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에서 귀국 후 한국에서 한 달간 지내보니 국제개발협력 사업 관계자들에게 연락이 더러 온다. 대화 중에 얻게 되는 정보에 혹해서 그렇게 또 다른 남미 국가에서 진행될 프로젝트의 예비조사팀에 지원하게 되었다. 조사팀은 2주의 짧은 출장 기간이니 백수로 노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으로 부담 없이 지원했다.
그런데 지원서를 쓰려고 보니 어학점수가 필수 조건이었다.
나는 페루에서 한국어 강사로 3년, 코이카 행정직원으로 2년, 또 에콰도르 코이카 사무소에서 2년, 이어서 파라과이에서 프로젝트 매니저로 9개월간 근무한 이력이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지원했던 팀에서 밀렸다. 선발 담당자 말로는 해당 팀에서 스페인어 어학점수가 높은 사람을 선호하여 내가 미끄러졌다고 말했다. 그래 이 바닥은 아직 서류로 평가되는 곳이니 기본적으로 준비할 건 해야지라는 생각으로 급하게 점수를 만들기 위해 오픽 시험을 지원했다.
OPIC이란, ACTFL(American Council on the Teaching of Foreign Languages)가 출제한 인터뷰 평가이고, 인터넷 기반(iBT)의 외국어 말하기 평가로 단순히 문법이나 어휘 등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를 측정하는 시험이 아니라 실생활에서 얼마나 효과적이고 적절하게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가를 측정하는 언어 평가도구이다. 국내에서는 2007년 시작되어 현재 약 1,700여 개 기업 및 기관에서 OPIc을 채용과 인사고과 등에 활발하게 활용하고 있습니다.
영어에서부터 중국어, 러시아어, 스페인어, 한국어, 일본어에 이르기까지 총 6개 언어를 체계적이고 통일된 기준으로 평가할 수 있는 외국어 말하기 평가로 자리매김하였다. 스페인어 오픽 시험의 경우 국내에서만 유효하고 델레와 플렉스에 비해 큰 공신력이 없다는 단점이 있으나, 출제시험일정이 많고, 결과가 굉장히 빨리 나온다는 게 장점이다.
결과가 빨리 나오는 시험일은 신청일로부터 나흘 뒤 실시되었다. 이번 일요일에 치면 5일 내로 결과가 나오니 적어도 다음번 지원서에는 공인 점수를 채워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응시료 78,100원이 아깝지 않도록 시험 준비를 위해 가까운 도서관으로 이동했다.
오픽 시험에 앞서서 화자의 Background Survey를 위해 주제를 선택하면 위와 같은 질문을 받게 된다. 총 40분의 시험 중 12개~15개 사이로 문제가 출제되고(난이도 1~2는 12문제, 난이도 3~6에서는 15문제), 아래의 등급으로 평가된다.
-Advanced Low (AL): 동사의 시제, 관사, 전치사, 그리고 접속사를 적절하고 틀리지 않게 사용하며 익숙하지 않은 상황이나 정보라도 문제없이 다양한 문장과 단어를 구사한다.
-Intermediate High (IH): 다양한 문장과 단어들을 적절히 잘 섞어 구사하고 개인에게 익숙한 주제가 아니더라도 대부분 설명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Intermediate Mid 1,2,3(M1,2,3): 일상적인 소재, 개인적으로 흥미 있는 소재에서 문장을 자연스럽게 말하고 많은 표현들과 단어들을 사용하여 긴 시간 대화가 가능하다.
-Intermediate Low (IL): 일상생활에 대해 문장으로 말할 수 있으며 좋아하는 소재가 나왔을 때 적극적으로 말할 수 있는 자신감을 보인다.
-Novice High(NH): 개인정보 관련한 일상적인 주제에 대해 문장으로 말하고 물어보면 대답할 수 있다.
-Novice Mid(NM): 외운 단어나 문장을 말할 수 있다.
-Novice Low(NL): 띄엄띄엄 단어를 나열하며 말할 수 있다.
오픽 시험 관련 영상들은 대본을 써서 외우는 방식이 아니라 표현을 통일시켜 어떠한 질문에도 즉각 대처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말한다. 그런데 나는 우선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내 속에 할 말을 준비하는 게 필요했다. 마치 일기를 쓰듯 저 위의 질문에 우선 대답을 작성해보았다. 실전에서도 이렇게 대답할 수 있으면 좋겠다. 가능하면 예상 질문을 더 설정하고 대답을 준비하고 싶은데 시간은 없고 할 말은 너무 많았다.
어떤 블로그에서는 거짓말쟁이가 되어도 좋다고 말한다. 꼭 나에게 사실 만을 말할 필요는 없다고. 내가 경험한 것을 말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준비하지 못한 질문에 대해 어색하게 답변하는 것보다 낫다고 말한다. 그렇게 즉흥적으로 대처하기엔 내 상상력이 너무 모자란 것 같았다.
블로그에 소개된 예상 질문들에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을 스페인어로 작성해보면서 문법을 교정하고, 발음을 연습하면서 준비했다. 내가 선택한 난이도는 5-6. AL을 받고자 도전한 것도 이지만 질문을 이해하는 데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문제는 나의 혀가 그렇게 움직여줄까 하는 의심이었다.
내가 선택한 Background Survey
현재 직장인 - 첫 직장 아님, 경험 많음, 관리직
주거형태 - 가족과 아파트 거주
여가활동 - 영화보기, 공원 가기, 해변가기
취미/관심사 - 글쓰기, 요리하기
스포츠 - 조깅, 걷기
휴가/출장 - 국내여행, 해외여행, 국내 출장, 해외출장
시험 당일. 오픽부산센터는 처음이라 시험장 가는 길이 너무 낯설었다. 40분이나 일찍 도착했네. 문법 시험이 아니기 때문에 남은 시간 동안 긴장감을 낮추는 마인드 컨트롤이 필요했다. 이런 질문을 해주면 좋겠다 생각했던 것들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내가 받은 질문들은 전혀 블로그에서 거론되지 않았던 질문이라 너무 당황스러웠다. 질문을 쉽게 받으려고 전략적으로 서베이를 선택하라는 조언을 너무 무시했었나 보다.
내가 받은 질문
자기소개
직장을 다닌다고 했는데, 직장 소개하기
담당업무 소개
직장에서 기억에 남는 일
근무처 공간 묘사
최근 주요 업무, 행사 소개
처음 일을 배울 때 훈련받은 경험, 사용한 툴
출장 경험, 인상에 남는 점
해변가기를 선택 했는데 추천하는 해변
과거 여행 경험, 인상에 남는 점
추천 여행지
문제가 발생했을 때 어떻게 해결했는지
너무 긴장했어서 다 기억에 남지 않지만, 나는 최대한 긴장된다며 솔직하게 표현하고, 내가 담당했던 프로젝트의 전문용어를 최대한 활용하였다. 그래도 듣고 이해하는데 문제는 없지만 내가 사용하는 문장 표현은 너무 단순하기 때문에 Al까지 받을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일주일이 지나고, 결과가 나왔다. 주중에 산 로또를 주말 저녁에 살짝 용지 위의 QR코드를 찍어보는 기대감과 긴장감과 흡사한 심정으로 오픽 홈페이지에서 성적확인 버튼을 눌렀다.
많이 떨어서 다양한 표현을 구사하지 못했던 것에 비하면 후한 점수가 나왔지만, AL에 미치지 못해서 약간 아쉽다. 그래도 남미에 오래 살았는데, 유창해지려면 그냥 살아선 안되고, 공부를 했어야 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