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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빛나라 Jul 19. 2023

동티모르 첫인상

 TB Project Field Manager

작년 연말, 나는 어떻게든 충분히 휴식하며 체력안배 후 다시 일할 기회를 알아보자 맘먹었었는데, 그날이 생각보다 빨리 찾아와 버렸다.


실업급여 신청하고 바리스타 공부를 할까 조리사 자격증을 따볼까 고민 중일 때, 갑자기 국제개발협력 사업관리자 자리가 생겼으니 지원해 보라는 추천이었다. 그때 즈음에 같이 일해보지 않겠느냐는 연락은 이곳저곳에서 받았지만, 나의 시선을 끌지 못했었다. 그런데 동티모르 결핵관리 사업 FM데 3급 전문가 자리란다. 3급라니 살짝 끌렸지만 선뜻 자신이 생기지 않았다. 동티모르에 대한 정보도, 결핵에 대한 지식도 전혀 없었기에 난 추천해 주신 분께 일단 생각해 보겠노라 말씀드리고 시간 날 때마다 정보를 찾아보곤 했다.


동티모르.

2000년이 되어서야 자주국가로서 유엔을 비롯해 많은 원조국가들의 도움을 받고 있는 가난한 섬나라. 티모르 섬조차도 서쪽은 인도네시아, 동쪽만 독립해서 가톨릭 국가로 신앙을 계승 중인 나라. 최저임금 115불 밖에 안 되는 나라. 우리나라 코이카와 산업인력공단 도움을 많이 받고 있는 나라.

산지로 된 섬나라 안에 결핵환자가 너무 많은데 대중교통이 없어 의료접근성이 떨어져서 사망률이 높은 나라.

생각보다 동티모르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아서 의아했는데 실제로 현지에 오고 나니 이유는 확실했다. 인터넷이 너무 느려서 기록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브런치에 글을 못 올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최근 동티모르에서 사업관리를 해 본 친구들에게 조언도 구하면서 응원과 격려로 용기를 얻을 무렵 채용공고가 떴다. PMC 내부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지 못해 공개채용으로 전환한 모양이다. 공고를 보고 지원을 했더니 1차 합격했고, 면접 보러 갔더니 나 포함 3명이 대기 중이었다. 두 분 모두 동티모르에 대한 경험자이고, 나는 남미에서 사업관리한 게 다였기에 불리한 입장이었다. 그래도 경쟁력을 뚫고 내가 선발이 된 건 행운이었고, 기회를 주신 것에 최선을 다해서 공부하고 일해보리라 마음먹었던 계기가 되었다. 그게 벌써 5개월 전 일이었는데, 이 글을 쓰며 시잣할 때의 그 첫 마음을 다시 되새겨본다.


현지 사정이 다급하여 합격통보 3주 내로 출국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연말에 베트남 여행일정이 잡혀있었기에 사실상 2주 안에 출국준비를 마치고 1월 14일 아침부터 부산에서 인천공항 이동해서 오후에 발리행 비행기에 올랐다.

현지 시간 밤 11시 도착했다. 난 경유니까 당연히 발리 도착비자는 생각도 안 하고 있었는데, 딜리행 항공편 시간대는 익일 아침이니 도착비자를 사고 공항 밖으로 나가야 한대서 당황했다. 그리고 연이어 내가 발리 입국 정보는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온 것과 인터넷이 안되니 로밍이 필요하단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던 것을 후회했다. 그동안 남미에서 미국 경유하는 동안 난 너무 좋은 환경의 공항만 경험을 했었던 것이다.  동남아의 현실을 간과한 건 큰 실수였지만, 이런 사실을 알려주지 않은 본부 인사관리자와 동티모르 현지 직원들이 약간 원망스러웠다.


