못하는 상태로 졸업했어요. 학교를 떠난 뒤 언론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분야로 발을 내디뎠지만, 공대 백그라운드를 제 삶에서 아예 지워버리고 싶었습니다. 언론사에 입사할 때도 자기소개서를 반복해 쓰면서도 나의 강점에 공학을 전공했다는 건 적지 않았어요.(하지만 취준이 길어진 뒤, 4차 산업혁명을 가장 잘 이해하고 가장 잘 쓸 수 있는 기자라는 말을 적고 나서야 전형별 합격률이 높아지기 시작했어요.)
"왜 그 취업 잘 된다는 전자과를 나와 기자가 됐어?"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엔지니어의 삶을 선택하지 않은 여러 이유를 만들어냈습니다. 하지만 제가 공학 분야에서 탁월한 역량이 있어 엔지니어의 삶에서 무력함을 느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면 떠나지 않았으리라, 하는 희미한 열패감도 있었어요. 나는 공학에서 '실패자'이기에 공학/과학에 대한 전문성을 내세울 자격이 없다고요.
릴러말즈도 저 같은 생각을 했더라고요. 지난 1월 힙합엘이와 한 인터뷰(https://youtu.be/fuIHazViJJk)에서 릴러말즈는 "랩을 하는 동안에 바이올린을 그만두고 온 사람이라는 생각이 제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았어요. 남들이 뭐라고 하든 저는 패배자였어요."라고 합니다. 이어 "이제는 그게 아니라는 걸 알죠. 랩을 더 좋아해서 더 솔직하게 랩을 하러 온 사람인 거예요."라고 말합니다. "바이올린을 하던 김민겸과 래퍼 릴러말즈를 두고 보면, 래퍼 릴러말즈는 너무 X밥"이라고도 인정하죠.
여전히 자신이 떠난 곳에서 바이올린을 켜는 친구 양인모에 대해서는 "제가 바이올린을 하면서 한 번도 이겨 먹어본 적이 없는 친구"라며 "그 친구 연습하는 걸 보면 바이올린을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면서도 "이번 앨범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건 양인모라는 클래식 연주자와 바이올린이라는 악기였다"며 "정말 양인모라는 바이올리니스트의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은 진짜 귀한 경험"이라고 친구에 대한 자랑스러움을 감추지 않습니다.
양인모의 바이올린 연주와 릴러말즈의 래핑이 함께 하는 '바이올리니스트 2' 앨범은 다른 힙합 앨범과 확실히 다르고, 힙합에 익숙하지 않은 제게도 멋지다고 느껴졌어요. 이 앨범을 반복 재생하며 생각이 들었어요. 첫째, 못나게 느껴지는 과거에 대해 선을 긋지 말자. 우물을 벗어나 다른 세계로 나온다면, 그 못난 과거는 독보적인 실력이 될 수 있다. 둘째, 내 과거를 다른 사람은 흉내 낼 수 없는 나만의 고유함으로 살려내는 것이 내 커리어 상 전략적으로 이로울 뿐 아니라 더 쿨하고 멋지기까지 하다.
온전한 실패로 느껴지는 시절이 있으신가요? 하얗게 잊어버리고, 없던 일처럼 새 삶을 살아가고 싶은 과거가 있으신가요? 실패한 나를 직시하고, 받아들이고, 미래로 나아가 보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