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후 닥치는 일들
어느 날 갑자기
# 2018년 11월 24일
롯데호텔에서 부경지역 전문의 연수교육이 있어 참석하였다.
정년퇴임 후 석 달만이다.
접수대에서 이름표 찾고, 참가자 대장에 이름 석자 쓰고, 의사면허번호 적고,
직장 난에 근무처를 적어야 하는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항상 ‘부산 백병원’이라 적었는데
갑자기 적을 이름이 없어졌다.
그래서 아무 글자도 써넣지 못했다.
나에게 이런 날이 올 줄이야!
한 마디로 황당했다.
명함을 파다
인턴부터 시작해서 40년 동안 직장을 다니다가 정년퇴직을 하고 나니
제일 먼저 피부에 와닿는 변화는 갑자기 신분이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전에는 누구를 만나건, 어디를 예약할 때건,
‘백병원 한 교수’라는 말 한 마디면 끝났다.
그것은 마패와 같이 효험이 있어 더 이상의 수식어나 설명이 필요 없었다.
또한,
나와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에게 인사 내지는 부탁하러 오는 사람들이라
남의 명함 받기만 했지 내 명함 내밀 일도 잘 없었다.
하여,
어쩌다 내미는 내 명함에 새겨진 얼굴은
항상 40대의 싱싱한 얼굴 그대로였다.
그런데 막상 직장을 그만두고 나니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 자신을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래서 현재의 내 신분이 무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마~, 이게 딱 정답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소개할 순 없고,
'명색이 작가니 그래도 작가라 소개해야 하지 않겠나?'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그다음에 따라올 장면이 연상되었다.
"직업이 무엇인지요?"
"작갑니다."
"무슨 책을 쓰셨는데요?"
"'얼굴특강'이란 인문학 서적입니다."
"그런 책도 있습니까?"
~~~ 아이고 쪽 팔려~~~
역시 아직은,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기 전까지는,
의사란 말이 들어가는 명함을 하나 파는 게 났겠다.
그래서, 이전처럼 내가 직접 디자인해서 명함을 하나 팠다.
물론, 사진은 넣지않았다.
파놓고 보니 여러 가지 수식어가 들어간다.
게다가 (前)이라는 구차한 수식어까지 들어간다.
지금껏 나는 자신의 명함에 온갖 잡다한 직함 다 갖다 발라 놓은 사람을 만나면
"참 찌질한 인간이로구나."라며 눈을 내리깔고 대했다.
그런데 이제 내 명함이 딱 그 짝이다.
딱히 내세울 만한 게 없다는 말 아니겠나?!
사람이 어디엔가 소속된 곳이 없다는 사실이 무얼 의미하는지 소름돋게 느끼는 요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