 1년 치 짐을 끌고 이곳에 왔다. 최대한 줄였지만 수화물 3개에 핸드캐리 트렁크할 노트북과 책이 들어 사실상 가장 무거웠던 배낭까지 총 5개였다. 발리 도착비자 구매 후 짐을 찾고 나오는데 밖으로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아 공항에서 노숙을 결정했다. 6시간만 버티면 게이트로 가게 될 테니 쪽잠을 자야지 하고 이동했는데 출국장으로 못 들어가게 막는 것이다. 3시간 남긴 항공권만 들어갈 수 있다길래 에어컨도 되지 않는 공항 한편에서 노숙을 해야 했다.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해 짐을 맡기고 쉴 수 벤치가 있는 곳이라 잠을 좀 설치진 했지만 그렇다고 아주 불편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공항 공중화장실은상황이 달랐다. 5칸 중에 세 칸이 고장이었고 냄새가 고약해서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음날 아침 날이 밝아지니 발리 덴파시공항 바로 뒤에 큰 노보텔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대부분 거기서 1박 하며 씻고 나온다는 사실에 뭔가 큰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그랬다.


출국을 위해 딜리행 항공사에 짐을 부치려는데 비행기가 3시간 연착되었단다. 아뿔싸. 6시간만 버티면 되는 줄 알았는데 9시간이나 기다려야 한다니 원망이 점점 깊어졌다. 누구든 걸리면 짜증이 폭발할 것 같았다. 바탐 항공사는 수화물 수량이 아닌 무게로 계이 되었, 20킬로까지만 무료였다. 나의 짐들의 총무게에서 20킬로를 초과한 만큼은 추가 비용을 청구하는데, 마스터카드는 받지도 않는다. 사실 이건 본부에서 미리 알려줘서 한국에서 비자카드를 급하게 만들어왔어서 당황스럽지 않았다. 문제는 본부에 제출할 영수증을 받아야 하는데, 영수증 준비하는 데한 30분 지체된 것 같다. 차라리 수기로라도 작성해주지 싶을 정도로 인내심은 한계에 차올랐다.

여러 차례 고비를 넘기고 출국심사를 마치고 게이트 앞으로 이동했다. 공항 내 큰 식당에 가서 아침을 주문했다. 인도네시아 국민메뉴 나시고랭. 맛있어서 기분이 조금 풀렸다. 커피까지 천천히 마시고 여유롭게 인터넷 와이파이도 썼다.

딜리까지 1시간 반이면 되는데 시차 때문에 2시간 반이 지나서 동티모르의 수도 딜리에 도착했다. 우선 엄청 뜨거웠고, 시골 시외버스터미널보다 작은 입국심사대에 놀랐고, 빼곡히 줄 선 사람들이 내 앞에 다 새치기해서 나는 제일 끝에 서게 되었다. 입국 수속을 위해 써야 하는 서류가 많았는데 그걸 다 쓰고 줄 서는 게 아니었다. 그냥 들고 챙겨 와서 줄 선 상태로 써야 했던 것이다. 이민청 2명이 이 많은 사람들을 다 담당했으니 서서 한 시간은 기본이었다. 간신히 통과해서 짐 찾으러 갔더니 내 트렁크 하나의 손잡이가 완전히 망가졌다. 기분이 너무너무너무 상했는데 수화물 세 개에 모두 크게 엑스자 낙서가 되어 있는 게 더 속상했다. 그 이유는 바로 옆세관에서 가방을 다 열어본다는 뜻이었다. 어떻게 싼 가방인데 그걸 다시 다 열어 보여야 한다는 게 너무 수치스럽고 짜증이 났다. 싫어도 어쩌겠는가 열어 보여주고 박스들에 대해 일일이 설명해야 했다. 그렇게 랜딩 이후 2시간 만에 공항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땀이 비 오듯 쏟아지는 습함과 뜨거움이었다. 날 마중 나온 직원과 기사 덕분에 짜증이 가시고 다시 고마움으로 전환되었다.


그게 내가 겪은 딜리의 첫인상이었다.

흙먼지 날리는 시내를 지나고 복잡한 골목골목 체구가 작고 까만 사람들이 더위에 퍼져있는 모습.

그 사이에 나도 녹아들고 있었다.


6개월이 되어서야 저장글을 풀어놓는다.

#동티모르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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