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대형 서점에 들렀다. 그간 책을 멀리한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살짝은 질책하면서. 서점의 향은 옅어지고 새 책 냄새는 짙어진다. 사람들이 머물다 간 자리에는 저마다 다른 향기를 머금은 잔상이 남아있다.
각각 다른 주제의 코너에서 마치 책을 자연 삼아, 구석진 자리를 나무 밑동 삼아 자유로이 책을 감상하는 사람의 모습들이 다정했다. 나는 그 속에서 천천히 책을 하나하나 살폈다. 굳이 관심을 두지 않는 주제라 할지라도 한 갈피, 한 갈피 살폈다. 마음에 드는 제목이라면 무심코 집어 들고 걱정 없이 내려두었다.
책과 무언의 군중 사이에서 헤매는 경험. 오랜만이었다. 굳이 책을 고르지 않더라도 이렇게 수많은 책 사이에서 휴식하는 걸 참 좋아했었는데, 하고 애꿎은 과거를 꺼내었다. 꼬깃꼬깃 기억 속에선 도서관이 두 개나 있었던 한 초등학교의 나를 발견한다. 여유로운 운동장만큼이나 좋아했던 학교 도서관. 따사로운 봄날, 어느 햇볕과 함께.
기억은 그렇게 흘러 유튜브에서 보았던 하나의 질문에 이르렀다.
당신의 첫 기억은 무엇인가요?
정신과에서 첫 기억이란, 첫인상(First impression)과 같은 느낌으로 내 첫 기억이 무엇이냐에 따라 그 사람의 중요한 가치 또는 평소 생각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추론하기도 한다. 이는 기억이거나 구체적인 느낌일 수도 있다.
내가 떠올린 하나의 기억은 글씨를 예쁘게 잘 써서 액자에 걸린 것.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며 굉장히 뿌듯해했던 기억. 액자는 남들에게 보이는 것이고, 생각해 보니 이제껏 보이는 것에 굉장히 신경 쓰고 있었다. 현재 가진 직업도 그렇다. 다른 이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보이기 위해 글을 쓰는 것. 불안이 조금씩 스멀댄다.
하지만 이러한 자세는 오히려 독이 된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다른 이들의 평가가 더욱 중요해지다 보니 내가 지켜야 할 것은 점점 사라지고 스스로에 대한 확신은 부족해지기 시작했다. 나의 불안이 엉뚱한 곳으로 흐르던 것이 바로 이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오는 불안은 내가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힘이 점점 커지니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쌓아야 한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어버리고 만다.
하나의 물음표에서 시작되어 되묻기 위한 답변들이 와르르 쏟아지자 어느새 내 그림자만 쫓던 나를 발견한다. 그림자만 쫓아서는 거울 앞에 서는 걸 잊게 된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을 마주하고 직면하고 싶다. 자기 확신이 없으면 사람은 점점 수동적으로 변한다. 수동적으로 변하기 시작하면 그 변화를 좀처럼 알아채기 힘들다. 편하니까.
이제는 스스로에 대한 적당한 긴장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불안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 나는 그간 얼마나 느슨하게 살아왔는가, 편한 대로 살아왔는가. 부끄러운 과거가 물밀듯 밀려온다.그리고 반성하며 허투루 쓰고 있던 긴장감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해 하나씩 바라보기 시작했다.
왜 글을 좋아하게 되었는지, 나의 글은 무엇을 위함인지.
다른 이들이 건넨 칭찬들이 좋았다. 하지만 그것이 필요 이상으로 차지하다 보니 불안은 더욱 커져만 가고 무엇을 위한 글인지 까먹기 시작했다. 글은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었는데.
글을 떠나서 그간 나의 모든 행동 양식이 그러했다. 깊이 사색하는 시간을 갖지 않고 섣불리 취업한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지금 머문 자리와 머물 수 있게 도와주는 사람들. 응원하는 가족들과 친구들이 떠올랐다. 따스하게 차올랐다. 가득한 아쉬움과 감사함은 기다려주지 않는 시간 때문이다. 상반된 속성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늘 균형 있는 저울질이 필요하다.
지친 몸을 실은 버스안에서 맡은 어쩐지 익숙한 인센스 향. 빨리 집에 가고픈 마음에 내가 환각을 맡고 있는 건 아닌가 했다. 향으로 점철된 오늘 하루. 온종일 외면하던 졸음들이 밀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