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와 그의 사정, 그리고 두 마음이 만날 때
(*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됨.)
"독창적인 방식으로 시간과 공간을 구부려서 인간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놀라운 영화다."
- by 프로그래머 남동철(2022년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2022 부산국제영화제 공식 홈페이지, 영화 소개란에 짧게 적힌 소개말이다. 영화에 대해 이 이상으로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문장이 또 있을까. 대중적인 인기를 끌지는 못했지만, 올해 영화제에서 본 8편의 영화들 중 내겐 단연코 최고의 영화였다. 감독 바히드 잘릴반드(Vahid Jalilband)는 최근 자국 이란에서 벌어진 히잡 시위의 여파 때문인지, 예정된 부산 방문을 취소하고 대신 영상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는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개인의 책임감"과 "현대적 의미에서 희망이 무엇인지"에 관해 생각해보길 바란다고 말했다.
영화의 전반부는 비교적 전형적인 서사로 전개된다. 시력을 잃고 비관해 자살을 시도하던 주인공 알리의 아파트에 누명을 쓰고 쫓기는 여성, 레일라가 침입하게 되고, 그녀에게 연민을 느낀 그가 그녀를 보호하려는 한 가지 목적에 몰두하면서 삶의 의지를 갖게 된다는... 제대로 된 생필품마저 보이지 않는 허름한 아파트에서 알리가 그녀를 위해 음식을 남기는 장면이나, 자신을 방문한 주치의에게 허술한 거짓말을 늘어놓는 모습에서 관객은 자연히 미소 짓게 되는데, 그때 "희망"이라는 단어가 잠시 상기되기도 한다.
알리의 아파트, 그리고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회상 장면의 노동시위 현장 정도가 영화가 배경으로 삼는 장소이다. 이렇게 한정된 공간에서 촬영된, 어찌 보면 단조롭게만 보일 수도 있는 영화의 모든 장면에 색과 명암을 부여하는 것은 주인공의 마음을 따라 꿈(또는 상상)과 현실, 과거와 현재를 과감하게 넘나드는 탁월한 직조술이다. 그리고 예고 없이 등장하는 복선들. 현관문 틈으로 매일 배달되는 편지 한 장, 그 장면을 비추는 감시 카메라의 화면, 경찰들의 집요한 방문과 추궁, 누군가가 건네고 사라진 권총 한 자루까지... 영화 속에 등장하는 수수께끼 같은 장면들은 관객에게 물음표를 남기며 점점 더 영화에 몰입하게 만든다.
영화의 중반부터는 좀 더 빠른 서사의 전개와 함께 반복적으로 과거 회상, 플래시백이 등장한다. 남녀 주인공 알리와 레일라, 두 사람이 자신들만의 불행에 이르게 된 사정이 각자의 맥락에서 보여 진다. 그리고 관객은 그 두 개의 세계 속에, 두 사람 각각을 지배하는 마음의 상태에 동시에 몰입할 수 있게 된다. 으레 반전 영화가 그러하듯 이 영화의 후반부에서도 수수께끼의 해답이 (전부는 아닌) 거의 대부분 밝혀지는데, 아마 이 순간이 대부분의 관객들이 감독의 천재성과 영화라는 장르의 매력에 경탄하게 되는 순간일 것이다.
완벽주의적인 편집과 미장센과 같이 영화 전공자들이 주로 주목하는 요소들 외에, 네게 이 영화가 특별히 아름다웠던 이유는 '마음'에 대한 고찰이 담긴 방식 때문이었다. 호기심과 연민에서 시작된 알리의 "책임감"은 속죄의 시도와 무관하지 않으며, 레일라의 "책임감"은 보은의 노력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영화는 끈기 있게 보여준다.
우리와는 다른 정신문화, 이슬람교라는 단일 종교 원칙이 지배하는 이란 사람들의 도덕관념이 익숙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가 본 영화 속 주인공들이 죄의식을 마주하는 (무저항적인) 방식은 무척이나 비현실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기심과 무관심과 냉소가 "보통"이 되어버린, 각자도생의 시대 한국사회의 일원으로서 내가 이 영화를 사랑할 수밖에, 그 안에 담긴 마음들을 갈구할 수밖에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