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무게와 인간의 선량함에 관하여
"그러자 건너편 구석에서 젊은이 하나가 반론을 폈다. 아삼 사건은 정치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다고 그는 외쳤고, 그러자 다른 사람이 일어나서, 성인 남자가 어린 계집애를 몽둥이로 때려죽인 일은 돈 문제로 설명할 수 없다고 대꾸했고, 또 다른 사람은, 그렇게 생각한다면 너는 굶주려본 적이 없는 모양이구나, 개새끼, 경제가 인간을 짐승으로 만들 수 없다니 얼마나 비현실적인 생각이냐, 참차는 술잔을 꽉 움켜쥐었다." - 살만 루슈디, <악마의 시 1> (김진준 옮김, 문학동네) 중에서
영화 "씨클로"는 동남아의 이동수단을 주제로 한 하반기 전시를 준비하며 보게 되었다. 웬만한 OTT 플랫폼에선 찾을 수 없어 어렵게 구한 영화 mp4 파일은 화질이 엉망이다. 70인치 TV에 연결했던 외장하드를 뽑아 결국 노트북에 연결했다. 열악한 화질과 음향을 '참고' 보기 시작했지만 2시간의 러닝타임 내내 한 순간도 그 작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베트남 전쟁 이후 격변하던 사이공(지금의 호찌민)을 배경으로, 도시의 빈곤층과 갱들을 주인공으로 한 이 영화는 1995년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임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본국에서는 상영이 금지되기도 했다고 한다.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니 이 영화가 아직까지 회자되는 두 가지 이유는 30대 초반 매력적인 양조위를 볼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라디오헤드의 "Creep"이 영화 배경음악으로 쓰였다는 점 때문인 것 같았다.
영화는 위기에 내몰려 범죄에 연루된 선량한 사람들, 그리고 자신의 악행으로 몰락하게 되는 악인들의 인간적인 모습을 그려낸다.
첫 장면에 등장하는 주인공 가족들은 모두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가난하지만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네 사람의 가족 구성원은 모두 자신의 자리에서 성실하게 밥벌이를 한다. 할아버지는 자전거에 바람을 채워주고, 누나는 시장통의 물을 나르고, 여동생은 어른들의 구두를 닦는다. 그리고 열여덟 살 주인공 소년은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은 아버지를 따라 씨클로를 몰러 나선다. 하지만 갱단의 계략으로 씨클로를 잃어버린 소년이 반강제적으로 갱단의 말단 행동대원이 되는 것에서 불운이 시작된다. 마약 밀매와 방화, 총기 살인의 역할까지 부여받은 그는 점차 수위가 높아지는 악행들 앞에 주저앉게 되고 절망에 다다른다.
여느 서사 예술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 또한 평범한 선인보다는 모순적이고 복합적인 내면을 가진 악인들이 더 매력적으로 그려진다. 양조위가 연기한 이름 없는 남자는 마약 밀매와 매춘을 알선하는 갱들의 중간 두목이지만, 부친에게서 학대를 받았던 경험과 선천적인 병약함으로 연민을 이끌어내는 인물이다. '시인'이라 일컬어지는 그의 대사는 대부분 시 구절의 독백으로 이루어지는데, 그가 가진 남다른 감수성은 결국 사랑하는 여인을 상처입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을 낳고 스스로 파멸의 길을 가게 만든다.
스스로 어찌해볼 수 없는 사회적 조건, 역사의 조류 위를 표류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지의 나약함. 그러한 필멸의 존재를 위로하려 '운명'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살만 루슈디의 소설 <악마의 시>의 한 장면, 굶주리는 인간은 짐승이 되는 것이 자명하지 않느냐는 물음. 그 말속에 담긴 차가움에 대해 생각한다. 도리어 '굶주리지 않는 지금 이 시대에야 말로 서슬 퍼렇게 두 눈을 부릅뜬 차가움을 목격할 때가 있지 않은가' 하고 생각한다. 배고픔을 모르는 차가움. 피 흘려보지 않은 자의 잔인함. 10월 그날 이후 자주 생각한다. 인간의 잔인함에 관하여. 짧은 기간, 조급히 기획한, 요란한, 익명의 퍼포먼스. 애도를 흉내 낸, 봉합과 은폐의 방식에 관하여.