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와! 저거 완전 예술이다. 그치? ”
“묵은지를 가지고 샐러드를 만들다니, 그 시큼한 것을 가지고 상큼한 샐러드라니, 대박이다 “
한동안 화제였던 넷플릭스 리얼리티 예능 ‘흑백요리사’를 보던 아들의 입에서 연신 감탄의 말이 쏟아진다. 평소 요리를 좋아하고 맛있는 거 먹는 거라면 열 일 제 끼고 달려가는, 가끔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이 생기면 먼 길 마다하고 맛집 찾아가고 일주일을 라면으로 때우면서도 단 하루 비싸고 유명한 맛집을 찾아 나서는 MZ 세대인 아들이다.
재야의 고수 흑수저 요리사들과 대중에게 얼굴이 이미 알려진 스타 요리사 백수저들과 맞붙는 요리 계급 전쟁 같은 이 프로그램은 기획의 신선함으로 시청률 대박이 났다고 한다.
프로그램을 보는 동안 많은 워딩이 떠올랐다.
요리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사람들의 열정
경력과 명성을 제거하고 오직 맛으로만 결정하는 유쾌한 승부
일상적인 보통의 것으로 시작하여 너무나 특별한 세계를 창조하는 경이로움
재해석하고 스토리를 담아 만들어내는 매력적인 작품들
하나의 요리에 구현된 어제와 오늘의 조화
특히 거의 클라이맥스 같았던 경연 -같은 재료로 끊임없이 다른 요리를 만들어내는- 에서는
“아, 인간의 능력은 끝이 없구나, 저런 게 천재구나, 그 천재가 하물며 저리도 땀을 흘리니 정말 아름답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심사위원으로 나온 백종원과 안성재도 인상적이었다. 대중적인 요리연구가로 유명한 사람과 미슐랭 3 스타라는 타이틀로 검증된, 거의 절대 미각을 가진 것 같은 두 사람은 참가한 내로라하는 세프들에게 거의 절대적인 존재였다. 그 두 사람의 혀끝에서 참가자들의 모든 것이 결정되는 듯한 설정이 다소 부담스럽긴 했다. 뭐 어디서나 경쟁이란 이름 아래 서열을 매기는 게 인간사회의 특성 일진대 어쩔 수 없나 보다 하며 12부작을 완주했다.
각자의 완성된 요리는 후각과 미각, 시각을 자극하며 화려하게 플레이팅 되었다. 보기만 해도 와! 예술이다,라는 말이 절로 나올 만큼 비주얼이 화려했고 들어간 재료나 요리법 등이 다채로웠다. 심사자들이 요리에 대해 평가하는 포인트나 표현은 식상하지 않았고 엄정하면서도 섬세했다.
고픈 배를 채우기 위한 음식이 아니라 눈이 즐겁고 혀가 즐거운, 미세한 식감과 빛깔, 향을 음미하는 요리는 당연히 옳다. 내일 세계의 종말이 온다면 맛있는 음식을 먹다 죽자, 는 말에 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기도 한다.
몇 회차를 보다가 나는 문득 정말 말도 안 되게 어린 시절 나의 음식을 떠올렸다. 아름다운 요리의 향연에 웬 찬물이냐일 수도 있지만 그냥 나도 모르게 오롯이 떠오른 기억 속의 그것은 브라운관을 통해 펼쳐지는 화려하고 매혹적인 요리의 향연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음식이었다.
나의 고향은 제주도다. 제주도에 많이 나는 고구마. 날것으로 판매도 하지만 고구마를 얇게 썰어서 바람과 햇볕에 말리면(요즘은 건조기가 있지만 예전엔 오직 바람과 햇볕으로 말렸다.) 저장식품으로 판매를 할 수 있고 날 고구마 보다 값을 더 쳐주었다.
화려한 음식이기는커녕 빈 배를 채우는 게 음식의 유일한 쓸모였던 시절, 엄마는 그 말린 고구마(제주도에서는 '빼때기'로 불린다)를 큰 솥에 넣고 설탕이 귀하고 비쌌으니 뉴수가 같은 인공 감미료와 물을 한가득 넣어서 서너 시간 푹 삶았다. 나는 학교를 마치고 그 빼때기탕을 먹을 생각을 하며 걸어서 1시간은 족히 걸리는 집까지 거의 달음질을 쳤다.
오자마자 가방을 내던지고 부엌으로 달려간 나는 솥뚜껑을 열고 커다란 양푼에 빼때기탕 엑기스를 국자로 퍼담았다. 오래 고운 엿처럼 진하게 녹아내릴 듯한 찐득한 국물을 한 수저 떠 넣는 순간은 내 유년 시절 가장 행복했던 순간 중의 하나다. 한 그릇 다 비우고 또 퍼 담아 먹기를 서너 번은 했던 것 같다. 부뚜막에 쪼그리고 앉은 채로 정신없이 먹었던 기억.
브라운관의 화려한 요리의 향연을 보면서 나는 그 탄수화물 덩어리의 빼때기탕을 떠올렸다.
아는 만큼 보이고 먹어본 만큼 맛을 안다고 내가 맛보지 못한 저 다양하고 고급진 요리에 대하여 뭐라 말할 처지도 아니고 더더욱 딴 지 걸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그저 프로그램을 보다가 소환된 기억이 보는 내내 내 주변을 맴돌았음을 깨달았을 뿐이다.
