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vid Lynch에 대한 짧은 글

끔찍한 낭만과 그리움

by 베로니카 Veronica





2025년 우리 곁을 떠난 데이비드 린치는, 언제나 독특한 작품 세계로 관객을 초대했다.


사실 그의 작품 세계를 정의할 수 있는 문장은 없다. 다만 독특한 사실은, 끔찍한 이미지나 기괴한 음악이 아닌 그의 동화적 스토리에 있다.


그는 아이스버킷 챌린지 당시 Over the Rainbow를 연주했을 만큼, "오즈의 마법사"의 열성적인 팬이다. 그의 작품 [광란의 사랑]에서는 차용한 레퍼런스들이 난무한다. 그는 어디에 매료되었을까? 나는 다른 세계로의 이동과 선과 악의 뚜렷한 구분이 그를 매료시켰음을 예상해 본다. 그리고 이 글에서, 나는 린치 감독 특유의 시각적 악몽이나 난해한 스토리가 아닌, 동화적 형식을 따라가는 그의 단순한 낭만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그의 작품은, 이해하기 어려운 동기로 인해 원초적인 폭력으로 곡해되기 쉽지만, 사실 '고난과 형벌'의 형식을 철저히 따른다. 그의 폭력이 단순한 오락거리로 소비되기 쉽지 않은 이유는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이를 단순한 장르적 차이로 이해할 수는 없다.


그의 폭력이 포르노적 시선에서 마침내 이해 가능한 이유는, '고난과 형벌'이 대상의 불행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포르노는 상대의 불행을 기꺼이 즐기는 자세로부터 시작함으로, 그의 폭력은 동화적 진행 과정을 충실하게 이행하되, 관객에게 풍부한 감정을 선사한다.


이를테면, [블루 벨벳] 속 제프리가 무력할 정도로 폭력에 매몰되는 장면이나, 도로시가 폭력을 견디지 못해 기이한 성벽을 가지게 되는 모든 과정들은, 완벽한 해피엔딩을 향하는 과정으로, 역시나 '고난과 형벌'에 해당한다. 'Happily Ever After'를 향하는 일종의 장애물은 대상을 성장시키기 위한 발판으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린치는 동화와 궤를 같이한다.


그는 선과 악의 대립을 뚜렷하게 이야기해 왔으므로 피카레스크 같은 장르와는 거리가 있다.

그의 작품에 선과 악은 있지만, 정상과 비정상은 없다. 정상은 선, 비정상은 악으로 구분되는 지점에 대해, 그는 역시나 동의하지 않는다.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는 노부부와 카우보이가, [로스트 하이웨이]에서는 장물아비가, [블루 벨벳]에서는 프랭크 일당이, [광란의 사랑]에서는 바비 페루가 가히 극적인 악을 형상화한다. 그들은 끊임없이 선을 유혹하고, 타락시키고, 망가트리는 명백한 악으로 작용하면서 동화와 같은 흑백논리를 강조한다.


그렇기에 그의 영화는 동화가 주는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낭만을 선사한다. 그의 영화가 찰나의 꿈같은 이유를 우리는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동화와 꿈은 현실과 동떨어졌다는 지점에서, 결국은 공통점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는 비현실적인 환상을 기꺼이 눈앞으로 끌고 온다. 썩어가는 귀를 통해, 영문 모를 차 사고를 통해. 그리고 그가 세상을 떠난 지금, 이제는 세상에 없는 이가 초대한다는 점에서 그의 영화는 서글픈 모습으로 우리 곁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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