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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36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손이 없으면 발로

by 한우물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살고, 입이 없으면 눈빛으로 말하고, 손이 없으면 발가락으로 쓴다.“


이는 단순한 비유를 넘어, 인간이 가진 무한한 적응력과 의지에 대한 찬가로서 이 세 구절이 담고 있는 공통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바로 '이 세상에 불가능이란 없다'라는 선언이다. 불가능은 고정된 현실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익숙한 수단과 도구가 사라졌을 때 느끼는 심리적인 장벽일 뿐이며, 차선책을 찾는 순간 그 장벽은 허물어지고 만다.


씹지 않으면 먹지 못하고, 먹지 못하면 살 수 없다. 그러므로 먹는다는 것은 생존과 직결된 문제로서 '이(齒)' 가 사라진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럴 때 우리는 좌절 대신 ‘잇몸’이라는 차선책을 꺼내 든다.


한쪽 신장이 기능을 잃으면 남은 신장이 두 배 가까이 커져 그 역할을 대신하고, 간암으로 간의 절반 이상을 잘라내도 나머지 부분이 커져 그 기능을 감당한다. 이런 모습을 보면, 인체의 보상 기능이 얼마나 대단한지, 생명력이란 게 얼마나 끈질긴 것인지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소통의 영역에서도 이 원칙은 통용된다.

"입이 없으면 눈빛으로 말한다"라는 구절은 언어라는 가장 명료한 전달 수단을 잃었을 때, 비언어적 수단을 동원해 깊은 교감을 시도하는 인간의 절실함을 보여준다.


입으로 말하는 것은 쉽지만, 눈빛으로 말하는 것은 진심과 의지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언어의 부재는 오히려 눈빛, 몸짓, 침묵 속에 담긴 진실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며, 때로는 수많은 말보다 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마찬가지로 "손이 없으면 발가락으로 쓴다"라는 말은 인체의 기능 상실에 대한 가장 극적인 극복 사례를 제시한다. 도구를 사용하며 문명을 만들어온 인간에게 ‘손’은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끌어올린 가장 큰 도구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손을 잃는다는 것은 곧 인간 능력을 상실한다는 의미와 다름없다. 하지만 인간은 여기에 굴하지 않는다. 손을 사용할 수 없게 된 장애인들이 발이나 입을 이용해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며 소통하고 창작 하는 모습을 보면 숭고하기까지 하다.


세상에서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은 대부분 ‘가장 좋은 방법’이 사라졌을 때 발생하는 일시적인 정지 상태일 뿐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그리고 지능적으로 남아 있는 자원을 재해석하고, 새로운 규칙을 만들고, 대체 경로를 찾아내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과학, 예술, 그리고 개인의 인생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모든 위대한 성취는 기존의 '이'가 부러졌을 때 '잇몸'을 선택하고, '입'을 잃었을 때 '눈빛'을 연마하며, '손'이 제 구실을 못 할 때 '발가락'을 훈련한 결과이다.


헬렌 켈러는 생후 19개월경에 앓은 열병의 후유증으로 시력과 청력을 잃게 되었고, 이로 인해 언어 장애도 함께 겪었다. 하지만 그녀는 시청각 장애인으로서 세계 최초로 하버드 대학교의 여성판 격인 래드클리프 대학(Radcliffe College)에 입학하여 우등으로 졸업했을 뿐 아니라 장애인, 여성, 노동자, 인종차별 대상 등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인권 및 권익 운동에 평생토록 헌신하며 만인의 존경을 받는 입지전적 인물이 되었다.


손에는 엄지손가락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엄지가 없으면 검지로, 검지가 없으면 중지로, 중지가 없으면 약지로, 약지가 없으면 새끼손가락으로 대신하듯, 인생길에도 하나의 정답만 있는 것이 아니라 차선책이라는 여러 개의 해답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불가능이란, ‘현재 나의 능력으로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아직 내가 찾아내지 못한 차선책’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내가 아는 길이 막혔다고 해서 가는 길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요, 목적지가 사라진 것은 더더욱 아니다. 내가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있다면 비록 돌아가고 힘든 길이라 할지라도 또 다른 길을 찾으면 된다. 우리의 의지가 남아 있는 한, 우리는 불가능이란 감옥에, 절망이란 감옥에 스스로 갇혀있을 이유가 없다.



※ 표제사진 출처: 포항 호미곶 바다손(2012-08-14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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