살면서 가끔 그 맛이 떠오른다. 피곤이 가득한 날이면 당 충전하자, 하며 생크림과 초코파우더로 화려하게 쌓아 올린 조각케잌이나 달달한 라떼를 한 모금 입에 넣어본다. 우습게도 그 순간에 섬세하고 감각적인 플레이팅 하고는 거리가 먼, 거칠고 투박한 그 빼때기탕이 생각나곤 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 빼때기탕 자체가 맛있었던 건지, 그걸 먹던 그 시절이 그리운 것인지 나도 헷갈린다. 그저 잘 먹고 잘 자고 잘 놀기만 하면 되던 시절, 어렵지도 복잡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그 단순한 달달함 속에서 나는 편안했고 한가로웠다. 가방 싸 들고 급하게 달려가야 할 학원도 없었기에 배불리 먹고 난 후 나는 동네 공터에서 늦은 저녁까지 친구들과 고무줄놀이를 했다.
해 질 녘까지 노느라고 배를 가득 채웠던 빼때기탕은 이내 사라지고 허기진 배를 안은 채 집으로 돌아오면 엄마는 저녁으로 국수를 만들고 계셨다. 멸치 육수에 고명도 하나 없이 파를 숭덩숭덩 썰어 넣어 말아주었던 엄마의 잔치국수를 나는 국물 한 방울까지 달게 마셨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시장이, 배고픔이 반찬이었지 싶다.
먹을 게, 향신료가, 조미료가 많지 않았던 가난한 시절, 배고픔은 가장 강력한 식욕 촉진제였고 모든 맛에 대하여 우호적이게 만들었던 거다.
가난한 시절의 음식에 대한 기억은 끝도 없이 떠오른다.
지금에야 간식이나 식후 음식으로 흔한 게 과일이지만 예전엔 과일이 귀하고 비쌌다. 바나나는 아파서 입원한 경우에나 한 입 먹어볼 수 있는 귀한 과일이었다.
무더운 여름날, 박을 타듯 시원스레 반으로 가르면 깜짝 놀래키듯 튀어나오는, 빨간 빛깔의, 물기를 가득 머금은 그 달디 단 속살, 수박.
과일가게 앞을 지나갈 때마다 수박 속살 한 입 베어 먹고 싶은 생각에 늘 침을 삼키곤 했었다. 영 수박 한 조각 못 먹고 여름을 지나나 보다 할 때쯤 엄마는 딱 한 번 수박을 사 오셨다. 그것도 엄청 많은 양을. 여름이 끝나갈 무렵 엄마는 크기도 큰 수박 4 덩이를 들고 이고 사 와서는 마당 평상 위 커다란 쟁반에 잘라서 풀어놓았다.
자 실컷 먹어라,라는 한 마디에 우리 4남매는 먹는 동안 아무 말도 안 하고 정신없이 자른 수박을 우적우적 먹어대기 시작했다. 그 아삭하고 단물 가득한 수박을 이렇게 맘껏 먹을 수 있다니.
와, 행복하다. 더 이상의 순간이 없을 만큼 달고 맛있고 행복하다..
밤하늘을 보며 그렇게 마음속으로 외쳤던 기억이 난다. 맛있는 것을 먹을 때의 행복감은 언제나 어디서나 옳지 않은가? 나중에는 더 이상 먹을 수 없어서 트림까지 나왔다. 단맛이 덜한 작은 조각까지 다 베어 먹고 나니 그제야 할 일을 다 한 듯 우리 형제들은 배를 두드리며 나자빠졌다. 밤새 화장실에 오줌을 비우러 들락거렸음은 물론이다.
그날 이후로 여름이 다 갈 동안 그전처럼 수박 생각이 간절하지는 않았다. 과일가게를 지나가면서
그래, 나 그 맛 알아. 실컷 맛보아서 이제 궁금하지도 않거든, 하며 수박을 바라보았다. 그 계절 다시는 수박을 먹을 수 없음을 알았기에 어린 나는 미리 선수 쳐서 나를 다독이고 있었다.
지금도 배 터지게 먹었던 그 수박의, 아삭하게 씹힐 때 입 안 가득 퍼지던 달콤한 물기를 기억한다. 그날 이후 내가 먹은 수박들의 맛은 거기에 비할 바가 못 됨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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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트 식재료 특히 조미료나 소스류 코너에 가보면 눈이 휘둥그레진다. 소스류, 드레싱류, 장류, 조미료, 향신료. 식품회사는 끊임없이 새로운 맛을 지닌 신상품을 출시하고 우리는 또 새로운 소스를, 향신료를 선택하고 더하고 맛보며 요리를 한다.
미각도 개발되고 발전하는 거겠지. 사람들의 입맛은 변덕스러울 정도로 바뀌고 좀 더 맛있는, 좀 더 맛있는.. 최적의 최고의 맛을 찾아 나선다. 식재료 코너 앞에서 나는 자주 결정 장애를 경험하곤 한다.
이제 아이들은 웬만해서는 맛있다고 안 한다. 미각이 고급스러워진 건가? 아는 만큼, 먹어본 만큼 달라진 거겠지. 학교 영양사들은 아이들의 입맛이 너무 까다로워 힘들다고 한다. 영양을 고려하면서도 세련되고 고급스러워진 아이들 입맛을 맞추는 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니라는...
화려한 요리의 향연 앞에서 가난했던 시절의 단출한 맛이 떠오르니 다소 당황스러웠다.
가족들과 패밀리 레스토랑, 고기 맛집을 찾는다. 고기의 가장 맛있는 부위를 고르고 향신료의 섬세한 향을 선택하고 적정한 온도와 시간을 선택하고 최고의 맛을 음미하며 우리는 행복해한다. 사진을 찍어 인스타에 올린다.
행복하다고..
앞에 놓여진 스테이크 한 조각을 자르며 오래전 부뚜막에서 퍼먹던 빼때기탕의 맛을 떠올린다.
두 번 다시 맛볼 수 없는 맛이라는 생각에 조금은 쓸쓸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